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4화 세계의 틈새 – 2
햇빛이 닿지 않는 숲의 그늘에서 묘한 일렁임이 생겼다. 늙은 악마가 느릿하게 땅에 무릎을 꿇고, 그 거짓된 흙을 어루만졌다.
[지금까지와 종류가 다른…… 영혼의 발자취…… 깨끗하고, 자유롭고, 아득한…… 그러나 올다르크도, ‘당신’도 아닌…… 아…… 드디어…… 드디어…… 인 겁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녹시아스 님.]
늙은 악마는 눈물을 흘렸다.
[저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겁니까?]
늙은 악마는 그 영혼이 남긴 발길을 따라 숲의 경계선에 멈췄다.
운명의 도시, 렌디바르.
저 멀리 언덕 아래에 있는 증오스러운 ‘배신자’의 영역에 구원자가 있다. 왜 그런 존재가 세계의 틈새로 흘러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주고.
헌신해야 한다면 목숨 바쳐 헌신하겠다.
설령 염원하던 구원자가 아니더라도 확인은 해야 한다.
그러므로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숲속에서 악마들이 안광을 번뜩였다.
[어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배신자가 오기 전에.
* * *
베르덴은 세간의 기본적인 상식과는 달리 악마를 적대하지 않는다. 또한 적이라도 해도 저런 식으로 고문하지도 않는다.
지성체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는 베르덴에게 죄악이므로.
고문 기술자는 베르덴의 계명을 위반했다.
“저기용? 누구세─헙?!”
베르덴의 날카로운 앞차기가 작렬했다. 고문 기술자의 늑골에 금이 가고, 그를 덮고 있던 근육이 크게 파열했다.
악취 나는 벽면에 충돌한 육중한 거체가 바닥에 엎어졌다.
죽이지는 않았다.
아직은.
베르덴은 피 묻은 날붙이를 들어 악마의 사지를 단단히 결박한 가죽 끈을 끊었다. 쓰러지는 악마를 받아 바닥에 천천히 앉혔다.
“움직일 수 있겠나?”
“흑…….”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악마인 말하는 악귀는 고통에 이성이 거의 마비됐는지 몸과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그래도 생명력이 강해서 이대로 죽지는 않겠군.’
포션이라도 주고 싶지만 지금 [레인디아]가 없어 아공간을 열 수 없다.
일단 옮긴다.
만약 구출하게 되면 도시 어디에 숨길지 생각은 해 두었다.
‘그 전에.’
촤아아아악!
베르덴이 구석에 놓인, 물이 담긴 항아리를 툭 걷어찼다. 코와 입이 막히며 숨을 토한 고문 기술자가 눈을 떴다.
“으허헉! 커흑, 쿨럭, 쿨럭!!!”
“두 번 묻지 않겠다.”
촛불이 일렁인다.
후드 아래로 감춰진 벽안의 빛이 반사됐다. 격이 다른 존재감이 고문 기술자의 심신을 위에서 아래로 짓눌렀다.
“왜 말하는 악귀를 고문했나.”
“네, 네엥?”
고문 기술자가 얻어맞은 부위를 부여잡은 채 몸을 떨었다.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거, 그거야, 헉, 처형 전에 뼈와 살을 부드럽게 다져야 하니까……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한 다음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하니까용…….”
“왔던 곳이라고?”
“폐하께서, 명하셨어용.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해용……. 와, 왔던 곳으로…… 왔던 곳으로…… 왔던, 곳으로…….”
공기가 경직됐다.
“시발, 오지 말라니까.”
고문 기술자가 자기 피부를 손톱으로 긁었다.
“눈꺼풀을 자르고, 눈동자를 저미고, 손톱 사이를 벌리고, 팔을 절단하고, 다리를 톱질하고, 아가리를 찢고, 장기를 꺼내고, 성기를 뜯고, 피부를 발라 내고, 근육을 긁어 내고, 뼈를 으깨고. 아아!!!!! 고통으로 일그러뜨려서 다신 올라오지 못하게!”
피거품이 끓었다.
“올라오지 좀!!!!!! 말란 말이야!!!!!!!!!!!!”
퍼엉!
고문 기술자가 터졌다.
머리와 가슴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져 고문 방을 더럽혔다. 망토를 들어 악마를 보호한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금제 같은 게 걸려 있었나.’
현실의 인간과 다른 점을 드디어 발견했다.
베르덴의 통찰력이 일순간 드러난 내면의 일면을 간파했다. 그놈. 겉으로는 평범한 인간을 가장했지만 속은 완전히 미쳐 있었다.
‘도대체 이곳은 뭐냐.’
잿빛의 용이 말한 다섯 개의 세계가 뇌리를 스쳤다.
베르덴이 살아가는 현세.
어둠의 대악마가 있는 리버레아스.
우주의 경계에 놓인 아크.
저항자의 본거지인 레프라기움 마탑.
마지막으로 운명의 원천이 존재하는 다섯 번째 세계까지.
‘설마 여기가 그 다섯 번째 세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 조용했다.
잿빛의 용이 다섯 번째 세계에 운명의 원천이 있다고 언급한 것만으로도, 베르덴이 죽음을 직감할 수준의 금기의 대가가 날아왔는데 말이다.
‘아니, 아직 단정하기엔 이르다.’
상처에서 더는 피가 떨어지지 않게 로브를 벗어 악마를 감싼 다음 양팔로 안았다. 평범한 인간이 들고 뛰어다녀도 될 만큼 가벼운 체중.
눈꺼풀이 없는 네 개의 눈동자가 바싹 말라 있는 게 가까이서 보였다.
‘아무래도 마력을 감지하는 수단이 이 도시에는 전혀 없어 보이니…….’
베르덴이 입술을 달싹였다.
“샘이여, 흐르라.”
심장의 마력이 반응했다.
전신에 마력회로가 없어도, 마도를 개방할 수 없어도 베르덴은 마법사다.
영창 마법.
최초의 마탑이 군림했던, 마력회로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사용되었던 고대의 마법이 언어를 통해 시전되었다.
본래 영창 마법은 외부 세계의 마력을 이용하나, 베르덴에게는 제약이 없다. 무한의 마도를 경유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에는 세계가 있으니까.
스르륵.
깨끗한 물이 눈꺼풀을 대신하여 악마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피가 섞여 나왔지만, 안구의 통증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흐윽…….”
악마가 살짝 꿈틀거린다.
뭘까.
베르덴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술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보다 진한 감정의 색채가 아른거렸다.
‘이 기분은 대체.’
그렇게 베르덴은 악마를 바라보다가 특별 감옥에서 탈출했다. 도시에서 악마의 실종을 알아차린 건 얼마 뒤의 일이었다.
렌디바르가 폐쇄됐다.
* * *
베르덴은 오래된 커튼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경비들을 주시했다. 달리 흔적을 남기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추적 능력도 형편없었다.
마법 물품도 없어서 그냥 무턱대고 도시 곳곳을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다.
‘우연이라도 발각될 일은 없겠군.’
시선을 높였다.
‘태양의 각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차를 탄 상인이 말했었다.
───어이구, 말도 마시오. 요즘에 ‘악귀’들이 얼마나 많은지 원.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다음부터는 밤이 오지 않는 날에만 움직일 생각이오.
현실의 낮과 밤의 주기와는 다른 듯하다.
밤에는 악마가 출몰하는 모양이고.
참으로 기이한 세계가 아닐 수 없다.
털썩.
아무도 살지 않은 건물의 한 층을 은신처로 삼은 베르덴이 바닥에 앉았다. 로브를 바닥에 깔고 누운 절반의 악마가 신음했다.
상점에서 확보한 빵을 잘게 찢어 영창 마법으로 생성한 물에 적셨다.
‘현실의 악마는 수명이 없으며, 재생력이 뛰어난 이형종. 이 악마도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면 최소한의 양분만으로도 회복하겠지.’
녀석은 치아가 거의 뽑혀 있었기에 흐물흐물해진 빵을 물과 함께 억지로 먹였다. 도중에 사레가 들리지 않도록 섬세하게 수류를 조작했다.
다행히 변화는 곧바로 찾아왔다.
꾸물꾸물.
절단된 손가락과 다리가 나뭇가지가 자라나듯이 서서히 재생한다. 분홍빛 살점이 이내 칠흑의 피부로 덮인다. 이빨이 올라온다. 잘려 나간 네 개의 눈꺼풀도 생겨나 악마의 눈동자를 품는다.
잠시 후, 악마가 눈을 떴다.
“정신이 드나?”
흰자와 검은자의 위치가 바뀐 오른쪽의 역안이 베르덴을 향해 기울었다. 악마의 형태를 한 절반의 얼굴이 흔들렸다.
“어……?”
악마가 힘겹게 아직 재생이 완벽하게 되지 않은 손을 뻗었다.
역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아…… 아…… 정말……? 차, 찾았…….”
베르덴이 그 손을 잡았다.
“……찾았, 다.”
움찔.
베르덴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한순간 눈동자가 시큰거렸다. 고통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물감 같은 것이 번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다른 손으로 제 얼굴을 잠시 어루만진 베르덴이 악마에게 물었다.
“찾았다니, 무슨 의미지?”
“그건─”
악마의 동공이 확장됐다.
“여…….”
여?
“여, 기…….”
악마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여기, 예요!”
사아아아아───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입김이 생길 정도로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 * *
‘날씨가 변했다?’
베르덴이 즉시 창밖을 확인했다.
동쪽에서부터 어둠이 빠른 속도로 몰려와 낮을 물들였다.
렌디바르가 일순간에 밤하늘에 잠겼다.
“어, 어째서 밤이……?”
“귀족님! 귀족님을 불러!!”
“꺄아아아악!”
렌디바르의 거리에서 고함과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까마득한 상공에서부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앙!
콰과과과과과과광!
새까만 바위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구역 일부를 파괴했다. 착탄 지점에서 촉수가 뻗어 나와 인근의 병사들과 시민들을 난도질했다.
거대한 구덩이에서 악마들이 개미의 군집처럼 쏟아져 나왔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아, 악귀가, 아아아아아아아악!”
무너지는 건물.
베르덴이 몰래 지나온 성문도 돌파당하며 다양한 악마가 도시를 급습했다. 밤이 어둠으로 물들자마자 렌디바르가 전쟁터로 변모했다.
무슨 상황인가.
베르덴은 인간 학살장으로 변모한 잔혹한 풍경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와 관계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인류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콰앙, 후두둑!
거대한 악마가 기사를 통째로 붙잡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기사의 상체가 박살 났다. 그에 얻어맞은 시민은 곤죽이 되었다.
악마들이 다음 희생자를 쫓는다.
“허억, 허억, 허억……!”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품에 안은 아버지가 살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부녀가 지면에 엎어졌다.
이에 베르덴이 반사적으로 악마를 막기 위해서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구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절반의 악마의 그림자에서 피골이 상접한 늙은 악마가 솟아올랐다. 강대한 존재감이다.
특별 감옥의 기사들 따위는 손가락으로 압살할 정도로.
“네가 공격을 주도한 악마군.”
[저는…… 운명전에서, 녹시아스 님의 악마들을 지휘했던…… 군단장, 하드라스.]
늙은 악마, 하드라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이곳에…… 진정 실체를 가진 것은 없습니다…… 저희를 제외하면…… 시간이 없으니, 어서 바깥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
[부디…… 믿어 주십시오.]
베르덴이 잠깐 망설인 사이에 부녀는 악마들에게 갈기갈기 찢겼다. 선택, 선택, 선택. 무엇이 옳든 간에 선택을 내려야 한다.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선택권을 가진 자의 권리이자 의무일지니.
‘운명전과 녹시아스를 입에 담았다. 그 태도에 거짓은 없다.’
베르덴이 아직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절반의 악마를 안아 들었다.
“움직이지.”
[……!]
하드라스가 감격에 젖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머리를 숙였다.
[안내…… 하겠습니다.]
눈이 없는 사족 보행의, 괴수 형태의 악마가 창문 앞에 멈춰 섰다. 하드라스를 따라서 베르덴이 그 등에 탑승했다.
[후퇴한다.]
[쿠오오오오오오오.]
괴수 악마가 체중으로 가도를 부수며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악마들이 그것을 따라서 움직인다. 경로에 있던 건물들과 인간이 남아나질 않았다.
베르덴이 말했다.
“추적이 붙었군.”
렌디바르 중앙에서 기사와는 다른 갑옷을 두른 존재들이 거리를 좁혔다.
달려오는 속도가 상당했다.
[이곳에서…… 귀족으로 불리는 자들입니다…… 하나…… 적어도 이곳에서…… 저들이 저희에게 닿는 일은 없습니다.]
하드라스가 단언했다.
[구원자께서 저희를 믿어 주셨기에…… 시간은 충분합니다.]
귀족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괴수 악마가 붕괴된 성문을 다시 돌파했다. 인간들을 몰살하던 악마들도 도시를 나섰다.
그들이 렌디바르와 멀어지자 자연스럽게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낮이 저물고…… 어둠이 도래하여…… 다시 낮이 돌아오면 순환이 이루어지니…….]
태양 빛이 내리쬔 부분부터 렌디바르가 원래대로 복구된다. 베르덴은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운명은 반복되리라.]
악마들이 습격하기 이전으로 렌디바르가 완전히 복원되었다. 추적이 오지도 않았다. 성문의 경비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시로 들어오려는 이들을 검문했다.
맹렬하게 쫓아오던 귀족들의 기척도 감각에서 사라졌다.
마치 시간이 되감긴 것처럼 말이다.
“이 세계는…… 뭐지?”
[이곳은 세계가 아닙니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있는, ‘세계의 틈새’…… 또한 허락되지 않은 영혼들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이자…… 운명의 철책입니다.]
역시 다섯 번째 세계는 아닌 건가.
‘그러나, 연관은 있을 터.’
영혼의 통로라는 대목이 특히 신경 쓰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자벨라는 형안을 통해 영혼과 관련된 금기를 접했으며, 첫 번째 하인은 영혼의 금기를 직접 발설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원자의 혼란과 의문을…… 이해합니다…… 하나 서둘러 답을 드리기보단…… 지금은 이 영역에서…… 벗어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베르덴이 나름대로 이유를 짐작했다.
“그 폐하라는 존재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당신’의 명을 받아 이곳 세계의 틈새를 관리하는…… 운명을 받드는 자…… 최악의 배신자…….]
하드라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인간계 최초의 왕…… 그자가 왕국으로 돌아올 주기(週期)가 되었으니…… 지금쯤 이변을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 *
세계수의 금기 집행으로 세계의 틈새에 머물러 있는 그가 크게 움찔거렸다.
느껴졌다.
틈새를 지키는 그의 왕국이자 ‘운명의 봉쇄선’에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감이.
“운명 파괴자.”
목에 걸린 정십자가가 크게 흔들렸다.
어찌 그곳에.
그 몰래 세계의 틈새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밖에 없다. 제한적인 운명의 반복으로 유지되는 그곳에도 결국 시간은 있다.
“히안테……!”
가르간트의 광신자 노인이 거검을 쥐고 왕국으로 향했다. 커다란 보폭이 절벽과 절벽을 건너뛰듯이, 느릿하게 공간을 접었다.
렌디바르까지, 약 44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