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화 환국 (1)
베르덴이 의식을 잃고, 옛 왕이 일시적으로 다시 봉인된 이후…….
아드리안과 이자벨라는 베르덴의 부재를 대신한 대행자로서 운명의 추종자를 견제하며, 국제 사회를 안정시키고 초월자 중심의 연합을 구축하여 옛 왕에 대항할 전력을 갖췄다.
이런 와중에 아드리안은 에온의 간부들을 파견, 로니아 왕국에 계명 위반의 처벌을 집행해 마울러의 권역을 빼앗으려 했다.
마탑들의 조력을 받아서 말이다.
섬의 유적에서 마울러가 살해한 마탑 인사들에 대한 보복이 명분이었다. 마울러의 행동은 마탑들을 자극했고, 이는 국제 분열을 가속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니 필요 불가결한 일이었다.
궁극적으로 아드리안의 목적은 마울러와의 공식 일대일 전투였다.
초월자 간의 격돌로 갈등이 넘쳐흐르는 세간의 관심을 한데 끌고, 잠재적 위험인 놈을 선제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이것이 에온의 초기 계획.’
하지만 77일 지난 현재.
대륙에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여러 이변이 발생했다.
서대륙, 중앙 대륙, 동대륙 전역에 언데드 군세가 곳곳에서 발호한 것이다. 마경에서 언데드가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이에 관련해 각각의 대륙에서 대규모 언데드를 불러일으키는 정체 모를 존재들이 있음이 타국과의 연대로 확인되었다.
정황상 옛 왕이 부활함과 동시에 깨어난 옛 왕의 주구(走狗)들 같다고.
‘그 혼란 속에서…… 에온은 사태에 직면했다.’
범대륙적인 공간 좌표 교란.
통신 장치 신호 손상.
위의 사태로 인해 로니아 왕국에 파견한 에온의 위상들과 연락 두절.
모종의 간섭에 의해 실시간으로 급박하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위의 정보들을 축약해서 전달한 것이 베타의 마지막 통신이었다.
직후에 침묵의 사막은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겨 고립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말이다. 이후로 통신 장치가 재기동하는 일은 없었지.”
“…….”
베르덴은 소리 없이 숨을 내쉬며 잠깐 눈을 감았다. 적어도 누하라와 공간이 연결되기 전까지는 에온의 확인된 피해는 없었다.
다행이지만, 그 후의 수십 일 동안에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불분명하기에 책임자로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이곳은 어떻습니까.”
“생명의 거목이 자리를 잡으면서 기초적인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누하라는 도리어 바깥에 비해 안전한 상태다. 소란이 있어도 금세 가라앉았고. 여긴 그대의 신앙이 있으니까.”
투하르는 신정 국가다. 그들의 신앙이 견고하면 어떤 불안감도 끝내 국가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 수 없을지니.
베르덴이 건재한 이상 투하르는 여타 국가들보다 안정된 나라다.
“나름대로 정보를 더 얻으려고 해 봤지만 대륙과 공간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별 소득은 없었다. 다만 기묘한 파동이 꽤 긴 주기로 물결치며 공간의 이동을 저해한다는 느낌은 받았다.”
“마법은 아니란 말씀이군요.”
“이형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옛 왕은 언데드와 연관이 깊으니, 그런 류의 언데드가 출현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겠지.”
관리자가 올곧은 벽안을 응시했다.
“베르덴, 그대의 영혼과 육체를 천천히 결합하여 경지의 조화를 완성하는 것도 방법이다. 내가 도울 수 있지. 그래도 당장 돌아갈 건가?”
“지체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무슨 사태가 더 벌어질지 가늠조차 안 된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파악했으니 움직일 때다.
빠르면 대처할 수 있지만.
늦으면 돌이킬 수 없다.
“새롭게 도달한 경지를 제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거다.”
“스승님.”
베르덴이 자신했다.
“통제할 수 있습니다.”
“……!”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에 관리자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잠든 사이에 무슨 경험을 한 것인지…… 신격을 얻은 베르덴은 정신적으로도 아주 큰 변화를 겪은 것 같았다.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 이동이 어려운 이상 침묵의 사막을 건너야 한다. 그대의 비행정이라면 최단 시간으로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베르덴은 방주의 선장으로서 자신만의 비행정을 보유하고 있다.
지형에 적응하는 선박, 아르시스. 처음 투하르를 찾아 헤맸을 때도 아르시스를 이용해 <비행> 자체가 불가능한 사막을 횡단했다.
“상식적으로 그게 가장 빠른 길이지만, 그 시간도 낭비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공간을 무너뜨리겠습니다.”
손상된 한쪽 공간 좌표를 경유해 목적지의 공간 좌표를 파손, 즉 두 개의 좌표를 일그러뜨림으로써 일시적으로 통로를 잇는 방법.
쉐오른 장로에게서 배운 공간 지배와 발로크의 초위 마법으로 3차원을 넘어서 4차원을 경험한 끝에 고안한 공간 이동이다.
통상적인 공간 이동이 입구를 여는 개념이라면, 이러한 전이는 공간이라는 아주 얇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에 상처를 내어 꿰뚫는 개념이다.
이르자면 3차원 이동과 4차원 이동의 중간쯤인 셈이다.
베르덴은 아직 이그나시아의 도움 없이 네 번째 공간 좌표를 만드는 초위 마법 <디아셴시오>를 혼자 발동할 수 없다.
그때 이후로 마법을 연구할 시간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공간에 직접적으로 해를 끼침으로써 교란에서 벗어나겠다…… 여파를 지켜봐야겠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겠군. 그대라면.”
관리자가 짧은 수염을 쓸었다.
“혼자 움직일 건가.”
“그 편이 가장 빠를 테니까요. 권역부터 확인한 뒤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혼자는 아닙니다.”
베르덴이 아공간에서 동력이 활성화되지 않은 미니 골렘을 소환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특유의 외눈에 즉각 빛이 들어왔다.
[알파. 부활.]
알파가 손을 흔들었다.
[관리자. 안녕.]
“그래, 잘 잤느냐.”
“알파, 깨어나자마자 미안하지만 곧장 움직여야 한다.”
<기억 공유>
직전의 대화가 담긴 베르덴의 기억이 알파에게 전해졌다.
[확인. 관리자 어깨에서 잠시 대기.]
알파가 깡충 뛰어올라서 관리자의 오른쪽 어깨에 올라탔다. 마치 베르덴과 이심전심한 것 같은 행동에 관리자가 작게 웃고는, 현재 개방한 마도에 집중하며 기립했다.
“베르덴, 준비되면 영혼과 육체를 차단한 힘을 거두겠다.”
“예.”
베르덴이 생명의 거목이 마련한 요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샤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다.
“준비됐습니다.”
“시작하지.”
근원의 마도, 해제.
관리자가 마력을 거두는 순간 베르덴의 내면에서 변화가 일었다. 근본적으로 정지해 있던 두 개의 빛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영혼과 육체…….
이상을 추구하는 진정한 신의 결정체가 마침내 밖으로 드러날 때였다. 관리자도 과연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톡.
서로에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면과 외면이 일치했다. 규칙적이고, 또 거대한 심장 박동 소리가 허공에 맴돈다.
잿빛의 [아인베르]와 [인테리스]에 서린 희미한 빛이 점점 더 강해진다.
무거운 정적.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
‘……온다.’
베르덴을 지켜보던 관리자가 즉각 <아케인>으로 마력 장막을 전개했다.
푸른빛이 폭발했다.
고개 숙인 베르덴으로부터 무한한 힘이 발산하여 푸른 마력의 기둥을 형성했다. 주변 중력을 역전시킬 정도의 척력이 휘몰아쳤다.
쿠구구구구구구───!
그들이 딛고 있는 생명의 거목이 포효라도 하듯 거대한 나뭇가지를 움직였다. 형언할 수 없는 진동이 뿌리를 타고 누하라 전력을 격동시켰다.
베르덴을 주목하는 침묵의 사막.
새로운 사막의 신을 향해서 기도하던 누하라의 시민들과, 이슈르를 따랐던 이전 사막의 신앙자들과, 이슈르에 반기를 들었던 이전 배교자들과. 사막의 신앙에 의해 쫓겨났던 이전 추방자들과 이제는 거의 길들여져 누하라를 수호하는 사막의 고대 재해들과…….
누하라에 남은 에온 소속 마법사들이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신격을 얻은 8위계의 베르덴.’
근거리에서 압력을 전부 감당하지 못한 관리자가 조금씩 밀려난다.
‘과연, 자신할 만하구나……!’
가히 신이라고 칭해져도 손색이 없다.
콰과과과과과과과!
천상을 수직으로 관통한 광대한 마력의 기둥에 회색의 빛이 섞이자, 누하라의 하늘 또한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잿빛이 점차 확산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힘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더 폭증했다. 이대로 가다가 누하라 전역이 회색빛으로 물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공의 대기가 뒤집혔다.
청각이 반응했다.
“──────!! ────!!!!”
얼굴엔 핏줄이 불거지고, 전신엔 힘줄과 근육이 부푼 베르덴이 [인테리스]를 강하게 붙든 채 함성을 내질렀다.
영육의 합일로 본래 8위계로 등극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요동쳤다. 개념에 따른 충동이 정신을 다시 집어삼키려 했다.
이걸 능숙하게 제어해야만 온전한 위계를 쟁취할 수 있다.
다만, 넘어야 할 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 번째 사도에게 입었던 상처 전부에 대한 격통, 신격이 깃들며 상승한 초월자의 격, 무리하게 권능과 초위 마법을 운용한 대가…….
세계의 틈새에서 영혼에 가해진 변화가 일순간에 육체로 밀려든 것이다.
파멸의 개념에서 비롯된 극도의 파괴 충동이 마음과 뇌를 힘껏 저미고, 심장을 관통한 듯한 통증이 뇌간을 잡아 뜯는다.
의식이 단번에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 편이 당연하다.
관리자는 이런 상황을 우려했기에 시간을 들이자 조언했지만…… 베르덴이 힘의 통제를 확신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마력이 흩어진다.
잿빛이 잦아든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제어하는 힘.
이성(理性)과 신앙(信仰)이 모든 걸 압도했다.
“…….”
베르덴이 고개를 들자, 마치 분노한 듯한 표정이 드러났다. 본질적인 파괴 충동을 통제했어도, 충동은 해소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옆을 향해 팔을 뻗은 다음 손가락을 굽히며 손목을 비틀었다.
콰드드드드득!
공간이 왜곡되며 작은 균열이 생겼다.
관리자가 그 여파를 관찰했다.
“이런 방식의 공간 이동은 공간 그 자체에 부담이 너무 크군. 안전성을 확보할 때까지 최대한 남용하면 안 되겠어.”
[베르덴 폐하. 준비 완료.]
알파는 평소처럼 [아인베르]의 목덜미에 들어가 안착했다. 충동 때문에 호흡마저 신중해진 베르덴이 느릿하게 말했다.
“아이샤를, 부탁드립니다.”
[관리자. 다녀오겠음.]
알파의 감정은 나날이 풍성해지는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은 걱정할 것 없다.”
관리자가 생명의 거목과 누하라를 배경으로 두고 그들을 배웅했다.
“다녀오거라.”
쿠웅!
일순간 허공으로 솟구친 베르덴과 알파가 공간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 * *
두그둑, 두그둑, 두그둑!
여러 군마가 흙먼지를 뒤에 남기며 바삐 숲길을 가로질렀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라우드 백작과 기사단이 쉬지 않고 말을 재촉했다.
“아직……!! 아직도 쫓아오고 있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 괴물이라면 금방 따라붙을 겁니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 명에 달하는 벨마이르 왕국의 병력이 고작 한 명한테 몰살당했다. 왕명을 받든 왕가 직속 기사까지 동행했으나, 그 기사는 잡아먹히듯 산 채로 목덜미가 뜯겨 사망했다.
그 말도 안 되는 무력 앞에 무장한 병사들은 한낱 먹잇감에 불과했다.
“분명 놈이…… 예의 그것이겠지?”
“예, 아마도…….”
그 괴물이 현재 중앙 대륙에 퍼진 소문의 진상 중 하나라면 납득할 수 있다. 천 명이 아니라 삼천 명이 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반신반의했는데 설마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국경을 막은 언데드 군세를 겨우 뚫었는데…… 하, 첩첩산중이구나.”
불과 수십 일 만에 언데드와의 전쟁터로 나가게 된 라우드 백작이 탄식했다. 평화로운 삶을 떠올린 그가 지형을 읽었다.
“곧 주인 없는 땅의 경계에 도착한다. 그놈이 또 쫓아오면 날 지키려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에온과 접촉해야 한다. 반드시 왕명을 우선해라.”
“각하, 하오나,”
“벨마이르 왕국의 명운이 달렸다.”
라우드 백작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애국심을 잃지 않았다.
“에온의 조력이 없으면 왕국은 살아남을 수──”
“제길, 왔습니다!”
그림자가 엄청난 속도로 백작 일행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어느샌가 길을 가로막은 인간형의 그것이 검을 눕혔다.
기사들이 제각기 기와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에 땅을 스치듯 날아오는 참격.
군마들의 발이 모조리 잘렸다.
“아……!”
백작과 기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로 고꾸라지며 낙마했다. 속도가 속도인지라 군마들의 목은 그대로 부러졌다.
“각하를 보호해라!”
“예!”
갑옷에 깃든 마법적인 효과 덕분에 낙상을 피한 이들이 서둘러 진형을 갖췄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전쟁에서 도망친다, 그야말로 수치. 수치스러운 자들이로군. 그러니 그에 걸맞게 수치스럽게 죽어야 마땅하겠지.”
다소 피부가 창백한 젊은 검사가 병사들의 피로 범벅이 된 채 다가온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강함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또한 형용할 수 없는 광기도.
중앙 대륙에는 저런 존재가 불규칙적으로 나타나 학살과 식인을 저지르고 있다. 놈들로 인한 피해가 표면으로 드러난 이후 루아스교는 저것들의 정체를 이렇게 정의했다.
초월자 인형, 이라고
‘과거 초월자의 시체에서 비롯된 존재…… 초월을 상실한 초월자라고 했던가.’
라우드 백작은 여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초월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래도 저 괴물이 자신들을 씹어 먹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타개책은, 없겠지.”
“저만 믿으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왕가의 직속 기사가 생채기조차 남기지 못하고 몇 합 만에 당했습니다.”
기사단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일검이라도 받아 내면 천운입니다.”
“후우…….”
라우드 백작은 단 한 명이라도 살려 보내 에온과 접촉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전멸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왕가의 서신이라도 숲에 던질까?
혹시라도 동물들이 서신을 에온에 전달해 주지 않을까?
한껏 망상을 펼친 라우드 백작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죽어 버린 군마들이나, 죽게 될 자신들이나 신세가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결연한 의지를 보였으나, 그래도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백작과 기사들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크크크크크큭.”
800년 전 옛 왕에게 죽어서 인형이 된 초월자가 그를 비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쩌저적.
백작과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검사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검사 또한 눈썹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검사가 중얼거렸다.
“……뭐지?”
길 위의 허공에 정체 모를 틈새가 생겼다.
턱.
균열의 가장자리를 짚은 손.
그 안에서 잿빛의 로브를 두른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격렬한 파괴 충동을 억누른 베르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