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화 적란운 (5)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갈 예정이었지만, 벤디에는 먼저 본론부터 듣기를 원했다. 그녀는 언제나 중심을 우선한다.
“섭리자가 개입해서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옛 왕은 그렇게나 간단히 퇴장할 존재가 아니었다.”
“봉인이 깨진 직후, 그리고 베르덴에게 당한 상처. 어느 모로 봐도 힘을 전부 회복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옛 왕의 힘은 남달랐죠. 루아스교가 왜 그리 경계를 해 왔는지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벤디에가 개인적인 평가를 덧붙였다
“서로가 전력이라는 가정하에, 옛 왕은 단신으로 처단할 만한 자가 아닙니다.”
벤디에는 주검의 영광의 하인과 고대 초월자들의 영혼을 이용한 첫 번째 하인, 드라벤 르마르크를 홀로 압도했다.
노화를 대가로 계속해서 부활하는 네 번째 하인, 케실루스의 마도가 아니었다면 초월기의 대결에서 드라벤의 명줄을 끊었을 것이다.
마법계에 섭리자가 있다면.
무투계에 마스터가 있다.
그런 그녀가 타고난 초월자인 옛 왕을 격상의 강자라고 인정했다.
‘스승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다니.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에네트는 문득 마주친 것만으로도 자신의 신념을 꺾어 버린 가르간트의 광신자와 옛 왕, 둘 중 누가 더 괴물일지 내심 궁금했다.
아드리안이 말했다.
“그래, 섭리자가 어떤 비장의 수단을 갖고 있든, 하물며 그 짧은 시간에 혼자 옛 왕을 죽였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다만, 봉인은 가능하겠죠.”
“실제로 섬이 있던 히아레마르 내해의 바닥에서 옛 왕이 봉인된 흔적을 확인했다.”
“그건 몰랐네요.”
템플은 초월자 세력이긴 하지만 사실상 벤디에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집단. 자금력도, 기술력도 에온에 한참 못 미친다.
정보력도 마찬가지다.
템플의 구성원은 전문적인 인력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신념을 토대로 끊임없이 수양하는 고행자(苦行者)에 훨씬 가까웠다.
“이제 관건은 옛 왕을 막아선 섭리자의 봉인이 언제 풀릴지다. 섭리자가 말하지 않는 한 남은 시간도 알 수 없는 실정이니, 최대한 서둘러 옛 왕의 재림에 대비하는 편이 올바른 선택일 터.”
“그 대비가 대륙 연합이군요.”
“대륙 연합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초월자 연합에 가깝다. 연합의 머리는 초월자가 될 테니까.”
“초월자 간의 연대라…….”
벤디에가 들고 있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드라벤 르마르크가 성소를 급습했을 때 시민들 사이에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조종당한 것도 아닌, 과거에 어떤 이상한 점도 없는 평범한 이들이 교국을 배신했죠. 이미 주검의 영광을 조력한 미지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
“루아스 교국조차 그들을 진즉 파악하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당연히 대륙 연합에도 잠입할 가능성이 높아요. 솎아 내지 못하면 연합은 힘을 발휘하기 직전 분열되고 말겠죠.”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함부로 남에게 등을 맡겼다가는 급소에 칼이 들어올 수도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 연합체를 구축할 자신이 있나요?”
“그래서 초월자들을 주축으로 삼겠다는 거다.”
“초월자라면 믿을 수 있다는 뜻?”
“초월자는 그런 족속이니까.”
아드리안은 초월자가 대륙 연합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벤디에는 그런 믿음에 어떤 근거가 있다고 직감했다.
다만 아드리안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공색(空色)의 눈빛만 보였다.
“베르덴이 허가한 사안인가요?”
“주군의 뜻은 내가 대행한다.”
“대륙 연합은 당신의 판단…… 베르덴이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보니 그때 심하게 무리했나 보군요. 하기야 그만한 규모의 섬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워 버리기까지 했으니.”
벤디에는 미지의 섬에서 보았던 검붉은 빛을 잊지 않았다.
“저 또한 몸에 스며든 베르덴의 힘을 몰아내는 게 고역이었죠. 다른 초월자도 그럴 테고요. 그에 비해서 당신은 부상의 정도완 별개로 후유증이 적어 보이는 듯하군요.”
“주군과 자주 겨루며 나름대로 충격을 최소화할 방법을 체득했다. 물론 그 파괴력은 적응할 만한 것이 아니기에 직격당하면 소용없지만.”
벤디에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베르덴과 대련을 하나요?”
“당연한 것 아닌가.”
실력과 경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둘 다 초월의 영역에 들어섰다.
베르덴과 아드리안은 고유의 기술을 감추지 않고 아낌없이 시험해 볼 수 있는, 서로에서 있어서 최고의 대련 상대였다.
‘높은 향상심.’
벤디에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에온에서 잘 지내고 있나 보군요, 에네트.”
조용히 차만 홀짝이고 있던 에네트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스승…….”
“스승이 아닙니다. 당신은 파문당했고, 템플에 돌아온 것도 제자로서가 아니니까요.”
에네트가 곧장 어투를 가다듬었다.
“실례했습니다, 마스터.”
“그래도 무너진 신념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난 점, 전 스승으로서 대견합니다. 그간 여러 좋은 경험을 한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마스터. 운이 좋아…… 다행히 여러 인연이 닿았습니다.”
벤디에는 파문당한 에네트가 보헤미른 마탑의 비공식 실험체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에네트도 말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에네트는 슬쩍 아드리안을 보았고, 아드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차를 머금었다.
‘둘의 관계는 아마도 일방적.’
에네트가 사내한테 저런 사적인 마음을 품다니, 벤디에는 내심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절대 비웃음은 아니었다.
에네트의 심정이 어떠한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기에.
‘천검, 아드리안 첸버스. 지금의 그는 망나니라는 평판이 어울리지 않는다. 옛날과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니.’
벤디에는 최근 여러 번 초월자가 된 아드리안을 마주하며 그에 대한 오래된 평가를 수정했다. 그는 이제 제법 괜찮은 남자였다.
벤디에가 말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당신의 제안에 수락한다고 가정하면, 다음으로 찾아갈 초월자도 생각해 두었나요? 어떻게 연합으로 들어오게 할지도?”
“겸사겸사 그걸 부탁하러 온 거다. 에네트.”
“네, 아드리안 님.”
아드리안의 신호를 받은 에네트가 천을 벗기자, 그 속에서 한 자루의 검이 드러났다. 검신이 무척이나 세련되고, 매끄러웠다.
“패명(覇鳴), [아서네일]. 선물이다.”
이는 황금 비고에서 가져온 아티팩트로, 막대한 기와 체력을 소모해 기파(氣波)를 폭발시키는 기능을 지닌 명검.
아티팩트 중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터라 선물로는 명백히 과했지만, 애석하게도 에온 내에 이 무기를 다룰 수 있는 기를 깨우친 자가 없었다.
부담이 심한 탓이다.
웬만한 전사는 극단적인 단기 결전에서밖에 쓸 수 없다, 라는 것이 그하룬의 평가였다.
아드리안에게는 광검 [실렌다르]가 있고, 속도와 일점 집중 검기에 특화된 그에게 [아서네일]의 광범위 공격은 맞지 않았다.
그러니 [아서네일]을 창고에 보관해 애물단지로 삼을 바에는, 차라리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아군에게 넘기는 편이 바람직했다.
물론 그에 준하는 대가를 받고 말이다.
“선물…… 이요?”
에네트가 검을 내밀었다. 벤디에가 빠르게 검을 받아 자세히 살펴봤다.
종류에 일절 구애받지 않고 모든 무기를 다루는 초월자인 그녀는, 현 대륙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무기 수집가이기도 했다.
[아서네일]을 관찰하는 벤디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음에 드나?”
“예사 아티팩트가 아니군요. 제가 수집해 온 무기 중에서도 별도로 숫자를 붙여도 무방할 만큼.”
그녀가 마치 자식이라도 대하듯 부드럽게 검신을 쓸었다.
“이만한 물건을 선물로 주다니, 대체 어떤 부탁을 하려는 거죠?”
“서약자, 유리온 하이로스.”
아드리안이 단호히 말했다.
“녀석을 연합에 데려와라. 네가 직접.”
유리온과 벤디에는 티타임을 가질 만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 수십 년째 그런 관계를 이어 오고 있으니 친구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유리온이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벤디에도 그 방문을 딱히 거절한 적은 없었다.
유리온을 별 탈 없이 연합에 합류시키는 데 벤디에 이상의 적임자는 없다. 또한 벤디에의 명성은 연합의 간판이 되기에 적합하다.
“저를 이용해 다른 초월들까지 끌어들이겠다…… 다른 사람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인간관계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겁니까. 빠르게 연합을 구성하기에는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테죠. 누가 그렇게 조언해 준 거죠?”
“내가 생각했다.”
“…….”
“그따위로 쳐다보지 마라. 나도 그 정도 머리는 있으니까.”
“선입견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당신이 과거에 생각 없이 한 짓이 한둘이 아니니. 템플의 제자들과 시비가 붙은 적도 있었고요.”
“그래서 거절이냐, 수락이냐.”
아드리안이 빨리 결정하라는 듯이 [아서네일]을 회수하려고 하자, 벤디에가 정확히 좁혀진 간격만큼 몸을 뒤로 뺐다.
“선물과 별개로 연합 창설은 찬성입니다. 유리온은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연합의 의미로 템플의 대제자를 에온에 보내도록 하죠.”
“그거면 됐다.”
아드리안이 반쯤 식은 차를 전부 들이켰다.
“최대한 서두르도록.”
자신이 직접 구상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짜릿함, 그는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에네트가 잘됐다며 작게 손뼉을 쳤다.
그렇게 템플이 대륙 연합에 합류했다.
* * *
15보.
* * *
영혼 없는 고기 인형도 본능에 기반하여 생각할 수 있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오직 몸에만 기록되어, 뇌가 파괴되면 어디에도 남지 않을 기억이지만…… 적어도 그 몸으로 움직이는 동안에는 자의적 활동이 가능하다.
으득, 으드득.
창백한 존재가 고기를 뜯고 있다. 육체가 활용할 자원을 얻기 위함이다.
토끼, 사슴, 멧돼지, 고블린, 코볼트 등 그것들의 잔해가 숲속에 길을 만들었다. 피비린내가 풀 내음을 압도했다.
“아극, 아, 아, 아극…….”
복부가 파헤쳐진 병사는,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술을 마셨던 동료가 산 채로 잡아먹히는 광경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흉부가 갉아먹혀 폐와 심장이 드러난 그는 결국 절명하고 말았다.
“이제야 배가 좀 차는구먼. 흐핫.”
창백한 존재가 적당히 먹어 치운 시체를 옆으로 내던졌다.
육편이 튀었다.
“영 효율적이지 못한 게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 몸은. 그래도 더 이상 이상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홀가분하긴 하지만.”
그가 입가에 묻은 피를 할짝거렸다.
장기가 드러난 채 쓰러진 병사가 눈물을 흘렸다.
“사, 살려, 주, 주세요…… 자식, 자식이, 집에…… 자식이…… 아내가…….”
“가족이 있느냐? 어디에?”
“저쪽, 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병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바라본 창백한 존재가 씨익 웃었다.
“아직 만복이 아닌데, 잘됐군. 자네의 가족들도 맛있게 먹도록 하겠네. 자식 앞에서 어미를 범하고, 어미 앞에서 자식을 먹으면 즐거운 한 상이 되겠군.”
“에…… 예……?”
“물론 배가 고프지 않아도 죽일 걸세.”
병사의 머리에 압력이 가해졌다.
“내게 남은 건 그것뿐이니까.”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꽈드드득.
눈구멍에 손가락이 꽂혀 두개골이 반으로 갈리진 병사가 숨을 거두었다. 살인의 촉감이 신경을 타고 전신에 흘렀다.
“배를 채우자. 사문을 열자, 사문을…….”
그것이 걸음을 옮겼다.
“크세리온 황제를 위해.”
8세기 전에 옛 왕이 죽인 초월자들의 시체 인형이 중앙 대륙에 있는 사문을 개방하기 위해 일대를 피로 적셨다.
영혼 없는 몸뚱이.
강제로 이상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은 길 잃은 광기와 욕망만이 전부였다.
창백한 존재가 남긴 참상의 흔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된 병사들을 찾으러 온 테르네티아 연방의 순찰대에 발견됐다.
“산 채로 먹혔다니……이런 끔찍한.”
“저항조차 못 해 보고 당했다. 뭔지는 몰라도 보통 괴물은 아니야. 먹힌 흔적을 보니 인간형의 이형종인 듯하군.”
순찰대장이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시체 수습은 나중이었다.
“당장 토벌대를 조직하지 않으면 피해가 크겠어. 곧장 영주님께 보고한다.”
“예, 대장님.”
이렇듯 옛 왕의 영향력을, 알게 모르게 곳곳에서 인지하기 시작했다.
피바람이 목전에 닿았다.
* * *
현실 세계에서는 연쇄적으로 사건이 거듭해서 전개되고 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대륙은 지금쯤 분쟁으로 과열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의 틈새 속 세상에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고요한 발소리만 연신 울려 퍼졌다.
11보.
10보.
7보.
5보.
3보.
2보.
1보.
이윽고 발소리가 멎었다.
스륵.
운명의 도시, 렌디바르의 왕성에서 왕좌에 앉은 노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현실에서처럼 넝마를 두르지 않았다.
영광스러운 왕의 갑옷을 둘렀고, 국기가 새겨진 망토를 펄럭였으며, 거검을 소지한 채 근엄한 위엄을 품기는 외견을 자랑했다.
인간계 최초의 왕.
세계의 틈새에서 운명전 시대의 모습으로 돌아온 광신자 노인이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직후 왕성을 찾아온 귀족들이 양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운명의 왕이시여, 명령하시옵소서.”
“모든 귀족을 소집하겠노라.”
렌디바르를 아우르는 틈새의 거짓된 세계가 잠시 흔들렸다.
“어둠 속으로 진군한다.”
운명 파괴자의 죽음을 향해.
* * *
세계의 틈새를 진동시킨 파동은 틈새의 그늘에도 전해졌다.
‘음?’
어두운 정적 속에서 심장이 품은 무한한 마력과 고유한 신성력을 합일하고 있던 베르덴이 반사적으로 반응하곤, 공간을 나섰다.
“무슨 일 있나?”
[틈새의 그늘은 다소 불안정한 터라 이따금 이런 흔들림이 발생하곤 합니다. 우리의 신께서는 염려치 마십시오.]
고위 악마인 크란벨이 말을 덧붙였다.
[하드리스 님의 명으로, 우리의 신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머지않아 오랜 준비가 끝나니, 그때가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준비?
“알겠다, 기다리지.”
베르덴은 악마를 대하는 습관이라는 듯 고개를 내린 크란벨의 어깨를 다독였다. 크란벨은 더 깊게 허리를 숙여 감정을 숨겼다.
두려움은 없다.
전의만이 샘솟는다.
신께서 악마를 보살펴 주시니.
악마는 신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