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956

956화 적란운 (1)

“그하룬, 너는 황금 비고에 있는 모든 아티팩트를 감정해라. 쓸 만한 매직 아이템이 있다면 따로 분류해 놓고.”
“사실상 전부 둘러보라는 뜻이구만.”

그하룬이 뒤를 돌아봤다.
황금 비고를 적당히 밀도 있게 채운 내용물이 눈 안에 가득 찼다.

“이걸 나 혼자 하라는 거냐?”
“내가 왜 너를 데려왔을까. 드래곤의 심장하고, 그 뭔지 모를 돌멩이를 요새에 갖고 가고 싶다면 너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해라.”
“이 새끼가 협박을?”
“유니아가 <감정> 마법을 제대로 시전할 줄 아니 도움이 될 거다.”
“엥?”

유니아가 흠칫했다.

“나만 도와? 에온은?”
“<감정>이 가능한 위상들은 대부분 해야 할 일이 있고, 당장 에온의 마법사들이 다수 움직이면 외부의 눈길을 사게 된다. 조용히 황금 비고의 물건들을 전부 바깥으로 옮기려면 먼저 별도의 루트를 마련해야 할 터.”

그 길을 만드는 역할은 따로 있다.

“할 수 있나? 아노니움 은행장.”
“아무래도 양이 양인지라, 발각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됐다. 속히 진행하도록. 길이 완성될 때까지 그하룬과 함께 작업해라, 유니아.”
“……확인.”

아드리안이 눈길을 돌렸다.

“넌 황금 비고의 재산을 계산해 어떤 식으로 쓸지 계획해라. 연합군의 전력이 최종적으로 어떨지는 몰라도, 일단 생각이라도 해 두는 편이 훗날 편해질 테니. 로베르트와 재무 부문의 인력을 최대한 우선해서 보내마.”

[후호호호홋, 세계 연합군에 가담한 적 있는 제가 이에 적임이지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있는 분들은 어떻게 할까요? 베르덴 님이 약속했던 대로 황금의 두개골을 찾은 대가를 쥐여 주고, 외부로 보낼까요? 물론 한동안 감시를 붙여야 하겠지만요.]

마그누스가 자유롭게 황금 비고를 관람하고 있는 모험가들을 가리켰다. 안 그래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갈리아크가 크게 소리쳤다.

“어이!!! 날로 처먹을 생각 없으니까! 잡일이든 뭐든 아무거나 시키든가! 대신 그 연합군이란 거에 우리도 끼워 주면 좋겠는데!”

고드와 네리엔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뭣─”
“지랄하기 전에 좀 들어 봐.”

갈리아크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놈의 전쟁인지 뭔지 터지면 계속 느긋하게 모험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냐? 이리저리 치이다가 뭣도 못 해 보고 뒈질 수도 있어. 그럴 바에 지휘부에 가까이 있는 편이 생존 가능성이 더 높지. 안 그러냐? 엉?”
“어, 그, 그런가?”
“일 리가…… 없지는 않지만…….”

고드가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얼마나 큰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이 보물고에 있는 무구들을 생각하면 국가 대 국가 전쟁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옛 왕이라고 했던가?

아노니움 은행으로 오면서 세간에서 얻지 못하는 정보를 어쩌다 듣자 하니, 그자는 다수의 초월자로도 죽이지 못한 괴물인 듯하다.
심지어 루아스 교국에서 수백 년 동안 봉인해 왔던 초월자라…… 응?

“그럼…… 2, 2차, 2차 초월자 전쟁이?’

고드는 마법사답게 역사에 대한 지식도 해박한 편이다.
세계의 대참사 중 하나인 초월자 전쟁.
대륙 절반을 거의 불태우고 나서야 끝난 분란이 현대에 재현된다면 진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휩쓸려 죽을 수도 있다.

고드가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며 덜덜 떨었다.

“차, 차라리, 마, 맞불이 몰려오는 쪽에 서 있는 게, 나, 나을 수도…….”
“고드? 진심이야?”
“시발, 그렇다니까.”

갈리아크는 자기 파티원 두 명의 의사를 얼굴로 확인했다.
반대는 없었다.

“우리 장비도 여기서 새로 맞춰도 되겠지!!! 유물 찾은 보수로다가!!”

마그누스가 어깨뼈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는 대로 해 줘라.”

[후호홋, 저분들도 열정이 넘치시니 제가 열심히 굴려 보도록 하죠.]

그렇게 갈리아크, 고드, 네리엔은 신(新) 대륙 연합군(예정)에 소속될 첫 번째 미스릴 등급 모험가 파티가 되었다.
마그누스의 일꾼을 겸해서 말이다.

문득 유니아가 묻는다.

“근데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 그쪽은 뭐 할 건데?”
“나가서 동맹을 구해야지.”
“타 세력과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그런 건 위상한테 맡기는 거 아니었어? 우리 소사이어티의 현자님들이라거나.”
“생각이 있다.”

아드리안은 나름대로 확신이 있다는 듯 광검의 손잡이에 팔을 걸쳤다. 그러고는 그하룬에게 하나 더 부탁했다.

“여기서 회유책으로 쓸 만한 무기 좀 골라 줬으면 좋겠는데.”
“쓸 만할지, 쓸데없을지는 누가 주인이 되느냐에 달렸지. 상대가 누구냐.”

아드리안이 최근에 함께 싸웠던 강자 중 한 명을 떠올렸다.

“초월자.”

* * *

큰길 교차로에서 여관 겸 주점을 운영하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곤 한다.

손님들이 정신 못 차리도록 술에 취하거나, 그런 취객의 호주머니를 다른 손님이 낄낄 웃으며 터는 건 흔하디흔한 일상이다.
바깥에 단단히 매어 둔 말을 훔쳐 가는 도둑들도 없지는 않았다.

여관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매춘부의 교성은 귀에 딱지가 붙을 지경이다.

손님끼리 대충 언쟁을 벌이다 주먹질과 칼질이 오가는 상황도 허다하다. 시체 처리는 도시 바깥 여관 주인의 덕목.
싸우는 놈들이 전부 죽어 버리면 손님들이 알아서 도우며 장비를 탈탈 털어 간다. 그 일부는 여관 주인의 주머니에도 들어간다.

일종의 여관 주인과 손님 간의 예의이자 관례인 것이다.

별개로 모험가들이 아인종과 이형종을 몰고 와서 여관을 무슨 최후의 요새로 삼은 일도 있었고, 방에서 시체가 발견된 사건도 있었다.
관례고 뭐고 여관을 강도질하는 새끼도 이따금 나타나곤 했다.

이렇듯 성벽이 없는 장소에서 여관을 운영하다 보면 온갖 인간 군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상에 익숙해진다.
얼굴만 봐도 이놈은 위험하다, 이 새끼는 사고 칠 것 같다, 라는 위기감이 느껴진달까.

그런데…….

오늘 주점 정중앙을 차지한 세 사람은 그동안의 손님과는 뭔가 달랐다. 여관 주인은 다른 손님들처럼 몰래 귓불을 씰룩였다.
다만 누구도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아주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체 저건 어디 말이야?’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는 거체의 사내와 푸른빛이 도는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이 대륙 공용어가 아닌 생소한 언어를 구사한다.
오직 그들과 함께 앉은 여인만이 말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대충 끄덕일 뿐이었다.

여인이 손등으로 턱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고대어밖에 모르는 늙은이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될 줄이야. 희극이 따로 없네.”
“라무아하르?”
“욕한 거 아니거든. 주문하고 올게.”

붉은빛이 희미하게 섞인 백발이 걸음을 따라서 찰랑거린다. 손님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여인이 카운터에 양 팔꿈치를 얹었다.

“꽤 오래 굶었는데.”
“어, 엇…….”
“자신 있는 음식이 뭐지?”

여관 주인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매혹적이다.
눈동자에 익사할 것만 같다.

평범한 드레스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굴곡과 태어나 처음 보는 압도적인 미모. 어지럽다. 현실이 꿈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고, 고기하고, 벌꿀, 벌꿀주인, 데, 데, 그, 그, 금방 가져다, 가져, 드리겠, 습, 습니다.”
“얘도 말을 잘 못하는 건 매한가지네. 뭐, 알아서 정성을 다해 보도록.”

여인───히스릴 델 로하룬은 가볍게 손짓하곤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만 아니라 매춘부들의 눈길도 여전히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욕정과 질투가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듯한 뜨겁고 사나운 눈빛이었다.

고대어가 귓가를 스쳤다.

“하층민들의 저열하고 더러운 습성은 수백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군.”

라이칸 투르가르드가 큼지막한 물통을 우아하게 전부 비웠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지만, 대제에게 걸맞은 품격이었다.

“나라면 전부 목을 뽑아 버렸을 텐데. 제법 비위가 좋구나.”

히스릴도 고대어로 답했다.

“아랫것들의 욕망에 하나하나 반응하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지? 그냥 즐겨. 즐기다 질리면 버리고. 겉과 속이 다른 놈들보다는 낫잖아?”
“나태한 제왕학(帝王學)이다. 빈민들의 뼛속까지 제왕의 위엄과 공포를 깊게 새겨 넣어 주는 게 당연한 의무일진대.”
“피곤하네. 당신의 제왕학은.”

대제와 여제.

시대 간의 차이는 있어도 둘 다 자신만의 제국을 다스린 초월자들인 터라 성격은 맞지 않아도 사담을 나눌 만한 주제는 많았다.
덕분에 이 여관까지 오는 길이 그리 조용하지는 않았다.

그때, 라이칸과 히스릴이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래서 이곳은 어느 대륙이냐.”
“그래서 여긴 어떤 나라지?”
“본인들이 제 발로 뛸 생각조차 없이 정보만 대뜸 묻다니. 뻔뻔하구먼. 자네들이 제왕, 제왕거리는 동안 대략적인 정보는 얻었네.”

반토레온이 손끝에 전열(電熱)을 피워 테이블에 대륙 전도를 그렸다. 근처 촌에서 봤던 조잡한 지도를 재현한 것이다.

어떻게 협조받아 지도를 볼 수 있었는가?

현대인과 직접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런 건 딱히 큰 문제가 아니었다.
초월자의 의념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기에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정확한 뜻을 전달할 수 있다. 거기다가 몸짓과 손짓까지 더하면 의사소통은 대충 이루어진다.

그가 대륙 전도의 동남쪽을 짚었다.

“이곳은 동대륙 최남부라고 하더군. 현대의 문자로는 이렇게 쓴다고 하던데. 이걸 뭐라고 하지?”
“로니아 왕국.”
“평범한 국명이로군. 네 시대에 있던 국가인가?”
“300년 전에는 없었어. 사실상 대부분의 나라가 그럴 테지만. 옛날에 동대륙 남부는 수인 부족이 거의 지배했었는데. 로니아 왕국이 통일했나?”
“그건 아닐 걸세. 이런 나라가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반토레온이 외워 온 문자를 고스란히 지도 위에 썼다.

“하부 수인 부족.”

3세기 전의 수왕을 살해했던 히스릴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휘어졌다.
미소에 순수한 희열과 광기가 번졌다.

딱!

반토레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우리의 목적은 크세리온의 군세를 불러들이는 사문 개방의 약조를 지키는 것. 하지만 동대륙에 있는 사문을 여는 건 여의치 않네. 아무래도 거리가 거리니까.”
“도보로 동대륙 종단은 여러모로 귀찮지. 너야 마도가 있으니 편하겠지만.”
“마도를 개방해 종횡무진하고 싶은 마음이야 아주 굴뚝같지. 다만 그래서야 부활의 대가를 치르기 전에 소란만 커질 걸세.”

주름졌으나 탄탄한 손이 푸른빛이 섞인 수염을 어루만졌다.

“내 전력의 반의반이라도 냈다간 온갖 마법사가 알아차릴 테니.”

반토레온의 마도는 아주 격렬한 특성을 띠고 있어 여파의 제어가 불가능하다.
드라벤 르마르크가 아니무스와 초위 마법으로 그의 영혼을 통해 발현했던 마도는 온전하지 못한 모조품에 불과했다.

“사문을 열긴커녕 찾지도 못했는데 초월자들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네. 가능하면 베르덴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일세.”
“만전의 상태로 마주하고 싶다는 건가. 전투에 미친 자가 자제라니. 그 시대의 너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뭐, 초월자가 추구하는 이상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히스릴이 낮게 웃었다.

“기왕 다시 얻은 삶이잖아. 이번에도 원 없이 이상을 향해 날뛰어 보자고.”
“초월자로서 약속부터 지킨 이후에.”
“그거야 당연하지.”

여관 주인이 직접 음식을 갖고 왔다.

히스릴의 외모에 정신이 팔려서 반테레온이 그린 지도를 못 보고,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와 달콤쌉싸름한 벌꿀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흠,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저…….”
“왜 그러지?”
“저, 돈부터…….”
“돈?”

히스릴이 다리를 꼬았다.

“우린 돈 없는데?”
“예. 예? 돈이 없으면, 곤란…….”

여관 주인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향했다.

“꿀꺽.”

음식을 반드시 현금으로 결제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주인 마음이다. 돈을 대신할 만한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나 아름다운 여자는 아무것도 없어도 부자나 다름없다.

손님들이 침을 삼킨다.
용병 무리가 슬쩍 몸을 일으킨다.

“돈이 없다면…… 내줄 수 있는데.”
“그 대신…….”
“시발, 시발…… 저, 저런 여자는 침대에서 어떻게 울어 댈까.”
“다 죽이고, 저 여자만 데려오는 건 어때.”

저급한 욕망이 넘실거린다.

라이칸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절도 있게 나이프와 포크를 쥐었다. 그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고기를 자르며 말했다.

“우리가 격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지만 희미한 존재감은 남아 있는데, 감히 이빨을 들이밀다니. 그게 네가 가진 격인가.”
“타고난 매력(魅力)이랄까.”

히스릴은 존재 자체만으로 타인의 속내를 밖으로 끄집어낸다. 저항하지 못하는 존재는 겉과 속이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만드는 힘, 이야말로 히스릴의 고유한 격이었다.

“나는 내숭을 떠는 자들은 좋아하지 않아.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욕심을 부리는 걸 선호하지. 가식적인 건 구역질이 나거든.”

히스릴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을 부드럽고 길게 쓸어내렸다. 드레스 너머로 살짝 눌린 피부가 주변에 있는 인간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스르릉.

반토레온과 라이칸을 죽이기 위해 용병들이 검을 뽑기 시작했다. 히스릴을 독차지하겠다는 일념만이 전부였다.

“다만, 분수를 모르는 걸 가장 혐오하고.”

가장 가까이 있던 용병의 팔이 잘리며 히스릴의 손에 철검이 쥐어졌다. 손목에서 피 분수가 터지기 전 그녀가 속삭였다.

“비천한 것들.”

히스릴의 검을 휘두르자 여관 내부에서 돌풍이 몰아쳤다. 바람에 뒤섞인 미세한 검기들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용병대장과 용병들의 목이 절단됐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흥분하고 있던 모험가들의 얼굴이 갈라졌다.
히스릴과 같은 미인이 자신들처럼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을 기대하던 매춘부들은 눈부터 뒤통수까지 잘려 나가 시체가 되었다.
부스러기를 주워 먹듯이 범해진 히스릴을 탐할 수 있을까 싶었던 종업원들과 손님들은 상반신이 심장과 함께 토막 났다.

수왕 살해자.
이종족 전쟁의 원인.
피의 여제.

“태어난 대로 그릇에 맞게 살면 될 텐데. 왜 자꾸 흘러넘치거나 억지로 그릇을 바꾸려는 걸까. 역겹기 짝이 없게.”

칼끝이 휘었다.

“안 그래?”

여관 주인의 복부가 관통됐다. 검은 그대로 꽂혀 있지 않고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복압이 약해진 탓에 장기들이 푸부북! 튀어나왔다.

“허, 허……! 어윽…….”

등 뒤의 테이블을 밀며 쓰러진 여관 주인이 배를 만졌지만 주워 담기엔 이미 늦었다. 빠르게 죽어 가는 그의 모습을 안주로 삼아 히스릴이 벌꿀주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구와 이동 수단. 어디로 가야 할진 알겠네.”
“듣고 있네.”
“로니아 왕국 수도로 가자.”

라이칸이 한 입만 먹고 포기한 고기를, 히스릴이 손으로 잡아 뜯어먹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왕인데 뭐라도 갖고 있지 않겠어?”

* * *

서대륙의 농민들이 평소 다니던 숲길에 난 틈을 알아챈 것은 어느 날이었다.

“이게 대체 뭐인가?”
“구멍…… 같은데?”
“공중에 구멍이 났다고?”

사내들의 눈높이쯤 되는 허공에 어둑한 균열이 자리 잡았다.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어 농기구를 가져와 툭툭 건드렸다.

균열이 짧게 진동했다.

콱.

어둠 속에서 회색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쟁기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끌려간 농민의 머리가 균열 안에 처박혔다.

“도릴?! 괜찮은가?!”
“으윽, 갑자기 뭔…….”

농민이 앞을 바라봤다.

“어?”

죽은 자들의 수많은 팔과 머리가 농민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콰자자자작. 더 나아가 바깥에 있던 사내들까지 덮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려 나간 그들의 피가 지면을 적셨다.

고요해진 바깥.

균열은 공간을 넘나들듯이 깜빡거리며 서서히 이동했다.

옛 왕의 봉인이 해제되며 깨어난 존재는 고대의 초월자들만이 아니다. 아홉 개의 사문을 개방할 자는 그 셋만이 아니다.

본디 크세리온 제국의 주력은 인간종이 아니라 이형종이다.

언데드 계열의 특수 개체.

옛 왕의 ‘사령관’ 중 하나가 서대륙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앙 대륙에서도 옛 왕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조용히 준동했다.

* * *

“그럼…….”

에온의 연구 부문 총책임자인 올노르드가 짧게 헛기침하고, 위상들과 마탑주들이 모인 은밀한 회의를 중간 정리했다.

“‘결투’의 발단으로 삼을 마울러의 권역은 로니아 왕국으로 결정됐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침투 및 집행 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회의 구성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노르드는 다음 시선을 돌려 회의의 주재자에게 최종 동의를 구했다.
베타가 외눈을 빛냈다.

[확인했습니다. 진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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