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8화 계명 심판 (2)
로니아 왕국의 뿌리, 라벤홀트.
십수 년 만에 고향의 수도에 발을 디딘 라테온이 뒷골목으로 향했다.
지금 세상이 뒤숭숭하기도 했지만, 특히 오늘은 왕실이 사교회를 주최하는 날이라 평소보다 수도의 경비가 삼엄했다.
하지만 아무리 경비에 집중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허점이 있다.
유동 인구가 많아 일일이 검문할 여유가 없었고. 이 왕국은 부패한 나라에 어울리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귀족의 권위가 막강해 사람들이 눈치를 너무도 많이 본다는 것이다.
경비병들은 문책이라도 받을까 봐 두려워 시간을 핑계 삼아 귀족 관련자들이 제시한 신분을 자세하게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몰라봤다고 역정을 내고, 무례하다고 존엄성을 짓밟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달칵.
라테온이 뒷골목의 오래된 건물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전원 도착했군.”
카인과 그레이브를 포함하여 에온의 계명 집행 부대 16인이 집결했다. 여기서 라테온까지 더하면 17인이었다.
“이걸로 전부 모였군요.”
“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전원 도착했군? 누가 들으면 네가 대장인 줄 알겠어.”
“크흠.”
그레이브가 툭 던진 핀잔에 무안해진 라테온은 괜히 헛기침했다.
상명하복.
그레이브는 일곱 번째 위상이고, 라테온은 열 번째 위상이다. 상위 서열을 존중해야 했다. 애초에 서열 정리를 제안한 것도 라테온이었으므로.
“어쨌든 낙오자 없이 다 모였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레이브가 라벤홀트 왕성 내부도와 시가지 지도를 차례로 짚었다.
“라테온, 정보관들이 네 전우가 제공한 기밀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황금의 죄인이 운영하는 리켄티아 상회와 마탑들이 독자적으로 확보한 정보와 맞물리는 부분이 많았지. 실제로 여태껏 틀린 부분이 없기도 했고.”
라우니크 후작가는 로니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바닥에서 명문가로 거듭나려면 국왕의 입김이 있어야 했다.
후작가는 왕실의 은밀한 일을 처리해 주며 입지를 다져 왔다.
발렌은 정확히 교국 습격 사태 이후로 후작가가 왕실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았는지 최대한 파악하여 라테온에게 전달했다.
라테온이 요청한 대로 말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기사단장으로서 알고자 하면 알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간에 공표되지 않은 왕실과 고위 가문들의 세부 일정을 공유해 주었고, 각지에서 며칠 동안 지켜보면서 확인한 결과 정보의 신뢰도는 분명했다.
말인즉슨 최소 며칠 동안 왕국 수뇌부가 에온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이 멸망하고 나서 얼마 뒤 합법과 불법을 통틀어 국외에서 상당한 양의 최상급 마석이 로니아 왕국에 반입됐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비정상적인 수치야.”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기술이 평균에 불과한 나라에 그렇게 많은 최상급 마석이 필요할 리 없습니다, 심지어 마석 가격이 근래에 가장 비싼 이 시점에.”
“게다가 라우니크 후작 가문이 불법 노예로부터 피를 뽑아 저장했다. 대량의 혈액팩과 최상급 마석, 젠티르 마탑에서 추적해 전부 라벤홀트로 운송된 걸 확인했지. 이것들을 재료로 이용할 만한 건 아티팩트 외에는 없을 터.”
아티팩트에는 상식을 벗어난 기상천외한 물건도 존재한다. 그중 자연에서 탄생하는 천연 아티팩트가 대표적이었다.
탁.
지팡이를 짚는 소리가 들렸다.
“즉, 로니아 왕국이 보유한 모종의 아티팩트와 로니아 왕국에서 포착된 그림낙스. 그 둘이 연관되어 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네.”
전직 흑요 등급 모험가이자 뒷세계의 브로커인 세를로 브로던이 걸음을 옮겼다. 주검의 영광이 남긴 허울뿐인 혈맹을 내부에서부터 장악한 다음에 로니아 왕국에 입국했다.
세를로는 정보 수집 및 공작 등 계명 집행 부대의 지원을 맡았다.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디아문 마탑의 르온 장로는 그림낙스 수장에게 암살당했고, 사태가 끝난 이후 그림낙스의 간부진이 로니아 왕국에서 은밀히 모습을 드러냈지. 그들은 불법 루트로 최상급 마석을 확보하는 데 일조했네. 멋도 모르고 이용당한 뒤 암살당한 음지의 조직이 한둘이 아니야.”
라테온이 팔짱을 꼈다.
“값을 치를 바에 죽여서 빼앗는 편이 효율적이긴 하니까. 하나같이 떳떳하지 못한 놈들이니 마음 놓고 죽여 버려도 탈도 없고.”
“마울러는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점조직 비슷하게 활동하는 그림낙스의 간부가 다수 집결했네. 여기 라벤홀트에. 그림낙스의 수장이 있다고 확정해야겠지. 난 그자가 모종의 아티팩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람낙스의 수장, 블라드.
극점에 다다른 암살자인 만큼 일대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러나 다수로 포위한다면 죽이지 못할 것도 없다.
집행의 우선순위는 이렇다.
첫 번째는 블라드.
두 번째는 로니아 국왕.
세 번째는 그림낙스의 간부들과 계명을 위반한 귀족들.
결과적으로 이 전부가 목표물이다.
“블라드는 필시 왕성 어딘가에 있을 걸세, 알 수 없는 아티팩트와 함께.”
“로니아 왕성 자체의 부지는 대륙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비대하니까. 왕성 내부에 비행정까지 정박해 있을 정도니. 역대 왕들의 과욕이지. 뭔가를 숨기기엔 거기보다 적당한 곳도 없을 거다.”
“그래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그레이브가 왕성 내부도 위에 그나마 블라드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들을 표시했다. 대전당의 정보관들이 내린 판단이었다.
“우리는 각 루트로 사교회에 잠입해 놈을 찾는다. 단독 행동은 금지. 이동할 때는 반드시 위상과 함께해라. 혼자서 블라드와 마주치면 방심하지 않아도 일순간에 목이 날아갈 테니.”
위상을 제외한 집행 부대원들이 일제히 기립하며 뜻을 받들었다.
“별개로 변수가 세 가지 있습니다.”
카인이 말했다.
“최근 통신 장치에 잡음이 심해졌습니다. 원인은 불명. 베타가 조사 중이지만 작전 실행 전에 해결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리고 공간 이동도 상당히 불안정하다고 하더군. 이 또한 원인은 불명. 전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다고 하니, 육로나 해로를 통해서 퇴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
“마지막으로는…….”
“배신자인가.”
이데라트 연맹국에서 열린 진상 조사회가 어떻게 끝났는지 전해 들었다. 사회에 인류의 배신자가 숨어 있는 듯하다.
“일단 이자벨라와 함께 간 에온의 일원엔 배신자가 없다던데.”
“에온이 신생 세력이라 미처 잠입하지 못한 건가. 어쩌면 베르덴 폐하를 경계해서 에온을 넘보지 못할 걸지도 모르겠어. 알잖아, 베르덴 폐하는…… 뭔가 좀 다르다는 거.”
“일리 있네.”
세를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 없는 땅에서 처음으로 베르덴을 맞닥뜨렸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식은땀이 났다.
아무리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베르덴 곁에서 배신의 비수를 품고 연기하는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할 짓이었다.
“당연합니다. 선배니까요.”
“그럼 외부인은…….”
모두의 시선이 벽 뒤로 향했다.
이번 작전에는 중앙 대륙에서 고용한 외부 조력자가 있다.
하지만 라테온은 그자가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출신, 짐승 같은 육체에 흐르는 피가 남과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위상들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통신 장치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연락과 관계없이 왕성에서 큰 소란이 벌어지면 내가 바깥에서 즉시 교란을 시작하겠네.”
세를로가 수염을 쓸었다.
“라리안 마탑, 보헤미른 마탑, 화산섬의 마탑, 젠티른 마탑, 헬리온 마탑이 제대로 된 걸 준비해 뒀더군. 역시 공작의 달인이랄까. 마울러를 향한 원한도 있겠지만 베르덴 폐하께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함이겠지. 수도를 최대 반나절 동안은 마비시킬 수 있을 걸세.”
“머리를 잡으면 팔다리는 알아서 힘을 잃게 될 거다. 그럼 슬슬 준비하지.”
라테온은 전신 갑옷, 검, 방패가 한 세트인 전쟁 무구를 챙겼다. 그는 발렌을 통해서 왕성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레이브와 카인은 다른 귀족 가문을 이용해서 사교회에 녹아들 것이다.
라테온이 벽 뒤를 향해 말했다.
“활약을 기대하지.”
“후우.”
수제 연초의 연기가 일렁였다.
“돈이 아깝진 않을 거다.”
흑호의 수인───중앙 대륙 4강의 검은 야수가 계명 집행의 조력자였다.
그는 세를로에게 고용되어 주인 없는 땅의 동부 대영주들을 홀로 쓸어버렸고, 남부 동맹에 고용되어 라테온과 싸우기도 했으며.
죽음의 죄인임을 드러내기 전인 레지날프에게 고용되어 유니아가 혈맹의 최고위 간부에게 고전할 경우를 대비한 지원책으로 활동했다.
받은 만큼만 일한다.
그것이 검은 야수의 철칙이었다.
세간에는 이런 소문이 돈다. 검은 야수는 수왕의 자식 중 하나라고. 그는 이 소문을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다.
* * *
쏴아아아아아───
젠티르 마탑에서 빌려준 아티팩트 [하늘피리]와 [벨라스트의 결정(結晶)]에 의해 한기가 서린 폭우가 쏟아졌다.
라리안 마탑의 아티팩트 [에코미르의 펜듈럼]의 진자가 규칙적으로 좌우로 움직이며 아티팩트들의 마력 반응을 왜곡했다.
귀족들이 신경질을 내며 하늘을 향해 불만을 내뱉었다.
축축한 건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왕실 사교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보좌하는 기사단도 제법 두꺼운 로브로 몸과 머리를 가렸다.
‘실패는 없다.’
라우니크 후작가의 마차에 몸을 숨긴 라테온은 최근 극한까지 끌어올린 전력을 여한 없이 내보일 작정이었다.
블라드는 거물이다.
놈을 죽이는 순간 그의 경지는 증명되고, 출세는 보장된다. 또한 로니아 국왕과 썩은 귀족들을 처단해 복수를 완성하리라.
덜컹덜컹.
로니아 왕실을 위한 제물이 실린 마차 행렬이 오르막길에 올라섰다. 곧 있으면 라벤홀트의 왕성의 성문에 도착한다.
발렌을 믿으며, 라테온은 끓어오르는 피를 겨우 억눌렀다.
세상은 혼란스럽다.
혼란이 클수록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심혈을 기울여 계획을 구상해도 예기치 못한 변수를 이기기는 어렵다.
누가 알았을까.
라벤홀트의 왕성이 무너질 거라고.
콰아아아아앙!
고막을 울릴 정도로 거대한 폭음이 수도 전역을 강타했다. 계획에 없던 상황에 라테온이 곧장 틈새로 밖을 바라봤다.
왕성의 중심지에서 날아간 건물의 잔해가 거주 지역을 파괴했다.
한순간 정적이 일었다.
직후 비명과 함성이 퍼졌다.
‘무슨…….’
라테온이 기감을 확장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사태 파악을 위해서 왕성으로 진입했다. 발렌도 뒤늦게 합류하려던 찰나에 소란을 틈타 마차에서 나온 라테온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라테온 경, 자, 자네가 말한 것과 많이 다른─”
“우리가 아니네.”
라테온은 소름 끼치는 존재감을 느끼며 왕성을 응시했다.
불길하다.
뭔가가 있다. 저 안에.
“발렌 경, 절대 들어가지 말게.”
“뭐?”
“일단 최대한 멀리 물러나게!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라테온이 통신 장치를 기동했다.
“작전 중지! 작전 중지! 라벤홀트의 왕성에 다른 불청객이 있다! 절대로 들어가지 마! 반복한다! 절대 들어가지 마라!”
───확인했…… 왕성 외부…… 대, 기 중입니다.
───무슨…… 불청객이라고?
───벌써 소란……? 교란은, 어떻게…….
잡음이 더 심해졌다.
“교란은 아직이다. 아직 교란하지 마!”
라테온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심한 듯 기를 운용했다. 모두가 관망할 순 없다. 누군가는 들어가서 확실한 진상을 알아내야 한다.
“각자 자리에서 대기하도록.”
“라테온 경!”
라테온이 로브를 집어 던지고 전쟁 무구를 착용한 채 질주했다. 반복되는 굉음에 본인 안위가 중요한 귀족들은 이미 도주했다.
그렇게 텅 비어 버린 성문을 통과하여 진원지로 도착했다.
‘이런 미친.’
주변 건물이 반파되었고, 땅은 뒤집어져 속살을 드러냈다. 곳곳에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다. 죽지는 않고 기절한 듯했다.
일부는 즉사했지만.
새삼 내부도를 떠올려 보니 이곳은 왕성 지하 및 지상의 보물고 근처였다.
‘왕실 기사단까지 당했다. 제대로 저항도 못 해 보고 경비 체계가 태반 이상 무력화됐어. 우연…… 우연인가? 우연이겠지? 하기야 어떤 정신병자가 고작 왕성의 보물고를 털어먹으려고 이따위 짓을 벌이겠.’
츠하악!
라테온의 검이 수평을 갈랐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검로의 반경 바깥에 서 있던 여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횡재를 한 도굴꾼처럼 온갖 보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 위에 얹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황금 왕관이 빗속에서 눈에 띄었다.
“감이 좋네.”
“넌…….”
“항구 도시에서 이미 한 번 봤잖아. 밤에.”
벨포트의 밤거리에서 마차로 미친 듯이 질주하던 아름다운 여인이 눈앞에 있다. 라테온이 침을 삼켰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상대를 기억한 것은 라테온만이 아니었다.
“마력에 인위적인 간섭이 있다고 하더니, 여기서 뭔가 꾸미고 있던 게 너희였구나? 목적은? 어디에서 왔지?”
“에…….”
텁.
라테온이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저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을 뻔했다. 지금도 마음이 근질거려서 참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설마.’
여인이 미소 지었다.
“에온. 아직 살아서 만나 본 적은 없는데 이렇게 또 베르덴과 엮이네.”
“……초월자인가?”
“글쎄, 어떨까?”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거대한 낙뢰가 왕성의 비행정 정박장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천장과 모든 보안 장치가 박살 나며 내부의 비행정들이 훤히 드러났다.
“저게 비행정이란 거구나? 마음에 드는데.”
여인이 미련 없이 왕관을 뒤로 던졌다.
“그럼 볼일 보렴.”
“그냥, 가겠다고?”
“왕성에 더 이상 용건은 없거든.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검을 손에 넣기도 했고. 역시 여기부터 와 보길 잘했지.”
그녀가 허리에 찬 검에 손목을 얹으며 여유롭게 등을 돌렸다.
“가기 전에 특별히 충고하자면 서둘러 왕국을 떠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
“우린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여인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곧 정박장에서 왕실 소속 비행정 두 척이 떠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무슨 개소리야. 시발, 꿈인가.’
라테온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부지의 3할 이상이 폐허가 되어 버린 왕성의 풍경이 라테온을 현실로 이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국의 병력들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수도 외곽의 전력이었다.
<전이>
그레이브가 공간을 넘어왔다.
“제기랄, <전이>가 불안정해서 제대로 쓸 수가 없군……! 라테온, 원흉은 어디에 있지? 게다가 아까 그 전격 마법은 쓴 자는?”
“밑에서 대기하라니까. 아무튼 사라졌다. 저기 비행정을 훔쳐 달아나더군. 마법사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아니, 어쨌든 상황이 복잡하게 됐다. 통신 장치에 장애가 생겼어. 대전당과 연결이 되지 않아.”
그때, 통신 장치가 빛났다.
───암살자들…… 냄새가 한곳으로…… 왕성의, 정박…… 어떻게 할…….
검은 야수의 목소리였다.
문장 전체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전해졌다. 그림낙스 놈들이 비행정을 이용해 라벤홀트를 떠나려는 듯하다.
필시 블라드도 그곳에 있을 터.
그레이브가 말했다.
“잠정 후퇴냐, 속행이냐. 우리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바로 여기서.”
“답은 하나밖에 없잖나.”
───후퇴…… 이유…… 없습니다.
카인도 동의했다.
라테온이 위상들을 대표해서 명령했다.
“전원, 왕성으로 돌입해 비행정을 강탈한다. 일단 블라드부터 추적한다. 세를로, 넌 교란을 일으킨 뒤에 라우니크 후작가에 섞여서 나중에 합류해라. 발렌 경을 부탁하지.”
로니아 국왕은 하고자 한다면 나중에도 잡을 수 있기에 블라드부터 노렸다. 놈을 놓치면 필시 후회할 날이 올 테니까.
십수 일에 걸친 추격전이 이어졌다.
하부 수인 부족과의 분쟁 지대.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한 습격으로 그림낙스가 탄 비행정을 추락시켰다. 그렇게 최대한 타격을 입힌 뒤 지상에서 결전을 벌였다.
그리고.
“……시발.”
라테온은 혼자서 마울러와 마주쳤다.
* * *
충격이 방패 너머까지 관통했다.
콰아아아앙!
멀리 나가떨어진 라테온이 침엽수 숲에 상흔을 남겼다. 폐에서 터져 나올 듯한 숨을 억누르며 자세를 잡았다.
“망령만이 아니라 쥐새끼까지 날뛰고 있었나.”
괴물이 다가왔다.
“감히 내 권역을 넘보다니. 베르덴은 아직 부재일 텐데. 아드리안의 명령이냐?”
압도적인 살기.
‘여기서 초월자가 나온다고……. 계획이 제대로 어그러졌군. 어떻게든 라벤홀트에서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그 여자 때문에!’
으득.
라테온은 자신을 죽이려 드는 초월자를 여태껏 마주한 적이 없었다. 죽음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첫 번째 계명. 지성의 존엄을 훼손하지 마라.”
라테온이 검을 겨누었다.
“계명을 위반한 자는 반드시 심판한다. 초월자의 권역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간에.”
“버러지 따위가.”
마울러가 살벌한 웃음을 흘렸다.
“권역을 먼저 침입한 건 에온이니 정당성은 내게 있다. 너희의 시체를 보고 아드리안과 베르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는군. 과연 초월자의 규율마저 무시하고 내게 달려들지.”
마울러의 존재를 먼저 알아챈 라테온은 일부러 그를 이곳으로 유도했다. 놈이 난전에 끼어들면 집행 부대가 큰 피해를 볼 테니까.
이에 마울러는 오히려 존재감을 제한적으로 드러냈다. 다른 위상들이 눈치채고 도망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라테온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확실히 죽인다.
그런 의도가 전해졌다.
라테온은 난관을 피할 수 없음을 알기에 상황을 받아들였다.
“좆까, 시발아.”
“아드리안 새끼 같은 유언이군.”
강성의 태세.
마울러가 특유의 자세를 보자마자 라테온이 돌진했다. 초단기로 힘을 쏟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도 댈 수 없을 터!
강성 – 타경打驚
아직 뻗지도 않은 건틀릿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압력. 세계 회의 개최 전에 아드리안에게 시전했던 기예가 틀림없다.
그에 맞서서 라테온이 모든 기운을 방패에 집중시켰다.
절기: 대반위對反威
──────!
라테온이 내세운 방패가 권격을 차단한 동시에, 폭발한 반탄력이 충격을 배 이상으로 마울러에게 되돌려 주었다.
자신의 기예가 반사당한 마울러가 통증을 느낀 순간이었다.
진감震撼
상대의 저항이 클수록 위력이 극대화하는 기예.
까아앙!
쩌어어어엉!
전쟁의 검이 마울러의 목을 후려친 다음 전쟁의 방패에 회전력을 실어서 날 부분으로 마울러의 턱을 있는 힘껏 올려쳤다.
절기와 기예의 연계.
이전에 느껴 본 적 없는 짜릿한 손맛이 라테온의 촉각을 자극했다.
“조건이 갖춰지면 극점 정도인가.”
마울러가 목을 가볍게 훑었다.
핏방울 두 개.
그것이 라테온의 최선이었다. 마울러의 저항력은 어떤 무투계 초월자와 비교해도 강한 축에 속한다.
“그래 봤자 버러지일 뿐.”
“크윽, 아아악……!”
커다란 손아귀가 라테온의 머리를 투구째로 잡아챘다.
꽈드드드드드득.
끔찍한 압력이다. 그하룬이 제작한 전쟁 무구가 금속음을 내며 실시간으로 손상되었고, 그 안에 있는 라테온의 머리가 머지않아 터져 버릴 듯 빨갛게 열이 올랐다.
“군림자라고 했나. 블라드보다 쓸 만해 보이는군. 투항하면 살려 주지.”
“꺼져, 아아아아악……!!”
“되도록 머리가 으깨지기 전에 말하도록.”
난생처음으로 들어 올려진 라테온이 발버둥을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방일체의 전투법을 구사하는 라테온은 그보다 파괴력도, 저항력도 압도적으로 뛰어난 마울러와 특히 상성이 좋지 않았다.
‘통신 장치와 공간, 이동만 멀쩡했어도.’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수정체가 으깨져 버릴 것 같다.
“……!”
라테온의 팔다리가 축 늘어지려던 찰나 자색의 빛이 쇄도했다. 마울러가 반사적으로 팔을 거두었고, 라테온이 지면에 떨어졌다.
두 사람 사이를 지나친 검기가 수직선상에 있는 나무들을 절단했다.
“초월자의 권역 침범.”
마울러의 건틀릿이 라테온의 투구를 박살 냈다.
“전쟁 선포라고 이해해도 되겠지?”
“그간 쓸데없는 마찰이 많았다. 이쯤에서 한번은 결론을 내야겠지.”
마울러의 남하 소식을 접하자마자,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홀로 로니아 왕국까지 내려온 아드리안의 등장이었다.
“누가 더 강한지.”
* * *
베르덴이 말했다.
“그렇게 아드리안이 마울러와 일대일로 결투를 벌였고…… 도중에 라벤홀트의 왕성을 습격한 여자가 끼어들었단 건가.”
“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알지 못합니다만, 그 여자가 격전지로 향하고 어느샌가 잠잠해졌습니다.”
아드리안과 마울러는 다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다며 장소를 바꾸었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뇌압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마울러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정신을 놓았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자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혹시 에온에서 초월자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초월자가 두 명이라. 약속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치워 두는 편이 낫겠어.
여인은 주저앉은 라테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숲속을 가로질렀다.
“이후는 폐하께서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아드리안과 마울러가 함께 행방불명.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크나큰 상처를 입은 블라드’는 그레이브가 왼팔을 절단했으나, 느닷없이 서쪽에서 몰려든 대규모 언데드 탓에 마무리를 짓지 못했고.
라테온이 다시 집행 부대에 합류할 때 ‘격이 다른 언데드’가 등장. 라테온은 방심한 카인을 대신해 목에 놈의 칼날이 꽂히고 말았다.
그리고.
타락자의 발생.
내부 분열.
언데드 군세와의 전쟁.
최악의 사태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그들은 이곳 틴폴드에 이르렀다. 카인은 생존자들을, 그레이브와 검은 야수는 토벌대를 지휘하여 언데드가 발생하는 근원지로 향한 것이다.
<기억 공유>
베르덴은 핵심 기억만을 추려서 여인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겼다. 라테온에게서 아드리안의 행방을 들은 그가 말했다.
“라테온, 여기 오는 길에 타락한 라우니크 후작이 있길래 전멸시켰다. 숫자가 꽤 많더군.”
“……!”
“하지만 그 안에 세를로는 없었다. 분명히 발렌을 데리고 아슬아슬하게 몸을 뺐겠지. 쉽게 죽을 사내가 아니니. 그러니 크게 걱정은 마라.”
그가 일어섰다.
“아르시르를 두고 갈 테니 틴폴드를 수호하는 데 사용해라. 통신 장치가 여럿 망가진 것 같으니 여분을 두고 가지. 나는 서쪽으로 가서 그레이브 등의 생사를 확인하고, 아드리안을 찾아오겠다.”
“하지만 단서가…….”
“그 여자는 아드리안과 마울러를 방해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나 역시 방해물이라고 볼 가능성이 높겠지.”
베르덴이 단언했다.
“그자가 날 찾아올 거다, 아직 그 약속이란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 * *
하부 수인 부족 어딘가.
“이 강대한 존재감…… 격을 해방했군. 일종의 초대장인가. 아하하하, 이쪽에서 가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는걸.”
감지 능력이 뛰어난 히스릴 델 로하룬이 깨끗이 손질한 검들을 허리에 찼다.
왼쪽엔 로니아 왕국의 보물고에서 구한 보검이, 오른쪽엔 아드리안이 사용하던 광검 [실렌다르]가 자리했다.
완성되어 가는 죽음의 문을 뒤로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즐기겠어.”
델하룬의 여제가 존재감을 통해 베르덴의 위치를 인지했다. 아직 그의 정체를 모르지만, 강적이자 난적이라는 걸 직감한 그녀의 입가에서 희열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