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987

987화 계명 심판 (1)

부러진 칼날이 라테온의 목을 반쯤 관통했다.
평범한 날붙이가 아니다.
생명을 배척하는 힘이 느껴진다. 이렇게 농도가 짙은 사기는 드라벤 르마르크와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이후로 베르덴도 처음이었다.

‘간신히 급소를 빗나갔다.’

음험하기 짝이 없는 검신이 기도와 식도 사이에 꽂혔다.
운이 좋아서는 아닐 것이다.
라테온 정도의 실력자라면 찰나에 머리를 비틀어 즉사를 면했으리라.

‘……하지만 그뿐이군.’

베르덴이 손끝으로 라테온의 관통 부위를 가볍게 짚었다.
통찰력과 감각이 상태를 관조했다.

쇠붙이에서 뻗어 나간 기운이 라테온의 척수를 깊게 파고들었다. 감염되기라도 한 듯 신경 다발이 해당 지점에서부터 죽어 있다.
신경의 끝부분은 살아 있었지만 척추와 신경계 대부분이 생기를 잃었다. 머지않아 남은 신경마저도 죽고 말겠지.
장기는 그다음 차례가 될 터.

무작정 칼날을 빼내면 뇌간과 혈관 등이 그대로 뽑혀 나와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쓰기도 전에 숨을 거둘 것이다.
카인이 라테온을 치료하지 못하고 현상 유지 하고 있던 이유다.

신체 결손을 복구하는 회복력이라고 해도 명줄이 단 한 번이라도 완전히 끊어져 버리면 다시는 되돌리지 못한다.

결국 원인을 제거할 수 없으니 무슨 수를 써도 미봉책에 불과했다. 사기에 침식당하는 라테온의 생명력은 얼마 남지 않았다.

“라테온 씨가…… 저를, 지키려다가…….”

카인이 순간 비틀거리다가 이내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틴폴드의 희망이 된 이후로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카인은 초월자가 아닌 인간이다.
단련을 거듭했더라도 어느 정도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체력이 떨어진다. 방심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그의 정신력을 갉아먹기도 했다.

지휘를 받는 언데드 군세와의 혈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르덴의 복귀에 긴장이 풀린 카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이 가진, 생명력으로, 잠시 사기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칼날 때문에,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카인은 라테온을 치유할 수 있는지 확답을 듣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없다.

“치료가, 가능할까요. 선배?”

베르덴에게는 전설의 엘릭서가 있다. 그걸 쓰면 라테온은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나 엘릭서는 제한된 비장의 수단이다.
그 가치를 이해하기에 카인은 엘릭서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본심은 엘릭서를 써서라도 라테온을 살리고 싶었다.

동료니까.

“엘릭서도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과 마찬가지로 죽음 자체를 막을 순 없다. 사기가 이미 라테온의 몸 전체에 뿌리를 내렸어. 그걸 특정해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지.”
“그렇, 습니까.”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물론 예전이라면.”
“예전.”

카인은 넋 놓고 있다가 그제야 베르덴이 어째서 자리를 비웠는지 깨달았다. 칠흑에서 잿빛으로 변한 로브가 펄럭였다.

“8위계…….”

베르덴의 고유한 마력의 색채가 라테온의 병실을 검붉게 물들였다.

<파멸>

라테온의 생명을 앗아 가는 검신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기가 육신을 파고들었다고 한들 육체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몸이 썩든 어떻든 라테온이라는 존재는 변질되지 않는다.

라테온 오프니엘을 온전히 인식.
라테온 오프니엘을 제외한 모든 요소를 이물질로 판단.

추상(抽象)의 명확한 구분.

무한에 이어 파멸의 개념까지 통달한 베르덴의 힘과 직관은 물리적인 영역을 초월한 관념의 층위에 도달했다.

끼긱, 끼기긱.

부러진 칼날이 마도를 견디지 못하고 비틀리더니 이내 괴성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윽!”

카인의 정신계가 흔들렸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지만, 베르덴의 공간 지배에 장악당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못했다.

“발악을.”

베르덴이 검신을 붙잡았다. 라테온에게 파멸이 스며들었다. 신체의 결손 없이, 오직 그를 괴롭히는 죽음의 기운만이 근원부터 무너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라테온에게서 번쩍이는 검붉은 광채가 나와 카인의 벽안에 반사됐다.

“검신이……!”

콰드드드득!

기분 나쁜 칼날이 으스러지다가 곧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라테온의 목에 남은 자상에서 깨끗한 피가 흘러내렸다.

촤아아악!

아공간에서 농도가 옅은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꺼내 들이부었다.

‘이걸로 치료는 끝.’

이제 곤히 잠들어 있는 라테온의 의식을 깨우기만 하면 된다. 베르덴은 부분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에게 말했다.

“출세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내면을 향한 목소리.

“일어나라, 라테온 오프니엘.”

라테온이 번쩍 눈을 뜨더니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추, 출세!”

크게 숨을 몰아쉬던 라테온이 아차 하며 자신의 목 근처를 더듬었다. 피부만 만져졌다. 투구와 갑옷 사이로 칼날이 꽂힌 뒤 카인과 함께 도주한 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살았나?”
“정신은 무사하군.”
“음?”

뒤늦게 베르덴의 존재를 알아챈 라테온이 화들짝 놀랐다. 짝! 주저 없이 자기 뺨을 후려친 그가 통증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꿈이 아니군요. 폐하께서 복귀하셨다는 건…… 그 경지에 도달한 겁니까?”
“성취는 이뤘다.”
“허.”

라테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흘리며 입가를 당겼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하하하하하하!”

자신이 유일하게 윗분으로 모시는 존재가 한층 더 강해졌다. 안 그래도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이 더한 괴물이 되었다.

웃지 않을 수 없다.
숭고한 충성심이 샘솟는다.

라테온의 배경은 대부분의 사람이 감히 겸상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라테온은 8위계 초월자의 왼팔(예정)이다.

“다행, 입니다.”

……툭.

라테온의 회복을 끝까지 지켜본 카인이 안도하며 정신을 놓아 버렸다. 잠에 든 것이다.
베르덴이 쓰러지는 카인의 목덜미를 잡아 어깨에 올렸다.

“생존자들을 통솔하며 심신에 피로가 한계까지 쌓인 모양이다. 모두가 카인을 틴폴드의 희망이라고 부르더군.”
“희망이라.”

로니아 왕국 상황이 어떤지 대충 아는 라테온이 피식 웃었다.

“통치도 모르는 녀석치고는 제법이군요.”
“내 후배니까. 너보다 서열이 높기도 하고.”
“…….”

베르덴이 발걸음을 돌렸다.

“막 깨어났으니 아직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겠지. 잠시 시간을 줄 테니 보고할 준비를 갖춰라.”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베르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있던 라테온이 코끝을 씰룩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슬쩍 갑옷을 들췄다.

목에 박힌 칼날 때문에 전쟁 무구를 섣불리 벗길 수 없었던 터라 죽어 가는 그의 청결을 꼼꼼히 돌보기 어려웠다.

“고약하군.”

전쟁의 냄새…….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맡아 본 악취에 라테온이 갑옷의 고정 장치를 해제했다. 그렇다. 아직 로니아 왕국에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터엉!

라테온에게서 떨어진 전쟁 무구가 바닥에 닿으며 묵직한 금속음이 퍼졌다.

* * *

평소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카인도 신경질을 부릴 만큼…… 카인은 그동안 축적된 피로감만큼이나 깊이 잠에 빠졌다.

꿀꺽, 꿀꺽.

냉수로 몸을 씻고 가벼운 튜닉을 걸친 라테온이 와인을 병째로 들이켰다. 베르덴의 아공간에 보관된 최고급 육포가 한 움큼씩 사라졌다.

“후, 이제 허기가 좀 가시는군요.”
“얼마든지 있으니 필요하면 말하도록. 그럼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칙칙한 구름이 몰려온다.

그들은 거리가 훤히 보이는 창가를 옆쪽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아드리안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이 너라고 들었다.”

먼저 라테온을 찾은 것은, 그의 상태가 위중하기도 하지만 실종된 아드리안의 마지막 행적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라테온은 잠시 눈을 감고 당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베르덴은 우선 대략적인 상황부터 듣고 핵심만을 추려 <기억 공유>를 시전할 생각이었다. 모든 기억을 살펴보는 것보다 이편이 효율적이므로.

“그 여자의 짓입니다. 아마 로니아 왕국을 이렇게 만든 것 또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그렇게나 미모가 뛰어난 여인은 라테온도 살면서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주관적으로 말해서 이자벨라와 동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여자를 두 번째로 본 건 ‘라벤홀트’였습니다.’

라벤홀트(Ravenholt).

이는 로니아 왕국의 수도이자…… 이번에 에온의 계명 심판을 집행하는 작전 지역이었다.

이야기는 수십 일 전으로 돌아간다.

* * *

사태가 발발하기 전…….

이데라트 연맹국에서 진상 조사회가 진행되었고, 이후 배신자 찾기가 시작될 때 라테온은 바다를 통해 로니아 왕국에 잠입했다.
계명 심판을 맡은 카인, 라테온, 그레이브는 각자 다른 루트를 이용했다.

역할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라테온은 길잡이였고, 카인과 그레이브는 수하들을 대동하여 그 길을 따라 왕국 수도로 향하는 본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통신 장치가 멀쩡히 작동했으니 연락 체계는 문제없었다.

부우우───

선단에 선 라테온의 시야에 항구 도시 벨포트가 드리웠다. 갈매기가 까악까악거리며 교역선 주변을 맴돌았다.

‘오랜만이군. 이곳도.’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여행객처럼 짐을 챙기고 하선했다. 이목을 사로잡을 전쟁 무구는 그레이브가 챙겨 올 예정이었다.

바닷바람을 만끽하며 걷고 있자 낯익은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로 살아 있었다니.”

정갈스럽게 걸어온 사내가 중절모를 벗으며 가슴 위에 얹었다.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전쟁의 흉터가 눈에 띄었다.

“잘 지냈나, 라테온 경.”

라테온은 그리움이 묻어난 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잘 지내지 못한 것 같군, 발렌 경.

로니아 왕국 기사, 발렌.

라테온과 함께 하부 수인 부족과의 분쟁 지대에서 싸웠던 동료이자…… 훗날 국가 반역자가 된 라테온을 목숨을 걸고 숨겨 주고, 무역선에 몰래 승선시켜 왕국 밖으로 빼낸 전우(戰友)였다.

* * *

방음이 철저하게 된, 부유한 귀족을 위한 어느 술집의 밀실에서 라테온과 발렌이 재회를 기념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자네를 실은 배가 중앙 대륙으로 떠난 이후…… 자네가 잘 살기를 바랐지만, 솔직히 자네가 잘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네. 성격이 워낙 굳세니. 타협하지 않으면 오래 살기 어려운 세상이잖나.”

라테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타협하는 법을 배웠지.”
“순탄치 않았겠군.”

발렌은 이미 수년 전 일선에서 물러나 라우니크 후작 가문의 기사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도 험한 전쟁터에서 굴러먹던 사내인지라 눈썰미가 제법 있었다.

대략 13년 만인가.

안 본 사이에 라테온의 경지는 발렌이 가늠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듯했다. 근육의 질이 이전과 비교도 안 된다.
기 또한 마찬가지겠지.
그동안 어떤 전투 경험을 쌓았는지 듣지 않아도 피비린내가 풍겼다.

“후우.”

발렌이 반쯤 마신 술잔을 쓸었다.

“라테온 경…… 내가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했던 말, 기억하나?”
“기억하네.”
“다시 로니아 왕국으로 오지 말라고 했었지. 전부 잊고 살라고, 여기서 있었던 모든 일을 그저 악몽으로 흘려보내라고.”

그가 물었다.

“그런데 왜 돌아온 건가. 이 나라에.”

라테온은 에온의 정보관을 통해서 과거의 전우와 연락을 취했다. 페일의 수완이었다. 로니아 왕성 깊이 침투하려면 반드시 고위직과 연관된 내부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복수 겸 일이랄까.”

발렌은 그런 조력자로서 적임이었다.

다만 접선만 요청했을 뿐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발렌을 설득하는 일은 당연히 라테온의 몫이었다.

“복수……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악몽에 갇혀 사는가. 자네가 강해졌어도 상대는 한 나라일세. 개인이 어찌할 수 없다는 건 예전에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나.”
“집단의 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뿐만이 아니네. 로니아 왕국은 최근 초월자의 권역으로 편입됐다고 하네.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나, 어쨌든 왕국의 힘은 더 강해졌어. 전처럼 혼자서 반역이라도 일으켰다가는 도시 하나 어쩌지 못하고 더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겠지.”

발렌은 지극히 상식적인 범주에서 생각하며 라테온을 만류했다.

“오랜 복수심에 사로잡혀 아까운 인생을 버리지 말게.”
“하하하하, 자네는 과거에 비추어 나를 대하고 있군, 발렌 경. 내가 그리 어리숙해 보이나? 자네는 이 내가 진정으로 이룰 수 없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러 온 병신으로 보이나?”

라테온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단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소리는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말했을 텐데. 복수 겸 ‘일’이라고.”
“일이라면…….”
“존엄성을 무시하는 부패한 로니아 왕국에 심판 명령이 떨어졌네. 로니아 국왕에 대한 즉결 처분권도 내 손에 있지.”

발렌이 눈을 부릅떴다.

“구, 국왕을 처분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권한이 존재할 리가…….”

정적이 가라앉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발렌은 지금도 눈썰미가 예리한 편이었다.

“자네, 어떤 거대 권력을 등에 업은 건가.”
“에온.”

술병이 기울며 발렌의 잔을 채웠다.

“군림자로서 베르덴 폐하를 모시고 있네.”

라테온은 오랫동안 본명을 드러내지 않고 중앙 대륙에서 활동했다. 로니아 왕국의 혹시 모를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중앙 대륙 4강의 군림자.
에온의 위상.

그제야 라테온의 진정한 신분을 알아차린 발렌의 입이 벌어졌다. 단숨에 표면이 찰랑거리는 술을 입에 들이부은 그가 진이 다 빠져 버린 듯 소파의 등받이에 기댔다.

“라테온 경…… 어, 어마어마하게 출세했군.”
“아직 멀었네.”

다시 잔이 채워졌다.

“하지만 사실상 포기했었던 숙원은 마침내 바로 눈앞에 다가왔지. 나는 감정에 치우친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생각이 추호도 없네.”

라테온이 고개를 숙였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라우니크 후작 가문의 기사단장인 자네의 힘이.”
“……역시.”

발렌이 노기를 드러냈다.

“난 라우니크 후작가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한 기사네. 아무리 후작가가 버러지 같다고 해도 기사는 기사. 라테온 경, 자네는 내가 맹세를 저버린 기사가 되기를 바라는 건가! 과거 자네의 부대가 내 목숨을 구해 주었던 은혜는 이미 갚지 않았나!”
“발렌 경.”
“물론 농담일세.”

발렌이 언제 그랬냐는 듯 껄껄 웃었다.

“자네의 청을 거절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겠지.”
“무리한 부탁인 걸 아네. 그래도 기사로서 맹세를 저버리는 건 중대한 문제니까.”
“괜찮네. 후작가에 새로이 기사 서임할 때 절차를 따르지 않았거든. 후작가가 귀찮다고 기사들을 몽땅 불러 모아 도매하듯 서임하길래 맹세 선언할 때 입만 달싹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쓰레기 같은 후작가에 내 충성을 바치기에 아까워서 말이야. 후작가의 제안을 아예 거절했으면 좋았겠지만, 난 자네처럼 용감하지 못했지.”

라테온이 고개를 저었다.

“국가 반역자를 도운 자가 용감하지 않으면 누가 용감할까.”
“전우를 구하지 않고서 어찌 군인이라고 할 수 있겠나.”

서로의 술잔이 부딪쳤다.

“그보다 자네가 충정을 바칠 사람을 다시 찾게 될 줄이야. 어떤가? 이번에는 제대로 찾았나?”
“후회는 없네. 후회할 일도 없고.”
“기사로서 부러울 뿐이네.”

웃음소리가 번졌다.
술병이 계속해서 늘어 갔다.

“로니아 왕국을 향한 존엄 심판! 허허허, 이만한 임무를 맡다니. 라테온 경, 자넨 폐하께 신임을 받는 모양이군.”
“뭐, 그렇네. 엄연히 말하자면 최측근이라고나 할까. 베르덴 폐하께서 나를 영입하기 위해서 몸소 찾아오셨었지.”
“초, 초월자께서 자네를……?!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응? 술 한잔 따라 줌세.”
“여느 때처럼 주인 없는 땅에서 군림하던 어느 날이었지…….”

라테온은 자신의 왕성에 찾아온 베르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진정한 출세란 무엇인지 전우에게 이야기했다.
물론 베르덴에게 검기를 휘둘렀다가 처맞은 건 빼고 말했다.

* * *

발렌의 조력을 이끌어 낸 라테온이 밤이 드리운 항구로 나왔다. 술기운 따위야 라테온의 몸과 정신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과연 어떻게 될까.’

라테온은 발렌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13년의 간극은 크다. 발렌이 그를 배신할지도 모른다. 정보관의 우려였다. 그래서 이미 그때를 대비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등등의 계획이 준비되어 있다.
물론 발렌이 도와준다면 계획은 확실히 순조로워지리라.

만일 발렌이 불온한 조짐을 보일 경우 라우니크 후작가에 소식이 채 닿기도 전에 라테온에게 정보가 전해질 것이다.
라테온이 모르는 정보원들이 로니아 왕국 곳곳에 존재했다.

‘정보관 페일…… 리비안트 공국의 그레이에서 굴러먹던 정보상이라고 들었는데, 괜히 폐하께서 데려온 자가 아니군.’

라테온이 밤바다를 보며 상념에 잠겼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 속엔 로니아 왕국 시절의 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

로니아 왕국은 썩어 빠졌지만, 그래도 나고 자란 고향이기에 라테온은 마음을 다해 한 명의 기사로서 충성을 바쳤다.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자 했다.
한때는.
성격적으로 유연함은 부족했지만 실력과 재능이 있어 분쟁 지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고, 선임 기사가 돼 아홉 명의 기사를 이끌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했다.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부하를 잃을 때도 있었지만, 그 슬픔마저 딛고서 전장을 누볐다. 하부 수인 부족은 라테온이란 기사를 예의 주시했다.

이윽고 전선에 등장한 하부 수인 부족의 족장 중 한 명을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라테온은 휘하 기사들을 지휘해 은밀하게 길을 우회하여 적진 깊숙이 돌입했다.

본진으로 돌아가는 족장을 기습해 숨통을 끊고 상부에서 준비한 퇴각 경로로 몸을 빼내는 작전부의 계획이었다.
마침 비바람이 불었던 터라 냄새로 발각될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함정이 있었다.

라테온의 부대가 분투해도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수백 명의 수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이 숫자라니. 저희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족장이 세, 셋? 안 돼. 도, 도망쳐야 해요! 젠장, 도주로가 없어! 드윈이 당했습니다. 스티…… 스티네!!! 이 짐승 새끼들이!!!!! 으아아아아아! 죽기 싫어…… 개시발, 죽어도 혼자는 못 죽지! 어머니, 아버지. 정신 차리십시오, 대장님. 이제 저희 셋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까 당한 상처가 안 좋아서 같이는 못 가겠군요. 당신도 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죽을 줄 몰랐지만 그래도 딱히 후회는 없습니다. 아하하. 라테온 대장님, 대장,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풍덩.

이미 지쳐 버린 라테온은 가벼운 손길에 떠밀려 절벽에서 추락했다. 밑에는 폭우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겨난 강이 굽이치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절단된 부하들의 머리였다.

천운이었을까.

라테온은 로니아 왕국 진영에 속한 분쟁 지대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하류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축축하고 너덜거리는 욱신을 이끌고 군영으로 복귀했다. 만약 전멸에 대한 죄를 묻는다면 기꺼이 대가를 치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휘관들이 모인 작전실에 들어가기 직전 참극의 진상을 이해했다.

───하하핫, 드디어 라테온이 죽었군. 목 안에 박힌 가시가 내려가는 기분이야.

───라테온과 함께 보낸 기사들이 아깝기는 합니다. 예정대로 저희 부대에 편입되었으면 이용 가치가 많았을 텐데.

───그래서 아버지가 자네들에게 섭섭하지 않게 챙겨 주지 않았나. 수인들에게도 두둑이 받기도 했고 말이야.

고위 귀족 가문의 차남인 상관이 주도하여 하부 수인 부족에 상당히 비싼 값으로 라테온을 팔아먹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라테온이 싫기도 했지만 결국엔 귀족 사회의 뜻이었다.

라테온은 평민 출신이니까.

귀족들은 라테온 같은 자들의 신분 상승을 항상 경계했다. 사다리를 확 걷어차야만 자신들의 권력과 이권을 보존할 수 있으니.

───하하핫! 그렇긴 합니다. 그나저나 내기의 결과는 어떨까요. 라테온 부대가 오래 버틴 걸 보아 이쯤에서 죽었을 것 같은데. 이거 아무래도 제가 이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쯧! 아깝군, 아까워……! 쓸데없이 명줄이 끈질겨서는. 안 그렇소?

죽은 부하들은 라테온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별 의미 없이 죽임을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작전부에서는 라테온 일행이 대충 어디쯤에서 몰살당할지 추측하며 거금을 내걸고 내기했다.

───음?! 지휘관이 계시는데 누가 문을 이리 세게……! 어? 라테온?

───죽여 주마.

라테온은 상관의 검을 단숨에 빼앗아 작전실에서 날뛰었다. 문이 닫혔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피와 시체 조각이 난무했다.
작전부의 참사를 뒤늦게 눈치챈 병사들이 움직였으나 라테온 한 명을 막지 못했다.

라테온은 귀족 지휘관의 머리를 챙겨서 군마를 타고 놈의 가문으로 직행했다. 단신으로 기사단을 참살한 그가 가주와 후계인 장남의 목까지 베어서 죽은 부하들에게 바쳤다.
로니아 왕국의 지체 높은 백작 가문 하나가 그렇게 사라졌다.

상관 살해자.
귀족 참살자.
국가 반역자.

왕국 최악의 범죄자가 된 라테온은 추적자들을 패퇴시켰다. 왕실의 수배령이 떨어졌음에도 그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우리가 바친 충정은 어디로 갔는가!!

하지만 중과부적이다.

피로와 부상이 쌓이며 라테온은 궁지에 몰렸고, 곧 잡힐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이 바로 발렌이었다.
발렌과 라테온은 서로 다른 부대였지만 그들은 몇 번이나 같은 전장에서 싸우며 빌어먹을 사선을 넘어왔다.

───다시는 왕국으로 돌아오지 말게! 라테온 경, 전부! 전부 잊어버려! 비극에 매달리지 말고 전부 악몽으로 흘려보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발렌은 전 재산을 바쳐서 구입한 최상급 포션과 함께 중상을 입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라테온을 화물 상자에 넣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잘 지내게, 전우여.

그렇게 라테온은 중앙 대륙으로 가는 무역선에 실려 목숨을 건졌다. 발렌이 아니었다면 라테온은 이미 처형당했으리라.

이후로 라테온은 용병으로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었고, 주인 없는 땅으로 가 서쪽 영주들을 정리하고 권력과 땅을 얻었다.

발렌이 조언한 대로 복수심을 잊으려 노력하기는 했다. 병사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로니아 왕국을 치는 일은 불가능했다.
국제 사회가 라테온을 두고만 보지 않을 테니까.

그 대신 라테온은 로니아 왕국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충성을 배신당한 기사로서 충성을 바칠 만한 국가를 바랐기에.

그렇게 라테온 오프니엘은 ‘군림자’가 되었다.

하지만…… 신이 그를 저버린 것은 아닌지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말았다. 라테온은 기어이 정당성과 힘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겨우 여기까지 왔다.”

우드득.

악력에 난간이 우그러졌다.
희열이 차올랐다.
라테온은 로니아 왕국을 이따위로 만든 자들의 심판자였다. 살이 뒤룩뒤룩 찐 로니아 국왕은 그의 손에 폐위당하리라.

“……음?”

밤거리를 깨우는 말발굽 소리에 라테온이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잘 훈련되어 보이는 말 여덟 마리를 한 마차에 묶어 질주하고 있었다.

“걸어가기 귀찮았는데 제법 빠르네. 수도까지 금방 가겠어.”

여인이 마차 안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라테온 바로 옆을 지나쳤다. 거센 바람에 라테온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뭐야, 저 미친년은.”

라테온은 잠시 제자리에서 여인의 마차가 지나간 길을 응시했다.
순전히 마부를 맡은 그녀의 미모가 잘못 봤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고, 또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 여식인가…… 얼굴이 아깝군.”

라테온은 혀를 차며 관심을 거두었다.

어째서 로니아 왕국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림낙스 간부진 암살.
로니아 왕국을 향한 계명 심판.

임무에 집중할 때다.

라테온만이 아니라 에온의 간부도, 다른 마탑도 로니아 왕국에서 움직이고 있다. 본격적으로 왕국 수도에 침입할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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