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화 신격 – 5
푸른 산맥을 등반한 지도 어느새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세간의 소식을 접할 길이 없어 국제 사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테르네티아 연방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치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 남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톡, 토톡, 톡.
하에넬은 호세에게 간단히 배운 조각술로 나무를 깎아 냈다. 주변에 훌륭한 표본이 널렸기에 모사하듯 흉내만 내려고 해 봐도 손재주가 늘었다.
밖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안은 여전히 따스하고, 포근하다.
난로에 손질된 장작을 넣었고, 레나르와 페이와 함께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이불을 갰고, 난롯불로 스튜를 끓였다.
호세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주기로 이곳 오두막과 산맥의 정상을 오갔는데, 식사 시간이 대충 맞으면 옹기종기 모여 함께 밥을 먹었다.
‘좋네, 이런 것도.’
백작가의 여식인 하에넬은 이런 목가적인 삶을 동경하곤 했다.
여기서 그녀는 평범한 여성에 불과했다. 아니지, 성직자가 되고자 집을 나섰으니, 우스갯소리로 청빈한 수도자라고 해도 좋으려나.
이단이기는 하나, 하에넬은 스스로 이단자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에넬은 조각칼과 하나가 되다시피 하며 여기서 홀로 지냈었을 호세의 삶을 헤아렸다.
‘말도 배우지 못한 자식은 병으로 죽었고…… 자식을 치료하려 했던 아내는 악마 숭배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모든 순간을 지켜봐야만 했었던 호세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런데도 증오를 흩뿌리지 않은 채 푸른 산맥에 은거해 아내와 자식을 기리는 호세의 인격은 절대로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호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하에넬은 분명 죽거나 죽였으리라.
“하에넬, 언니…….”
결국 호세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 신앙을 품고자 한다.
저물어야 했을 생명이 다시 떠오른 건 분명 이를 위해서일 테니까.
“어, 언니.”
그녀는 호세와 호세가 모시는 신을 향한 감사를 신앙으로 보답했다. 가슴이 채워진다. 그렇게 부족한 마음을 보완했다.
톡, 톡.
치맛자락을 잡은 약한 손길에 하에넬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페이가 힘겨운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곁에 서 있었다.
“왜 그래, 페이. 잠이 안 오…….”
“오빠가, 이상, 해.”
하에넬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누운 레나르가 눈을 꼭 감고,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얼굴이 꽤 붉었다.
‘감기? 자기 전엔 생생했는데?’
페이를 조심스럽게 밀어낸 뒤 레나르의 상태를 보려던 찰나였다. 페이의 이마에 닿은 손바닥이 너무 뜨거웠다.
“……페이?”
힘없이 그녀에게 기댄 페이가 쌕쌕거리며 뜨거운 숨을 흘렸다.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치솟은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하얘진 하에넬이 귀족의 여식답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페이를 침대 위로 옮겼다.
‘증상이 비슷, 아니 똑같아. 감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해. 전염병? 혹시 피울음 역병의 후유증 같은 게 이제야 발현된 건가?’
병명을 알지도 못하는데 함부로 포션을 먹일 순 없다.
하나 이대로 방치하는 것도 큰일이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없어.’
하에넬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서둘러 보온 장비를 갖췄다.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건 호세 님밖에 없─’
털썩.
하에넬은 눈앞이 핑 도는 느낌에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았다. 어지럽다. 문득 자기 피부도 이상할 정도로 뜨거워진 걸 깨달았다.
동시에 발병한 증상.
안 돼.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호세…… 님…….”
하에넬은 문고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다가 의식이 끊어졌다.
난로에서 불씨가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두막이 고요해졌다.
어둠 속에서 눈보라가 몰아쳤다.
* * *
세계의 틈새에 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그의 시간 감각이 현실과 일치한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정확히 며칠, 몇 주가 지났는지 도통 가늠할 방법이 전무했다.
바깥의 녀석들이 신경 쓰인다. 그럴수록 명상에 집중했다. 하루라도 빨리 경지를 이루는 것이 귀환의 지름길이므로.
두근.
자그마한 신성력을 다루면서 베르덴은 신으로서 깨달음을 얻었다.
신성력이란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기에 마력 이상으로 형식(形式)에 제한이 없었다.
이는 의지에 직결된 힘.
신성력을 몇 번이고 관찰하고 시험하면서, 마치 마도 <무한>을 통해서 마법을 발현하는 감각과 매우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어떤 현상도 일으키지 못하는 순수한 신성력을 외부에 내보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내부의 심장에 집중해 몸에 귀속해 보려고 했다.
현재의 육체 자체를, 신성력을 활용할 수 있는 매개체이자 수단으로 쓰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마력과의 합일을 유도했다.
베르덴의 마력은 타인의 마력회로에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하니, 어쩌면 신성력조차도 아우를 수 있을 터.
이윽고 시행착오를 해 본 결과 베르덴의 가설은 맞아떨어졌다.
신성력과 마력,
그것들이 함께 머물렀다.
‘조화를 이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반발력은 사실상 거의 없는 수준이다. 둘 다 내게서 비롯된 힘이기 때문인가.’
심장이 맥동한다.
신성력도 규칙적으로 반응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신성력은 일종의 점토와도 같다. 아직 빚어지지 않은 도자기인 셈이다. 결국 무엇을 구축할지 정하는 것은 베르덴의 몫이다.
고민이 깊어진다.
루아스교가 구사하는 빛의 기적은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을까, 이슈르는 사막의 기적을 어떻게 조형했을까.
‘생각나는 게 몇 가지 있지만…….’
베르덴은 끝내 답을 정하기 전에 고독한 어둠을 벗어났다. 기척이 가까웠다. 짐승의 머리뼈를 뒤집어쓴 악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준비란 건 끝났나?”
[예, 우리의 신이시여.]
“내게 보여 줄 게 뭐지?”
[저의 언변으로는 자세히 설명해 드리기 어려우나, 하드라스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늘의 끝엔 입구가 있을지니.]
크란벨은 네 개의 팔로 공손하게 베르덴의 옆을 가리켰다.
칠흑 같은 남쪽의 어둠이 일렁였다.
[모시겠습니다.]
* * *
신의 기척이 저편으로 향한다.
거리는 벌어졌다.
겹겹이 쌓인 틈새의 그늘 속 어둠은 벽이 되어 이목을 가릴 것이다.
[크르르르…….]
[캬아아아아아!]
새로운 신을 맞이한 뒤 순한 동물처럼 지내오던 악마들의 본성이 점차 깨어난다. 흉포한 울음소리와 잔악한 살의.
그야말로 기괴한 모습의 괴물들이 불규칙하게 대열을 이루었다.
[후후…… 급하게도 오는구나…….]
하드라스의 입가가 길게 벌어졌다.
첨예한 이빨들이 드러났다.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이유가…… 이곳에 있다…….]
모든 살기가 북쪽의 어둠으로 향했다.
[불청객을 맞이하라…….]
악마 군단이 일제히 뛰쳐 나갔다.
* * *
드그둑, 드그둑, 드그둑!
한 명의 왕과 그를 에워싼 12인의 귀족이 각자의 말을 타고 질주한다. 세계의 틈새를 비춘 광명이 점차 희미해진다.
숲의 어둠을 맞닥뜨린 12명의 귀족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극도의 혐오감이었다.
이윽고 빛이 일절 없는…… 추악한 암흑이 만연한 공간이 펼쳐졌다. 그 경계선을 밟는 순간 기류가 크게 뒤틀렸다.
대열의 최전선에 자리한 귀족이 섬전처럼 검을 빼 들었다.
촤아아악!
짐승 악마가 반 토막이 나며, 돌진해 오던 그대로 날아갔다. 악마의 저급하기 짝이 없는 피가 귀족의 갑옷을 적셨다.
뒤이어 영광 따위 없는 틈새의 그늘에서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인간계 최초의 왕이 거대한 검을 손에 쥐었다.
“악을 멸하라.”
기계적인 함성을 내지른 12인의 귀족이 속도를 높여 악마 군세와 충돌했다.
피와 장기가 난무했다.
베르덴에게 연신 사랑을 갈구했던 하위 악마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으나,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을 위해 희생한다는 사명감에 황홀감을 느꼈다.
“……!”
몸이 절반으로 갈라진 악마가 죽기 전에 가시가 돋아난 팔을 휘둘렀다. 채찍처럼 파공음을 낸 그것이 말의 머리를 박살 냈다.
말이 고꾸라졌다.
관성 탓에 앞으로 튕겨 나간 귀족이 낙법을 취해 균형을 되찾았다.
콰드드드득!
쐐기가 투구를 관통했다.
머리를 꿴 귀족을 발끝까지 찢어발긴 악마들이 어둠을 내디뎠다.
틈새의 고위 악마들.
[인간을 통합한 제왕, 그리고 그와 함께 역사상 최대의 인간 국가를 건설한 원탁의 12기사. 하드라스 님이 말씀하신 대로다.]
[생각보다 약하구먼. 12기사란 것들은.]
[운명에. 타락한. 인간들이니까. 본래의. 강함은. 과거에. 상실한. 지. 오래지. 놈들은. 그저. 명령만을. 반복하는. 인형에. 불과하다.]
[12인의 기사가 아닌 12인의 귀족. 그 차이겠지.]
[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죽이자.]
세계의 틈새에서 운명전을 경험한 악마는 오직 하드라스밖에 없다. 그 외의 악마는 나중에 탄생한 개체들이다.
그들에게도 운명전의 이야기는 전설이자 신화와 다름없었다.
[우리의 신을 위해.]
[악마의. 구원을. 위해.]
고위 악마들이 저마다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통일되지 않은 기형적인 능력이 발현됐다.
쩌어어어어엉!
체고가 40m에 이르는 거대한 악마가 타오르는 검을 휘둘렀다. 렌디바르에서 베르덴과 하드라스를 태웠던 괴수 악마가 돌진했다. 외눈의 악마가 수백 개의 촉수를 쏘아 보냈다.
악마의 사체로 작은 언덕을 쌓은 귀족들이 고위 악마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대화도 없는.
오직 적의만이 가득한.
타협도, 화평의 의지는 전무한.
그런 전장 한복판에서 오래된 존재 둘이 서로를 마주했다. 사방이 시끄러운데도, 오직 그들이 있는 공간만은 고요했다.
“운명 파괴자는 어디에 있느냐, 하드라스여.”
[교만한 눈은…… 여전하구나…… 아서.]
현왕(賢王)
인간계 최초의 왕.
‘당신’의 두 번째 사도.
마족 멸절자.
저항을 등진 자.
운명의 왕───아서 타렌폴드.
[지금의 우리에게……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것인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우습고, 애석하도다.”
아서가 거검을 어깨에 얹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재건될 것이니,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 자네도 깨닫지 않았나. 대안 없는 저항은 가치가 없다는 걸.”
[…….]
“운명의 기회는 열려 있노라. 악마이기에 사도는 될 수 없을지언정 존속할 순 있으리. 이 내가 약속을 보증하겠노라. 한때의 전우로서.”
조소가 울려 퍼졌다.
[‘당신’을 추종하더니…… 혀가 길어질 대로…… 길어졌구나…… 전우…… 네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다니…… 그리고……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아량을 베푼 척…… 지껄이지 마라.]
하드라스가 제 가슴을 두드렸다.
[네놈에게 육신은 죽을지언정…… 이 ‘마음’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너희는 감히 멸할 수 없지…… 이 마음은 너희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니…… 그래서…… 여길 방치한 것 아니냐…… 어차피 죽여도…… 결국엔 죽지 않으니까.]
“…….”
[우리의 저항은…… 가치가 있다.]
하드라스가 단언했다.
[우리의 신께서, 우리를 긍정하셨다…… 우리의 신이, 우리의 대안이다.]
“운명 파괴자를 자네들의 신으로 떠받들었는가. 아둔하도다. 하염없이 믿음을 갈구한 끝에 그 눈마저 멀었도다.”
공간이 경직됐다.
“다시 한번 묻겠노라, 하드라스.”
아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운명 파괴자는 어디에 있느냐.”
하드라스가 답했다.
[가증스러운 배신자는…… 알 자격이 없다.]
“안타깝도다.”
틈새의 그늘이 격동함과 동시에 거검이 수평선을 갈랐다. 주변의 악마가 몰살당하기 전에 하드라스가 팔을 들어 검로를 틀어막았다.
아서의 손아귀가 하드라스의 목을 붙잡아 아래로 짓눌렀다. 거검의 손잡이 끝이 그의 안면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머리가 파괴된 늙은 악마의 몸이 곧 검은 연기로 화했다.
[조급한가…… 아서.]
검은 연기가 다시 뭉치며 하드라스의 본모습을 구성한다.
아서에 못지않은 거구의 육신. 암흑의 고리가 왕관처럼 머리 위를 장식했다. 그의 주변에서 어둠이 벚꽃처럼 흩날렸다.
[느긋하게 굴어라…… 과거의 네놈처럼.]
운명전에서 활약한 어둠의 대악마, 녹시아스의 오른팔. 총 다섯 개의 악마 군단 중 하나를 이끌었던 전선의 악마.
죄악의 군단장───하드라스.
날카로운 손끝이 아서를 겨냥했다.
[시간은 많다…….]
* * *
틈새의 그늘의 끝으로 향하는 크란벨의 주위는 잔잔했다. 어둠이 장막이 되어 준 덕분에 그늘 내부의 상황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우리의 신을 세계의 틈새를 밖으로 보내 드릴 수 있다. 그를 위해서라면 틈새의 악마가 전부 죽어도 상관없다.
우리의 신께서 무사히 생존하시는 것이 악마의 승리 조건이었다.
하지만, 크란벨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베르덴은 살아온 세월과 관계없이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
대수림에서는 세계수와 대화를 나누었고, 기억 속에서는 올다르크와 마주했고, 사막에서는 ‘당신’의 표층의지와 대면했으며, 패잔병의 감옥에서는 태초의 드래곤과 조우했다.
격상의 존재들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감각은 예민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말인즉슨 베르덴은 눈치가 빨랐다.
“크란벨.”
베르덴이 멈춰 섰다.
“배신자가 온 건가? 인간계 최초의 왕이.”
[……!]
크란벨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