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5화 신격 – 4
렌디바르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멀리 후퇴하는 밤하늘을 머리에 인 채 몇 겹이나 되는 숲을 통과했다. 그러자 리버레아스처럼 빛 한 점 없는 깊은 숲이 펼쳐졌다.
괴수형 악마가 속도를 늦춰 이제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배신자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 안전합니다……. 그 아이의 몸도 거의 재생했으니 걸을 수 있습니다.]
“앗.”
“그런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베르덴의 품에 안겨 있던 절반의 악마가 예를 갖추곤 헐레벌떡 괴수에서 내려가, 주변의 악마 대열에 합류했다.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하드라스의 눈길에 녀석은 침묵했다.
[구원자께서 렌디바르에 계신 걸 확인했으나…… 설마 귀족들에게 붙잡힌 저 아이를 구해 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악마에게 빚이 있다. 정확히는 녹시아스에게.”
악마의 계약자이자 블랙 아워 최초의 구성원인 케이먼 베르몬트의 조력으로 대악마의 피난처에 갈 수 있었고.
거길 통과해 블랙 아워 대전당에 무사히 잠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리버레아스라는 특수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존재는, 수백 년 전에 리버레아스를 창조한 녹시아스였다.
[……! 녹시아스 님을 뵌 적이…… 있으십니까? 녹시아스 님은…… 무사하십니까……?]
하드라스는 이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듯 격한 반응을 보였다. 대악마의 군단장이었다면 최측근일 텐데도.
말인즉슨 녹시아스와 최근까지 왕래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무사하다. 최근 리버레아스에서 그 수하를 통해 간접적으로 마주한 적 있으니까. ”
[리버레아스……?]
“대악마의 피난처에 대해 모르는 걸 보니 세계의 틈새에 계속 갇혀 있었던 모양이군.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거지?”
하드라스가 턱을 짚었다.
[운명전에서 저항 세력이 패배한 이후…… 줄곧 이곳에 있었습니다.]
운명전 때부터?
고작 수백, 수천 년 전이 아니다.
[절반은 어쩔 수 없이…… 절반은 자진해서…… 세계의 틈새로 넘어왔습니다…… 이곳의 악마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드라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렌디바르의 인간과 같은 존재가 억압자라면…… 악마는 피억압자…… 그들은 악마를 세계의 틈새에서 현실로 최대한 나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종의 경비입니다……. 영혼이 한 점으로 고정되어서 죽어도 반복되어 삶을 얻는…… 주어진 역할만 수행하는…… 인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고 한 건가.”
[자유와 의지가 없는…… 그들은, 세계의 틈새에 동화된…… 배경입니다.]
베르덴이 입술을 매만졌다.
“세계의 틈새란 허락되지 않은 영혼들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라고 했었지.”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악마는 영혼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이 되는데. 역시 자세한 정보는 금기로 제한되어 있나?”
금기를 하도 접해서 그런지 어디에 선이 그어져 있는지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베르덴은 금기의 경계 바로 앞에 있었다.
[악마는…… 이르자면 운명의 부산물입니다…….]
“부산물?”
[‘당신’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창조하면서 우연히, 그리고 반발력으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악마는 본질적으로 운명을…… 거부합니다……. 이처럼 운명의 탄생 원리와 얽혀 있기에…… 악마의 원리도 발설하지 못합니다.]
운명에 관한 비밀은 금기투성이.
악마의 비밀은 자연히 그에 종속되고 말았다.
[정보의 금기를 함부로 침범하면…… 감당할 수 없는 대가가 따르기에…… 선을 명확히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구원자께서는…… 금기에 대해 해박하신 듯합니다…….]
“많이 접했을 뿐이다. 결국 진실에 닿은 적은 한 번도 없지. 그보다 너에겐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하문하십시오…….]
문답의 시간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인간계 최초의 왕이 마족을 몰살한 그놈인가?”
아세트로 올딘이 보여 준 고대 석판에는 인간계 최초의 왕이 배신했으니 부디 처단해 달라는 내용이 불완전하게 암시되어 있었고.
그 고대 석판의 주인인, 침묵의 사막에서 발견한 최초의 마족이자 용인의 유골 옆에도 운명에 굴복한 인간계 최초의 왕에게 복수해 달라는 유언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인간계 최초의 왕.
몰가른의 벽화에서는 하늘을 향해 스스로 무릎 꿇고 왕관을 바치는 초라한 왕.
베르덴은 그놈을 이슈르와 옛 왕과 같은 운명의 사도라고 추측했다.
[그렇습니다……. 저항 세력의 주축이었던 인간계 최초의 왕은…… ‘당신’에게 회유당해 마족과 마족의 왕을 살해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국민과 왕국을 넘겼습니다……. 렌디바르…… 그곳은 운명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 그 배신자가 직접 다스리던 인류의 수도였습니다…….]
시민의 모습과 도시의 양식이 현대에 비해 너무 뒤떨어진다고 했더니, 과거 대분기와 운명전의 사이 시대가 그 배경이었나.
베르덴은 태고의 시대에 가까운 역사의 현장을 직접 거닌 셈이었다.
[현재 배신자는 운명의 사도라 불리는 ‘당신’의 검…… ‘두 번째 사도’입니다.]
* * *
섬의 미궁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사도를 마주했다. 옛 왕은 몇 번째 사도인지는 모르지만, 그 숫자는 당연히 2번 아래일 터.
하드라스는 운명전 이후에 탄생한 사도는 당연히 알지 못했으며, 명확히 알고 있는 것도 두 번째 사도가 전부라고 했다.
한데 첫 번째 사도만큼은 금기로 둘러싸여 있어 정보에 제약이 걸려 있다고.
사도의 힘을 명확히 알지 못하니 비교할 수 없다.
일단 이슈르는 맨 아래겠지만.
순서가 강함을 뜻하지 않을지언정 어쨌든 두 번째 사도인 이상, 그 경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잠깐.’
베르덴이 정체불명의 강자를 한 명 떠올렸다.
‘혹시 그 광신자가 인간계 최초의 왕인가?’
이그나시아의 도움을 받아 가르간트의 허상에서 마주하고,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찰나의 교전을 치른 광신자 노인.
───당신은 인간인가?
───인간.
낮은 웃음소리기 기억 속에서 번졌다.
───인간이고말고. 누구보다 인간이다. 오직 인간만이 빛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지니. 내가 곧 인간이노라.
인간.
인간계.
제왕의 품격.
얼추 맞아떨어진다.
다른 건 몰라도 그 강함은 진짜였다.
그놈의 무기가 제대로 된 검이었다면, 세계수가 모종의 금기 침범을 확인했다는 이유로 전투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면…….
마도의 개념을 단 하나도 깨닫지 못했던 그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사도에 어울리는 경지.
‘중요한 정보다.’
베르덴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광신자 노인의 정체보다도 알고 싶은 게 더 남았다.
그때였다.
[구원자시여…… 저도 구원자께 개인적으로 답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내게? 물론이다.”
[구원자께서는 어떻게…… 이 세계의 틈새로 흘러 들어오신 겁니까? 무엇을 위해서…… 거짓된 땅으로 오게 되신 겁니까?]
하드라스는 이곳에 온 목적을 묻는다.
“나는…….”
밝힐 수도 있고.
숨길 수도 있다.
하드라스만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오는 모든 악마가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진다. 악마의 눈빛에서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온다.
희망.
악마들은 베르덴에게 무언가를 갈망했고, 또 기대했다.
“나의 신앙을 찾고 있다.”
[신앙.]
“조언을 듣고, 신격을 얻기 위해서 내면과 하나가 돼 나와 연결된 모든 걸 지각하려고 했더니. 어느샌가 이 차림으로 이곳에 와 있더군.”
베르덴은 진실로 대답했다.
“그게 전부다.”
[…….]
“이번에는 내가 묻겠다.”
베르덴이 함께 괴수 악마에 올라탄 하드라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왜 악마는 나를 보면 눈물을 흘리는 건가.”
[…….]
“왜 나를 구원자라고 부르는 거냐.”
하드라스의 비쩍 마른 피부 위로 새까만 눈물이 흘러내린다. 괴수 악마가 멈췄다. 어둠 한가운데에서 하드라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모든 악마는…… 운명 창조에 대한 반발력으로 생겨나…… ‘당신’의 적으로서…… 저항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올다르크 또한…… 우리를, 우리로 봐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신’에 의해 태어난 존재이기에.]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악마들이 하나둘씩 눈을 드러냈다. 괴수 악마가 몸을 크게 낮췄다. 하드라스가 땅으로 내려오고, 악마들이 만들어 낸 촉수가 계단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입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하지만…… 녹시아스 님께서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운명전에서 패배한 그날에도.]
“…….”
[언젠가…… 우리들이 기댈 곳이 생길 거라고…… 훗날…… 우리들을 위하는 존재가 나타날 거라고…… 우리를, 이해해 주는 분이 찾아올 거라고…… 희망을 남겨 주셨습니다.]
“…….”
[운명의 수레바퀴가 무너지는 충격은…… 세계의 틈새에서도 느꼈습니다.]
하드라스가 천천히 팔을 들었다.
[운명을 파괴한…… 구원자께…… 저희는 희망을 느낍니다…… 단순히 이 운명을 무너뜨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비틀려 버린 저희를 진정 이해할 수 있는 희망을…… 느꼈기에.]
[키이이…….]
[신앙을 찾고 계신다…… 하셨습니까.]
하드라스가 상체를 숙이면서 간절히 오른손을 뻗었다.
[구원자시여…… 부디 존함을…….]
아직 베르덴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베르덴은 수많은 악마의 시선을 받으며 악마가 만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앞에 두고, 하드라스의 손을 잡았다.
“베르덴.”
그제야 세계의 틈새에 머무르는 악마들이 그를 명확히 인식했다.
구원자로 추측되는 존재가 아니라, 베르덴으로, 또한 갈 곳이 없어 맴돌기만 하는 악마들의 믿음이 모이는 대상으로.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방대한 신앙이 길을 찾는다.
그 믿음으로부터 마음이 전해진다.
……툭.
‘이건…….’
베르덴은 오른쪽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에 얼굴을 손끝으로 훔쳤다. 악마들을 마주한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이다.
신앙자는 부족한 마음을 보완하기 위해 신앙을 품는다.
신은 그런 신앙자의 간절함에 공감한다.
연민(憐憫).
진정한 신이란 자신이 보살피는 신앙자를 가엾게 여기는 존재다. 악마들의 비애를 이해한 베르덴은 비로소 동정심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푸른빛이 명멸한다.
베르덴의 눈물에서부터 신성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39보.
* * *
아노니움 은행 본점.
이자벨라와의 통신을 냉큼 끊었다.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아드리안이 황금 비고로 돌아와 숙고했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세력들을 단 하나의 연합체로 규합한다. 아드리안의 힘으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국제 분열이 가속화되는 결과만 눈에 선했다.
‘큰일 났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기꺼이 짊어질 각오가 되었지만, 이는 아드리안이 상정했던 각오를 벗어난 사안이었다.
만약 대륙이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옛 왕이 다시 돌아오고, 엉망이 돼 버린 세계를 주군께서 보신다면 어떻게 될까.
───아드리안, 네게는 실망했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드리안은 초월자들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주군의 기대를 그렇게 저버릴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얼굴이 바짝 굳었는데? 석상인 줄.”
유니아가 온갖 매직 아이템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하룬이 껄껄 웃었다.
“베르덴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 어디 쉬울 줄 알았더냐. 세상일에 관심은 없다만, 네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지 궁금하긴 하군.”
“대화론 안 될 것 같고. 검으로 해결할 거야? 말 안 듣는 초월자들을 혼자서 다 굴복시키게?”
[그건 옛 왕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모두가 아드리안의 개인 능력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이쪽으로 특화되지 않은 초월자니까.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검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황금 비고의 영롱함에 매료된 아노니움 은행장도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
아드리안은 주변의 소음에 반응할 여유도 없이 사고에 집중했다. 주군처럼 생각했다. 이럴 때 주군은 무엇부터 했을지 따져 보았다.
지능을 따라가려 하지 않고 주군의 행동 방침에 근거하여 활로를 모색했다.
‘국제 연합은 내 역량을 벗어났다. 또한 한꺼번에 해결하기엔 규모가 너무 크고.’
세력 기반도 없었던 주군께서는 보헤미른 마탑에 어떻게 복수하였는가. 아드리안은 그 길을 중간부터 함께 걸었기에 자세히 알고 있다.
‘그래, 일단 내딛는 것부터 시작하자.’
아드리안이 판단이 섰다는 듯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