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화 주검의 영광 (17)
파지지지직───!
파지직───!
콰과과과과과과과과───!
<인테리스 대광역>과 <케라우스 대광역>이 쉴 새 없이 우렛소리를 터뜨리며 지하 공동의 대기를 갈기갈기 찢었다.
폭풍과 폭풍이 맞닿은 모든 부분에서 빛과 열기, 그 이상의 반응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만한 마력은 접해 본 적이 없다.
인드렌은 간접적인 마력의 위압에 마력회로가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마치 심해에 빠져들어 수압에 짓눌리는 듯한, 그런 느낌.
‘초, 초위 마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런 대규모 마법을 잠깐의 전조만으로 구현하다니. 준비 과정이 길지 않은 만큼 대가는 클 테지만, 베르덴이 여태껏 쌓아 올린 경지는 내가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구나……!’
일견 파멸과도 같은 폭풍은 드라벤이 만들어 낸 푸른 번개의 폭풍처럼 낙뢰를 생성했다.
서로의 폭풍에서 생성된 낙뢰끼리 충돌하고 있어 당장 벤디에와 인드렌에게 닿진 않았지만 위험하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검붉은 번개 폭풍.
마법적 경험으로 추측하자면 아무래도 베르덴을 제외한 모든 존재를 적으로 규정하고 멸하려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인드렌은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일순간 통찰력을 발휘했다.
방금 공간을 뛰어넘어 단신으로 드라벤을 밀어낸 베르덴의 육신에서 검붉은 전격만이 아니라 새까만 화염이 타오르고 있다.
‘첫 번째 하인이 말한 대로다. 저 흑염은 분명히 암월 다히트 웨스로엘이 개척한 망화의 마도일 텐데, 어떻게 베르덴이 쓸 수 있는가. 타인의 마도를 온전히 모방한다? 그것이 진정 가능한 일인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드라벤도 타인의 마도를 빌려 쓰는 것 같았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온 힘…… 반면 베르덴은 자신의 고유한 마도인 듯 자연스러웠다.
소멸의 불꽃을 구현하는 데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는 기색이었다.
인드렌의 생각이 상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찾아 꿈틀거린다.
‘보헤미른 마탑주인 만능의 발로크 베시아스를 죽인 다히트 웨스로엘, 부상당한 다히트 웨스로엘을 살해한 베르덴.’
연쇄적으로 발생한 초월자 살인이 베르덴이 밝힌 사실이었다.
딱히 모순의 여지는 없었다.
마탑 연합 최전선에서 다히트 본인이 등장했고, 발로크가 제자인 로벨린을 미끼로 해 숨겨 둔 함정에 의해서 다히트는 공간째로 전이를 당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으니까.
그 후에 보헤미른 마탑과 블랙 아워 전쟁 중 그들 간의 1차전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던 영원의 절벽은, 마지막이 된 2차전으로 사라진 절벽의 주변 일대마저 송두리째 삭제당했다.
다른 세력들도, 아티슨 마탑도 그 흔적을 진즉에 확인한 바 있다.
이런 증거와 베르덴의 증언이 한데 모여 마법계 초월자 전쟁은 마법계 총회의에서 역사적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베르덴이 다히트를 예전에 죽였고, 망화를 써서 다히트인 척 연기해 발로크를 처단함으로써 초월자의 규율 제재를 피한 거라면?
이 또한 딱히 모순의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두근.
‘베르덴, 자네는 역시 극도로 위험한 초월자야.’
인드렌 피어시아 레이트라는 존재 자체가, 그가 추구하는 이상이 베르덴을 부정한다.
본질적인 거부감이 드라벤을 향한 것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았다. 베르덴을 내버려 두면 세상은 잔혹한 혼돈에 휩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관망했지만 드디어 외면할 수 없는 확신이 생겼다. 죽여야 한다. 어떻게든.
가급적이면 드라벤과 함께 처리하는 방법이 가장 간단하리라. 베르덴이 드라벤에게 신경이 쏠려 있는 지금이 적기일 터.
인드렌의 마도가 한 명이 아닌 두 명을 대상으로 지정하려던 그때였다.
“그리고, 아까 희생이라고 했나?”
베르덴은 옛 왕의 팔을 막아 내며 강렬한 의지와 혐오감을 내비쳤다.
“희생은 자처하고, 홀로 감당하는 거다.”
……!
“네놈들처럼 숭고하다고 자찬하며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말들이 인드렌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드라벤이 뭐라고 대답했지만 그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베르덴이 일부나마 드러낸 근본적인 사상이 훨씬 더 중요했다.
솔직히 말해서 경악스러웠다.
급진적인 변화를 이룩했던, 그리고 지향하려는 자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이다.
주변과 타인이 어떻게 되든 무작정 변혁만을 추구하여 세상을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뜨린다.
사회는 생물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환경이 한순간에 바뀌어 버리면 적응하지 못한다. 예로 마탑은 동력원이라는 강대한 힘을 소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십 년에 걸쳐서 속이 썩어 버렸다.
권력을 둘러싼 파벌 싸움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인드렌은, 아티슨 마탑의 병폐를 바로잡고 안정적인 변화를 수용하도록 오랜 세월을 헌신했다.
변화와…… 희생.
그렇다.
인드렌도 아티슨 마탑과 구성원을 위해서 희생을 했다. 조직 자체를 수술하여 현 아티슨 마탑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게 전보다 이상에 가까운 균형을 구축했지만, 아티슨 마탑의 관점에서는 근본마저 들어내는 격변이었다.
점진적인 변화에 의한 적응과 발전.
급격한 변화로 썩어 버린 일부를 도려내어 깨끗한 새살이 돋아나도록 하는 저항과 개선.
인드렌은 전자를 추구하되 전자를 위해서 후자를 행했다. 그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변혁(變革)이자 혁정(革正)이다.
‘만약 베르덴이 일으키는 변화가 끔찍한 혼란만 자아내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어떠한 변혁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면, 그 변혁이 나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가정에 가정이 꼬리를 문다.
인드렌의 두뇌는 초 단위를 다시 수십 개로 쪼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황은 긴박하게 전개됐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각!
아드리안의 광검이 폭풍끼리의 접촉면을 정확히 베어 갈랐다. 대광역과 대광역이 부딪혀 각각의 봉인 기능을 상쇄한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날에 전도되어 흘러 들어온 전격이 근육과 뼈에 침투했으나, 그는 자신의 저항력을 믿고 검을 끝까지 내리눌렀다.
자색의 검기가 틈을 만들었다.
마울러가 한쪽 어깨를 내세운 상태로 지면을 힘껏 짓밟았다. 대광역끼리 충돌하는 지점에 육중한 충격이 가해졌다.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었다.
대광역의 봉인을 뚫은 마울러가 바깥, 그러니까 주검의 영광이 옛 왕의 부활을 준비하는 미궁의 끝과 이어진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아드리안은 아주 잠깐 통로 앞에 서서 베르덴과 의념을 나누었다.
───반드시 두 번째 하인을 죽여라.
───책임지고 처단하겠습니다, 주군.
드라벤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한 아드리안이 마울러를 따라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 주군의 명이 우선이었다.
“감히……!!”
드라벤이 옛 왕의 팔로 마검 [모르베인]을 바꿔 들었다. 베르덴이 후방으로 물러나며 몸을 낮춘 채로 회전해 검격을 피했다.
동시에 마안으로 빚어진 성신 마법이 드라벤을 겨냥했다.
쇄성(鎖星), 레그나룸.
네 번째 별을 뜻하는 회색 별자리가 원을 이루어 드라벤의 움직임을 봉했다. 베르덴과 드라벤의 마력 싸움이 벌어졌다.
───대광역끼리 위력을 상쇄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나갈 수 없다. 길이 닫히기 전에 어서 너희도 나가라. 드라벤을 오래 잡아 두긴 어렵다.
결국 <인테리스 대광역>이 드라벤의 <케라우스 대광역>을 집어삼킬 것이다. 드라벤이 억지로 펼친 남의 마법이기에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개념적으로 파멸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힘의 상쇄가 깨지면 폭풍은 본래의 형태를 금세 되찾을 테니, 베르덴을 제외한 아군은 서둘러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광역의 영향력은 베르덴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가해지므로.
───확실히 이곳에 갇히면 저희도 무사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그렇다면 그전에 드라벤을 처단할 기회를 찾도록 하죠.
벤디에는 떠나지 않고 아티팩트의 무기고에서 다른 무기를 찾았다. 그녀의 무기고는 아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편이 합리적이니까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네. 자네 혼자서 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순 없어. 검붉은 폭풍에 휩쓸리지 않도록 알아서 주의하지. 그리고, 자네들이 전위에 선 동안 드라벤이 빌려온 외부 힘의 연결점을 간파하는 데 성공했네.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는 지팡이.
───초위 마법을 준비하겠네. 둘이 시간을 좀 더 벌어 주게.
인드렌은 전력으로 드라벤의 힘을 아예 봉인할 작정이었다. 전부는 가둘 수 없을지언정 드라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리라.
베르덴은 진정 무엇을 변혁하려는가?
그걸 알아내기 전까지 인드렌은 베르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본질적인 거부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감히 무엇을 작당하든 변하는 건 없다.
드라벤의 의념이 끼어들었다.
베르덴, 인드렌, 벤디에가 서로 뭐라고 했는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서로 의념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감지할 수 있었다.
우득, 쿠우우웅!
드라벤이 크게 왼팔을 휘둘러 레그나룸의 봉인을 부수었다. 두근. 영혼 발작의 주기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으나 되레 그것이 힘이 되었다.
죽어 갈수록 가까워지는 이상.
한 명의 초월자로서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초월자 다섯에서 셋, 이어서 하나는 후방에서 모종의 마법을 준비하고 있으니 나를 상대해야 하는 초월자는 고작 둘.”
드라벤은 죽음이 짙어진 얼굴로 더욱 강맹해진 사기를 방출했다. 태양이 지기 직전에 잠시 번쩍이는 순간의 빛처럼.
“순차적으로 죽여 주마.”
“옛 왕의 조각난 신체는 절대로 훼손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계속 상대해 보니 소문과 조금은 다른 것 같더군.”
위성(衛星), 테아브.
다섯 번째 별이자, 마법에 추가적인 원소 피해를 더하는 여덟 속성의 위성이 베르덴의 중심으로 삼아 공전했다.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헛소리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드라벤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나마 말문이 막혔다. 검붉은 마력은 수백 년 동안 보았던 마도와는 근본이 달랐다.
너무도 이질적이다.
저게 심리를 흔들기 위해서 던진 말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늘의 변덕은 종잡을 수 없군.”
드라벤은 옛 왕의 신체가 조각났던 그때와 같은 분노를 드러냈다.
“하필이면 폐하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왜 네놈을 탄생시킨 건지.”
“착각하지 마라.”
베르덴의 마력이 확산했다.
“선택하는 건 나다. 하늘이 아니라.”
그때 <케라우스 대광역>이 붕괴되며 <인테리스 대광역>이 공간을 휘어잡았다.
유일한 틈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내부에서 어떠한 살육전이 벌어지든 간에 베르덴이 죽거나 베르덴이 영역을 거두지 않는 한은 누구도 나갈 수 없다.
옛 왕의 부활 의식이 더 빠를까.
대륙의 초월자들이 죽는 게 더 빠를까.
하인들이 처단당하는 게 더 빠를까.
시간(時間).
그것이 전쟁의 관건이었다.
* * *
섬의 지하 미궁 어딘가에서 멈춰 선 레그리트가 주변을 둘러봤다. 고요했다. 얼마 전까지 득실거리던 미라들도 보이지 않았다.
“……놓쳤군.”
단검을 든 비공식 초월자는 철저하게 미라들을 이용해 몸을 숨기며 기습을 일삼았고, 끝내는 완전히 기척을 감춰 버렸다.
불쾌한 기운을 쫓아가려고 해도 너무 멀어져서 그런지 추적이 어려웠다.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은폐에 특히나 능했어. 초월의 적응은 이미 마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세력에서 보낸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이렇다 할 만한 집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지의 섬의 지하 유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초월자라니?
애초에 이 섬 자체가 며칠 전에 히아레마르 내해 밑바닥에서 솟아난 이상 이런 정보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어쨌든 미라들로 방해 공작을 펼쳤으니 주검의 영광의 조력자라고 볼 수 있지만…… 주검의 영광을 돕는 정체불명의 별개의 세력이 있다는 것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이대로 머리를 굴려 봤자 답은 안 나오겠지. 일단 프리발트와 합류할까.’
드래곤의 특징을 감추고.
황금 갑옷을 조작해 전신을 덮었다.
그렇게 레그리트가 제국의 탐사대에 돌아가기 위해서 길을 찾던 도중이었다. 제한된 감지 능력의 범위 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장 그리로 향하니 낯익은 두 명이 레그리트의 눈에 띄었다.
“모험가 길드와 루아스교?”
“아, 제국의……!”
“제국의 워 로드! 왜 여기 혼자 있는가?”
그들은 모험가 길드 탐사대를 지휘하는 완벽한 모험가와 루아스 교국의 탐사대를 이끄는 그레고르반 추기경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러는 너희들은?”
“갑자기 미라 기사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저 혼자 떨어졌습니다. 모험가들은 지금쯤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피차일반이네. 숫자가 너무 많은 탓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거대한 미라 기사들은 성직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었으니.”
“난관이었군. 그런데 움직이지 않고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레고르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모험가가 답했다.
“주검의 영광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기운이 느껴지기에 길을 찾고 있던 도중이었죠.”
“기운이……? 나는 별로 느껴지는 게 없다만.”
“그런 종류의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고 하네.”
레그리트는 순순히 납득했다. 아티팩트에는 여러 기상천외한 물건이 존재한다.
“그래서 길은 찾았나?”
“아직입니다. 방향만 알아낸 것뿐이죠. 시간을 들인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미궁의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레고르반은 루아스교의 추기경이었고.
완벽한 모험가는 옛 왕의 부활을 막아야 하는 죄인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레그리트가 물었다.
“방향은 북쪽인가?”
“북서쪽입니다.”
완벽한 모험가가 가리킨 곳에는 미궁의 두꺼운 벽이 있었다. 레그리트가 다가가 건틀릿으로 강하게 두드렸다.
“두껍군. 또 단단하고.”
그녀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부술 수 없는 건 또 아니지.”
“네?”
“둘 다, 나를 도와라.”
황금빛 투구 아래로 용인의 눈동자가 명멸했다.
“지름길을 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