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5화 죽음의 문 (9)
어째서 그들이 감옥에 있는 걸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에온과 마탑들이 마울러의 권역을 노렸고.
마울러가 로니아 왕국으로 향했고.
아드리안이 마울러를 따라서 로니아 왕국으로 이동했고…… 이상 사태를 포함한 여러 상황이 벌어진 끝에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감옥에서 깨어났다.
“그 꼴로 탈출하겠다고? 되겠냐?”
마울러가 어깨를 들썩이며 조소했다. 팔목과 발목, 그리고 관절을 미친년처럼 봉쇄한 쇠사슬이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감옥 벽에서 머리를 뗐다.
그가 고개를 바로 하자 어깨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방법이 뭔데.”
“생각 중이라고 했다.”
아드리안은 만능의 발로크 베시아스에게 붙잡혀 오랫동안 감금당해 인체 실험을 당한 적이 있다. 이런 상황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철컹, 철컹.
부상 상태를 면밀하게 관조하며 전신의 근육을 쥐어짰다. 금속이 비틀리는 소음.
구속구가 부족했던 것인지 마울러보다는 억압의 정도가 낮았다.
‘기의 8할…… 아니, 7할만 회복해도 부술 수 있겠지만, 공간 가방을 빼앗겨서 당장 치료 수단이 없다. 하다못해 날붙이 하나만 있었다면.”
수갑, 족쇄, 쇠사슬의 틈새를 이용할 생각은 진즉 버렸다. 어찌나 무식하게 속박한 건지 아주 촘촘해서 움직임이 크게 제한됐다.
무투계 초월자임을 고려한 구속이었다.
마울러의 경우엔 겨우 머리와 목 부근만 임의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나기는 하냐? 망나니 새끼.”
“진심으로 말하는데 너보단 낫다.”
아드리안이 목소리를 깔았다.
“정 답답하면 ‘숨겨 둔 힘’이라도 꺼내든가.”
“힘?”
마울러가 감옥에 갇힌 이 상황이 따분하다는 듯 크게 하품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 게 있으면 벌써 쓰고도 남았겠지.”
“…….”
아드리안이 마울러를 노려봤지만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감옥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발소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철컥, 끼이이익.
녹슨 철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여인이 감옥으로 들어왔다. 벽에 걸린 횃불이 붉은빛이 감도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히스릴 델 로하룬.
그녀의 양손과 팔 안쪽에는 음식이 담긴 세 개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
“아침 겸 점심이야. 오늘은 힘 좀 써 봤어.”
정말로 대충 구운 스테이크에서 나온 핏물이 그릇에 고였다. 손질조차 제대로 안 된 야채가 특히 가관이었다.
마울러가 팍 인상을 썼다.
“고블린 먹이냐?”
“성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네. 버릇 없긴.”
히스릴이 철창 바깥에 아드리안과 마울러의 몫을 내려 두고 의자를 가져왔다. 이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그녀가 손가락으로 스테이크의 가장자리를 집고는 뜯어 먹었다.
우아한 듯 야만적이다.
먼지 하나 묻는 것도 호들갑을 떨 것 같은 남다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모습이다. 그것이 피와 살로 가려진 그녀의 본질을 대변했다.
“본연의 맛이야말로 진리지.”
히스릴이 발끝으로 그릇들을 감옥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항상성을 최대로 활성화하려면 배부터 채워야 하잖아. 피도 많이 흘렸는데 사양하지 마.”
“하.”
아드리안이 냉소했다.
“여길 지옥으로 만든 년이 배려심이 깊군.”
“나는 약속대로 사문(死門)을 열었을 뿐이야. 그 결과는 내 의도가 전혀 아니란다. 언데드에게 얼마나 죽었든, 얼마나 살아남든 관심도 없어.”
보란 듯이 다리를 꼰 히스릴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내가 악의가 있었다면 너희가 여태껏 살아 있을 리가 없지. 너희 부하들도. 안 그래?”
퉷.
“누가 들으면 너한테 진 줄 알겠군.”
마울러의 피비린내 나는 불평에 히스릴이 각자의 처지를 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고, 그녀는 간수였다.
“변명이 구차하지 않아? 델하룬의 대왕.”
콰아앙!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은 마울러가 뒤통수로 벽을 때렸다.
오래된 돌벽에 금이 갔다.
“시발 년아, 제대로 다시 붙어.”
“만날 때부터 느꼈는데 입이 꽤 더럽네. 델하룬을 만든 창설자한테.”
의자가 뒤로 자빠졌다.
“일단 먹고 회복부터 하라니까?”
히스릴이 감옥 안으로 들어와 그릇으로 마울러의 머리를 후려쳤다. 쨍그랑! 접시가 박살 나면서 고기와 야채가 나뒹굴었다.
이어진 발길질에 구속된 채로 쓰러진 마울러의 얼굴에 음식이 묻었다.
“네년……! 죽여 버린다!!”
“초월자는 아름다운 존재야. 이르자면 꽉 채워진 그릇처럼 깔끔하지. 그런데 넌 왜 애매할까? 어째서 조금 역겹게 느껴지지? 내용물이 살짝 흘러넘친 탓에 더러워진 그릇처럼.”
기류가 바뀌었다.
“내게 말해 봐. 너는 뭘 감추고 있는지.”
히스릴의 격이 드러나지 않은 속내를 끄집어내려 한다. 그녀의 존재는 겉과 속이 다른 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네 눈이 잘못된 거겠지. 얼굴 가까이 대라. 내가 직접 뽑아 줄 테니……!”
마울러는 격의 영향력을 흉포하게 물리쳤다.
“후후, 앙칼진 건 초월자답네.”
“큽……!!”
히스릴이 강제로 마울러에게 스테이크인 척하는 생고기를 욱여넣었다. 마울러가 저항했지만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친년놈들.’
아드리안이 내심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죽일 생각이 없다면, 우릴 언제까지 감옥에 가둘 생각이지?”
“서쪽에 사문이 하나 더 열릴 때까지. 사실 이미 개방되긴 했지만.”
히스릴이 대충 고기의 핏물을 털고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나중에 보니 여기 동대륙 남부에 사문이 두 개 있더라고? 그래서 좋다고 둘 다 손댔는데, 앞서 열린 사문의 영향력 때문에 개방 시간이 지연됐어. 난 그게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고. 내기에서 진 대가지. 편하게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귀찮아진 셈이랄까…….”
“무슨 약속.”
“주검의 영광이 우리를 부활시키는 대신, 우리는 아홉 개의 사문을 개방하는 약속. 우리가 세 명이니, 각자 하나씩은 열어 줘야 체면이 서거든. 내가 하나 열었고, 반토레온이 하나 열었으니, 이제 라이칸만 남았어. 지금 개방되는 사문이 막히면 반토레온은 다른 사문을 찾아야겠지만.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희부터 붙잡은 거야. 약속에 방해되지 않도록 잠시 치우려고. 우리는 어서 자유로워지고 싶거든.”
아무렇지 않게 중요한 정보를 늘어놓는 모습에 아드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히스릴의 진정한 의도가 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너는 누구 편이냐.”
“오직 내 편이지. 약속만 끝나면 사문이 어떻게 되든 관여할 생각 없어. 옛 왕의 군세에 합류하지도 않을 거고. 뭣하면 대륙의 편에 서도 좋아. 이렇게 정보를 주는 것도 그런 마음의 발로지.”
“이따위 짓을 벌이고도 그런 마음이 드나?”
아드리안과 마울러는 사태의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다만 대충 파악한 것만으로도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다는 것은 인지했다.
죽음의 문으로 인해서 인간과 수인에게 배신의 선택지가 생겨, 언데드 군세에 대항해야 할 로니아 왕국과 하부 수인 부족의 병력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횃불에 드리운 그림자가 아드리안을 가렸다.
“우린 이상만 추구하면 되잖아.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간에.”
“미친년.”
“너는 안 그런 척하긴. 초월자가 다 그런 거잖니? 그런데 너도 입이 꽤 거치네.”
히스릴이 아드리안 몫의 스테이크를 들어 사납게 씹어 먹었다.
“자꾸 그렇게 떠들면 입 막아 버린다?”
초월자에게 협박은 대부분 역효과다.
오히려 성질을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다.
아드리안이 으르렁거렸다.
“아가리 닥쳐.”
텁.
히스릴의 입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아드리안의 입가를 포갰다. 강제로 혀가 뒤얽혔다. 아드리안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우지직.
당장 혀를 끊어 버릴 듯이 깨물었으나 히스릴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드리안의 목덜미를 잡아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꿀꺽, 꿀꺽.
알맞게 씹힌 고기가 달콤한 침과 함께 목 안으로 넘어갔다.
푸하─
겨우 머리를 비틀어 벗어난 아드리안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이, 이, 이런 정신 나간 년이……!!”
“넌 쟤하고 다르거든.”
히스릴이 입가를 매만지며 깨문 자국이 남은 혀를 머금었다.
피 맛이 진하게 났다.
“진즉에 깨져야 했을 그릇인데…… 전혀 흘러넘치지 않았다니. 오히려 그릇이 가늠할 수 없이 커진 느낌. 역겨워야 하는데 역겹지가 않아. 너 같은 초월자는 처음이야.”
“죽여 버린다……!!!”
“뭐로 죽일 건데? 그 입으로?”
“큽……?!”
자신보다 더한 광기에 밀린 아드리안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한참을 웃은 히스릴은 다시 접시에 고기를 내려놓고는 아드리안 앞까지 밀어 주었다.
“새로운 소식 하나 알려 줄까?”
아드리안의 귀에 입을 갖다 대다시피 거리를 좁힌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기를 이용하여 마울러에게 들리지 않도록.
“동대륙 남부에 거대한 존재감이 나타났어.”
아드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주군?’
히스릴이 덧붙였다.
“익숙하면서도 생소해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초월자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겠지. 공간 이동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인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하, 역시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니까.”
“…….”
“먹고, 느긋하게 회복해. 뭐, 대충 걸을 수 있을 정도로만.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히스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보아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할 상대가 아닌 것 같거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한껏 어지러워진 감옥을 나섰다. 무거운 적막감에 속에 잠긴 아드리안은 들뜬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께서 복귀하신 게 틀림없다.’
순수한 직감이다.
‘가장 먼저 주군을 환영해야 할 내가…….’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자괴감에 격한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감정을 억누른 아드리안이 히스릴이 나간 문 쪽을 응시했다.
‘주군께서 깨어나셨다는 건, 8위계에 오르셨다는 뜻. 하지만 상대도 그냥 초월자가 아니다.’
델하룬의 여제.
수왕 살해자.
3세기 전 이종족 전쟁의 원인.
히스릴이 직접 정체를 밝힌 적은 없지만 그녀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는 정보는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검술 일부를 경험하기도 했다.
고대 초월자들의 영혼으로부터 힘을 얻은 드라벤 르마르크가 보였던 특유의 검술…… 그 주인이 바로 히스릴이었다.
‘또한 동쪽의 대제, 라이칸 투르가르드와 광명의 대재해, 반토레온 로드 타라니스까지. 여제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 둘은 이곳에 없는 모양이지만 확신할 단계는 아니다.’
고대의 초월자가 다수.
위험하다.
혼자서 상대할 만한 전력이 아니다.
‘주군을 도와야 한다……!’
쿵.
아드리안이 앞으로 엎어져서 그릇에 남은 고기와 야채를 먹어 치웠다. 그와 다르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고문을 당한 마울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 맞추니까 입맛이 도나?”
“가레스 시릴리아드.”
아드리안이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그에게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탈출한다.
“그니까 무슨 수로…….”
마울러는 여러모로 할 말이 많다는 듯 표정을 씰룩거렸지만, 결국 아드리안의 시선을 피하며 혀를 찼다.
“알았다.”
* * *
기반 시설이 완전히 무너져 시체의 산과 함께 지워 버린 로셀라 근처의 산꼭대기에 베르덴이 새로운 중추 신호기를 설치했다.
통신 조작을 반복해서 조작하던 그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이 받질 않는군.’
신호 자체가 가는 걸 보아 통신 장치는 멀쩡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당장 통신을 연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듯하다.
차례대로 로니아 왕국에 파견된 에온의 일원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통신 장치가 망가지거나 전용 마석의 마력이 다 닳았는지…… 그레이브가 있는 서쪽에서 응답이 오지 않았다.
북쪽에 있는 카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쿵……!! 쿠쿵……!
통신 장치가 연결되자마자 그 너머에서 격렬한 소음이 들려왔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폭음과 굉음에 뒤섞인 채 그의 귓가를 스쳤다.
전투 중인가.
“카브렐.”
베르덴이 가장 먼저 연락받은 에온의 마법사의 이름을 불렀다.
“위치를 보고해라.”
* * *
콰아앙───!
투석기가 쏘아 보낸 바위가 착탄하며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뒤이어 날아온 리치의 화염계 마법이 숲을 불태웠다.
“또 놈들의 지원군……! 끝이 없군!”
“라우니크 후작이야! 후작이 우릴 배신했어!”
“스, 스켈레톤 기병들이 옵니다! 어떻게 합니까! 대응하나요?! 생존자들은요?”
“수가 너무 밀리네! 맞섰다간 결국 궤멸이야! 생존자 구출은 포기하고, 북쪽! 북쪽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네!”
모험가, 로니아 왕국의 기사, 귀족, 용병 등 싸울 줄 아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구출대가 군마를 타고 이동하다가 속도를 늦췄다.
도중에 합류하기로 했던 후작이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시발, 저렇게 구차하게 살아남고 싶나?!”
아군이었던 인간이 한순간에 언데드로 변하는 형국이다. 배신할 건가, 저항할 건가. 그들의 마음속 선택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카브렐 경! 어떻게 합니까! 결정을!”
에온의 마법사인 카브렐이 이 구출대의 지휘를 맡았다. 에온의 상징이 새겨진 그의 로브에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한데 카브렐은 판단을 내리기는커녕 손목에 입을 대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예…… 예…… 생존자를 구하려고 하는데 왕국의 귀족이 배신을…… 예…… 로셀라와 가깝습니다, 근데 로셀라는 린텔 백작이란 배신자에게 점령을 당해서 언데드의 소굴이…….”
“카브렐 경?”
“아…… 이미 로셀라를 파괴하셨다고……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카브렐 경?!”
소사이어티 출신 카브렐이 갑자기 손목을 아래로 내리더니 목청을 높였다.
“전군! 남하한다!”
“예?!”
“남하라고? 자살이라도 하자는 건가?! 로셀라를 빼앗기면서 거긴 마굴이 됐네!! 놈들이 쌓은 시체의 산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고!!”
“남쪽으로 최대 속도로!!”
카브렐은 모두의 만류에도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고집했다. 이상한 일이다. 정신계에 당한 걸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남쪽에 뭐가 있길래 이러는 거예요!”
“뭐가 있냐고? 하하하하하하하!”
불과 십수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거대한 화염 폭발이 일었다. 강탈당한 비행정에 탑승한 고위 리치의 등장이었다.
하늘로 솟구친 흙과 먼지가 절망의 소나기처럼 떨어졌지만 카브렐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