929화 주검의 영광 (16)
마도 <명운>은 생명을 폐하는 길.
초위 마법 <심혼진제: 에린달리스(Eryndalith)>, 이는 루네시카의 힘을 강화하는 제단을 통해 대상의 영혼을 확장시키고.
초위 마법 <아니마 탈리스>는 명운의 마도를 기반으로 해 영혼을 다루는 욕망 – 아니무스에 깃든 영혼을 드라벤의 것으로 만든다.
영혼이란 죽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개념…… 드라벤은 그 이치를 이해했기에 아니무스의 권능을 끌어낼 수 있다.
두근.
수많은 박동 소리가 내면에서 메아리친다.
아니무스에 깃든 일부 영혼들이 드라벤의 영혼에 이제야 온전히 녹아내렸으니, 이제 그는 하나이자 다수와도 같다.
스르르르륵.
광검에 목이 깊게 베이자마자 드라벤은 지체 없이 자신을 죽였고, 죽음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리며 몸은 원상 복구되었다.
……!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눈을 부릅뜨며 드라벤의 회복력을 통찰했다.
눈에 익은 재생력이었다.
‘케실루스의 마도?’
벨디른 공화국에 유골룡 사태를 일으켰던 주검의 영광의 네 번째 하인, 케실루스 차에렌.
케실루스는 몸이 가루가 되어도 부활하는 마도를 개척했다. 그리고 죽음을 거부한 대가는 죽을 때마다 가속하는 돌이킬 수 없는 노화…….
베르덴과 아드리안에게 몇 번이고 죽음을 맞이한 케실루스는 그렇게 늙어 죽었다.
“기억하나.”
마도 <사환(死還)>
“네놈들에게 죽은 하인들의 마도를.”
케실루스의 영혼을 받아들인 드라벤이 타인의 마도를 개방했다.
하지만 이미 과거에 수명의 제한을 극복한 적이 있는 드라벤에게 마도에 의한 노화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육체가 노쇠하지 않는 불사자가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도, 무투, 신앙.
드라벤에게는 여러 영혼이 깃들었으며, 그들의 고유한 힘 또한 전해졌다.
이로써 마법계 초월자의 상식을 넘어섰으니.
영혼이 보유한 생전의 힘을 재현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라벤의 최후 초위 마법 <아니마 탈리스>의 본의다. 감당할 수 없는 대가와 반동 따윈 고려하지 않는다.
드라벤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초월자들을 얕보지 않았다. 최대의 적수. 드라벤은 조금 뒤의 미래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걸 던졌다.
단 하나의 이상을 위해.
“으아아아아아──────!”
드라벤은 온몸에 힘줄과 핏대를 세우며 포효를 내질렀다. 압도적인 힘의 급류에 인드렌의 구속력이 깨졌다.
존재가 전율한다.
다섯 명의 초월자는 육체 안쪽의 영혼이 저릿한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드라벤의 격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증폭했다.
‘케실루스의 마도만 가진 게 아니군.’
베르덴은 양손으로 [인테리스]를 붙잡고 무한한 마력을 끌어냈다.
‘마치 초월자‘들’이 합친 듯하다.’
……주르르르륵.
드라벤의 두 눈에서 끈적하고 거무스름한 핏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눈물을 닦지 않은 채 해진 로브를 뜯어 버렸다.
그의 손가락을 장식한 반지가 번쩍이더니 전신 갑옷으로 변모했다.
쳘혈의 왕관을 본뜬 국가의 상징.
크세리온 황제의 호위 기사단───크세리온의 영광을 이끄는 단장의 정복.
아티팩트도, 마법 물품도 아니었다.
초월자 전쟁 당시에 본래의 방어구는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갑옷은 그저 과거의 형상을 재현한 모조품에 불과했다.
마음마저 옛 시절로 돌아가 버린 드라벤은 주검의 영광의 첫 번째 하인이자, 위대한 크세리온의 영광의 단장으로서 속삭였다.
“와라, 제국의 적이여.”
바람이 스친다.
연광連光
연환 – 낙추落錐
아드리안의 광검과 마울러의 건틀릿이 앞뒤에서 다가왔다. 드라벤은 아니무스의 건틀릿을 까딱거리며 몸을 틀었다.
마검도 없이 맨손으로 무투계 초월자들의 기예를 흘려 버렸다.
‘이 새끼……?’
‘갑자기 기술이……!’
쩌억!
마울러와 아드리안의 시야가 흔들렸다.
유의미한 충격이었다.
둘이 휘청거린 사이 드라벤이 마검 [모르베인]을 회수했다.
<현뢰 - 유전(流電)>
파멸의 우레가 폭발했다.
왼팔로 심장과 머리를 가린 드라벤이 입안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그의 어두운 동공에 미세하게 지진이 일었다.
벤디에가 칼날이 반월처럼 휘어진 곡도를 쥐고 쇄도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폭풍과 같은 회전 베기를 드라벤이 제자리에서 대응했다. 이전과 다른 양상이다. 벤디에의 손끝이 약간 저릿했다.
───격투술과 검술의 완성도가 아까와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게다가 목을 베어도 죽지 않으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겠군요.
벤디에가 기를 통해 모두에게 의념을 전달했다.
───베르덴의 마도로 드라벤의 숨통을 끊든지, 아니면 목적을 우선하든지.
드라벤이 검붉은 마력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건 이미 드러난 사실이었다.
이에 네 명의 초월자가 의념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틈을 만들어 보죠.
총 네 개의 방위에서 드라벤에게 강대한 힘이 재차 닥쳐 왔다.
시끄러운 쇳소리.
고막을 뭉개는 뇌성.
베르덴, 아드리안, 벤디에, 마지막으로 가레스의 공세에 드라벤이 맞섰다. 서로 합을 맞춘 적 없지만 일반적인 공방이었다.
그런데도 드라벤은 육체의 안위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날뛰었다. 일부나마 합이 이루어졌지만 회피와 방어에는 한계가 있었다.
원거리에서 가해지는 마법적 현상.
<자연 제어: 대기(大氣)>
인드렌의 마법이 드라벤의 사지, 그리고 머리와 몸통을 둘러싼 공기를 제어하여 드라벤의 움직임을 지연시켰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나 찰나를 느낄 수 있는 초월자들에겐 충분한 간극이었다.
광검이 심장을 관통했다.
레이피어가 관절 부위들에 구멍을 뚫었다.
건틀릿이 안면을 쳐부쉈다.
몇 번이고 죽음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드라벤은 필사적으로 베르덴의 파멸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옛 왕의 신체로 막아 냈다.
‘역시 이 움직임.’
베르덴의 사고가 가속했다.
‘아니무스는 영혼과 관련된 1대 전설…… 그리고 드라벤은 타인의 마도만이 아니라 고유한 힘 자체를 발현하고 있다. 방금 초위 마법이 영혼이 가진 생전의 힘을 쓸 수 있는 거라면──’
드라벤의 최후의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베르덴이 이해했다.
‘지난 800년 동안 아니무스로 초월자들의 영혼을 확보했군.’
초대 네크로맨서의 기억에서 보았던 인물들이 드라벤에게서 엿보였다.
대제(大帝).
초월자 전쟁 당시 동대륙을 지배했던, 그리고 옛 왕이 약점을 드러내게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결국에는 옛 왕에게 살해당했던 ‘8위계’급 무투계 초월자의 권격술.
대제뿐만이 아니다.
드라벤의 검술 또한 어느 초월자의 것이다.
지금 드라벤은 대제를 포함하여 최소 3명 이상의 초월자의 영혼을 품고 있다. 베르덴의 통찰력이 그리 판단했다.
콰드득!
벤디에가 세 개의 창을 꺼내 순식간에 드라벤의 관절 가동 범위를 봉쇄.
마울러가 드라벤의 등 뒤에서 목을 전력으로 조였고, 인드렌이 벤디에의 창이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드라벤의 심장을 향하는 파멸의 창날을 옛 왕의 손이 붙잡았다. 세 명의 초월자가 막으려 했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마울러가 욕설을 뱉었다.
“시발, 옛 왕이 뭐길래 고작 팔하고 다리 따위의 힘이 이렇게……!”
“아드리안, 가라.”
아드리안은 신속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드라벤이 왔던 통로로 질주했다.
드라벤의 목숨을 놓치지 않고, 주검의 영광의 계획마저 부순다. 두 마리 토끼를 붙잡는 것이 그들의 계책이었다.
우르르르릉.
“누가…….”
드라벤의 마력에서 뇌명이 들려왔다.
“누가 보내 준다고 했나!!!!!!!!!”
마력회로에서 쏟아져 나온 푸른 광명이 일순간에 폭발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초월적인 전격이 베르덴, 벤디에, 마울러뿐만이 아니라 기이하게도 마력을 타고 전도되어 인드렌까지 마비시켰다.
벼락이 된 드라벤이 아드리안보다 먼저 통로에 도착해 길을 막았다.
“통곡하라.”
첫 번째 시동어에 반응한 마검 [모르베인]에서 음험한 기운이 방출됐다. 한데 그 위로 신성한 빛이 내려앉았다.
<성휘: 교화>
자쇄紫碎
아드리안이 광검을 반쯤 휘두르다가 멈추자 보랏빛 충격파가 터졌다. 마검으로 행해진 루아스교 성자의 검술이 궤도를 약간 벗어났다.
신성한 죽음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그렇게 드라벤의 옆을 지나치려던 순간, 마검을 든 팔 아래로, 전격으로 휘감긴 손아귀가 아드리안을 겨누었다.
<뇌호(雷呼)>
포효하듯 번개가 통로의 입구를 크게 뒤덮으며 아드리안에게 작렬했다.
“크읍!!!!”
격통과 척력을 버티려고 했던 아드리안이 다시 공동 안쪽으로 추방당했다. 뼛속까지 파고든 뇌격의 파괴력이 심상치 않았다.
으드득.
드라벤이 거칠게 호흡하고는 다시 한번 마도의 전격을 끌어모았다. 번개의 정수, 뇌정이 깃든 마검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공동을 둘러싼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서히 폭풍이 몰아치듯이.
이로써 드라벤에게 깃든 초월자가 누구인지 3명까지 확인됐다.
약 8세기 전 초월자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초월자 집단의 수장 동쪽의 대제.
옛 왕의 신체를 절단한 성자, 에단벨트.
그리고.
옛 왕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동쪽의 대제와 달리 살아남은, 크세리온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주역으로 활약한 인물 중 하나인 초월자.
‘반토레온 로든 타라니스……!’
베르덴의 아공간에 보관된 반테리온의 수기의 저자인 8위계 마법사의 영혼이, 드라벤의 영혼과 합일을 이루었다.
<케라우스 대광역>
무지막지한 푸른빛의 번개 폭풍이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미궁의 공동을 봉인했다.
8위계 고유 마법.
이제는 아무도 나갈 수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다.
콰과광!
폭풍에서 떨어진 낙뢰가 드라벤의 바로 옆에 내리쳤다.
전류가 피부를 파고든다.
억지로 반토레온의 마법을 재현했기 때문일까, 대광역이 드라벤을 시전자로 인식하지 않고 적으로 규정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그 힘, 감당할 수 없을 텐데.”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나의 숭고한 희생은 폐하께서 알아주실 테니.”
드라벤은 말 그대로 생명을 갈아 넣어 초월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결과가 어떻든, 오늘이 끝나면 단순히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월자는 초월자.’
베르덴은 다수이기에 더 큰 손해 없이 드라벤을 잡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전력을 조금이나마 온존하려고 생각했던 걸 반성했다.
드라벤이 일념으로 살아온 800년이라는 세월은 확실히 길었다.
전력에는 전력으로.
주변에 외부인이 있지만 베르덴은 더는 수단을 감추지 않기로 결단했다.
“길은 내가 만들겠다.”
마울러가 흠칫했다.
“뭐?”
“틈이 생기면 바로 움직여라.”
베르덴이 스태프를 내세웠다.
“개벽하라, 인테리스.”
시동어에 반응한 [인테리스]가 발광했다. 무한의 마력이 일대를 뒤덮었다. 그의 마력회로의 출력이 완전히 해제되었다.
“무, 무슨 마력이…… 윽!”
인드렌이 과민하게 반응한 마력 감지 능력을 가라앉혔다.
그야말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방대한 마력의 양이 전원을 압도했다. 벤디에조차도 평정이 깨져서 눈을 부릅떴다.
드라벤은 턱을 당긴 채 마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말아 쥐었다.
식은땀이 턱끝에 맺혔다.
파멸의 마도.
벽안이 검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인테리스 대광역>
무한한 마력이 파멸로 변질돼 베르덴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몰아치는 현뢰의 폭풍이 드라벤의 폭풍과 충돌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대광역이 비틀리며 잠시 정지했다.
지금이었다.
아드리안이 곧장 진격하고, 반 박자 늦게 그 뒤를 마울러가 따랐다. 마울러는 일단 본능에 의존하기로 했다.
뭔지 모를 검붉은 폭풍 안에 있는 것은 위험하단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이다.
“……!!”
콰과과광!
갑자기 내리친 현뢰에 드라벤이 과민하게 반응해 순간 물러났다. 베르덴이 공간을 넘어 드라벤과 검을 맞댄 뒤 그대로 몰아붙였다.
옛 왕의 왼팔을 뻗었다.
베르덴이 그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파멸을 한층 더 극대화했다. 현뢰만이 아니라 소멸의 화염까지 겉으로 드러났다.
드라벤이 흠칫했다.
“그 흑염은, 설마 암월의……? 베르덴, 네놈도 영혼을 다룰 수 있다고? 아니무스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다히트의 영혼을……?!”
“너 따위가 감히 이해하려 들지 마라. 그리고, 아까 희생이라고 했나?”
옛 왕의 팔은 베르덴에게 닿지 않았다.
“희생은 자처하고, 홀로 감당하는 거다.”
베르덴이 혐오감을 드러냈다.
“네놈들처럼 숭고하다고 자찬하며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라.”
“……인간적이군.”
드라벤이 진심으로 조소했다.
“영혼의 진실을 알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기서 진실은 하나뿐이다.”
베르덴의 무정한 눈동자가 드라벤을 노려봤다.
“드라벤 르마르크, 네가 내 경지의 제물이다.”
* * *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 그 지상.
각자의 진영에서 비행정을 지키고 있는 세력의 일원들이 원인 불명의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공이 암적색으로 물든다.
공포에 가까운 전율.
불길하다.
천체학의 상식을 무시한 기이한 금환일식보다 훨씬 더…….
“저, 저, 색채는.”
아르나크 제국 마법성 로드, 메리사 페스필드가 곧 기겁했다. 검은 화산에서 경험했던 그 마력의 빛이 틀림없었기에.
쿵.
에온의 진영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검붉은 하늘을 향해 예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