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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적 복수(6)
여명이 떠오르는 시간.
호북성 무한 인근에선 새벽을 알리는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쐐애액
-아미파의 옥허삼십육검이 섬전같이 쏟아지는 사이로, 아슬아슬이 검을 피한 철순직이 몸을 반바퀴 돌려 기의 폭발을 시전한다.
퍼펑!
예상치 못한 철순직의 반격에 아미파의 제자로 추정되는 이는 재빨리 그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지만, 이미 철순직은 시야의 사각지대에 숨어 있었다.
“좀 쉬고 계십시오.”
퍼퍽!
“끄윽!”
반격한 겨를도 없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아미파 무사.
철순직은 이윽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적들을 가볍게 상대하는 듯 보였지만 그의 팔과 다리에는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비무랑은 좀 다르군.”
사실상 비무가 아니고서야 아군이나 마찬가지인 구파일방의 인물들과 검을 맞댈 일 따윈 상정한 적이 없었기에 피해도 그만치 더 컸다.
물론 상대가 그만큼 강했던 것도 있고.
백팔봉의 일원 그중에서도 12봉성의 인원인 죽현방의 철순직이 정도회, 그것도 구파일방의 정예들과 진심으로 싸울 일이 있을 거라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말이 안 되는 정도를 넘어선, 아득히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건 다 진소운 때문이었다.‘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는 인간이라니까.’담악을 탈출시키겠다니.
물론 정도회가 담악을 습격했다는 소릴 순순히 믿은 건 아니다.
그런데 진소운이 단언했다.
탈출을 방해하는 자가 ‘정도회가 아니’라면 중간에 돌아가도 좋다고.
이 정도로 확신에 찬 태도에 학관 동기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소운이 뒤에 붙인 ‘구파일방이랑 진심으로 붙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란 말에 더 혹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찌저찌 야음을 틈타 자리를 지키던 이들은 결국 진소운의 말대로 정도회가 담악을 습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암습자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최소한 수고조차 하지 않았으니까.‘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담악이 급하게 탈출하려 한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
-지금 어설프게 정도회의 모략에 휘둘렸다간 평생 무림맹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방법은 깡그리 무시하고 달려 나가는 것이라 판단했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소운에게 도움을 요청한 담악이나, 그걸 받아들인 진소운이나 어떻게 봐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당금 옳은 일이 무엇인지 판단할 줄 아는 이라면 진소운이 잘못하지 않았다 말하겠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어디 그리 정론대로만 흘러가던가.
진소운 그가 천하의 ‘역도’가 아닌 ‘미친놈’으로 불리는 덴 어쩌면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일들에 이 미친…… 아니, 사내는 개지랄 말라며 사력을 다해 몸을 부딪치니까.
부당함에 힘껏 몸을 투신하고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뭇 범인들에겐 그저 미친놈의 행동처럼 보이는 것이다.‘미친놈, 그래 분명 미친놈이다. 그런데…….’칠십일 대 무림학관 학관생들은 그런 진소운을 사랑한다.
처음엔 다른 이들처럼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던 이들조차도 이제 그를 너무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학관생 모두가 생을 포기했던 묵림에서 홀로 ‘모두를 생환시키겠다’ 선언했던 것.
그리고 그 선언을 지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렸던 것.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장 앞선 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
그 모든 광경들이 알알이 학관생들의 뇌리에 박혔다.
뭇 범인들조차도 누군가의 그런 등을 본다면 가슴이 뜨거워질 텐데.
하물며 무인의 길을 택한 학관생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백랑각이 정원을 채운 것으로도 부족해 미어터진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번 일도 그렇다.
정도회와 척을 질지 모를 위험한 상황임에도 학관생들이 주저 없이 나선 것은, 다시금 그의 등을 믿고 싶어서.
아니, 더 나아가 그의 등을 지키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그쪽은 몇 명이나 만났어?”
“…….”
어느새 나타나 질문을 던지는 종남의 종추악.
철순직은 이상한 생명체를 마주하기라도 한 듯 미간이 일그러졌다.
“……
자네는 대체 왜 나온 건가?”
“왜긴 왜야. 단주가 나오라니까 나온 거지.”
“정도회 선배를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정도회는 무슨……. 정도회가 이딴 짓을 할 리 없어.”
말과 달리 먼 산으로 향하는 불안한 시선.
이건 또 무슨 극한의 현실 도피인가 싶지만, 그러려니 이해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자신들이 썩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어쩌면 만독문에서 사문에게 배신당했던 일이 복수를 꿈꾸게 했을지도 모른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는 건 분명 어렵고 괴로운 일일 테니까.
잠시 주먹이 꽉 쥐인 제 손을 내려다보던 종추악이 진지한 목소리로 찾아온 연유를 전했다.
“곤륜파 마새진이 도움을 요청했어. 빨리 움직여야 해.”
“어려운 상대라 하던가?”
“어려운 건 모르겠고. 숫자가 너무 많대.”
“곤륜파 전술은 본래 치고 빠지기가 아니었던가? 정면 승부를 본다고?”
철순직의 물음에 종추악이 가볍게 웃음을 흘린다.
“마새진 그놈은 그냥 진 단주 덕분에 벼락 출세 한 놈이니까. 백랑각도 놈에게는 과분하지 않겠어?”
종추악이 본래 이렇게 농담을 즐겨했었던가? 전에는 조금 더 딱딱한 인간이라 생각했었는데.‘뭐, 단주 잘못 만나 물이 든 거겠지.’철순직은 망상을 멈추고 이동을 시작했다.
벌써 해가 뜨고 있었고, 자신들의 단주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나아가고 싶어 했으니까.
온 세상을 밝힐 듯 점차 떠오르는 태양.
그들은 왠지 그 모습이 자신들을 든든히 지키던 진 단주의 등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번엔 자신들이 그를 대신하여 피를 흘릴 차례였다.
“어서 가지.”#무한이 위치한 호북성에서 산서성으로 가기 위해선 섬서나 하남을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물론 평범한 표행이라면 하남성 정주를 통해 산서성으로 곧장 가겠지.
하남 정주 인근엔 소림사가 위치해 있고, 안전상으로 그곳보다 더 안전한 경로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더없이 안전한 그 경로가 현재 우리에겐 사로가 되어버렸다.
호북과 하남, 섬서는 정도회의 앞마당과 같은 곳이니까.
안휘로 가면 강소와 산동을 거처 하북을 통해서만 산서로 갈 수 있다.
사실상 대륙 절반을 돌아가는 길이지만 담악은 그 길을 선택했다.
“안휘까지만 가면 호위들이 나와 있을 겁니다.”
“산서성의 인원들이 안휘로 오기 위해선 하남을 거쳐야 합니다.”
하남의 동북쪽은 지형이 불쑥 튀어 나와 있어 산동과 하북을 접한다.
지금 산서성의 인원이 안휘로 오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하남을 거치는 방법뿐인 것이다.
“제가 출발할 때 인원들 역시 맞춰 출발했으니 지금쯤이면 안휘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한 겁니까?”
내가 놀라 물어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담악.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한다 해도 당연히 그 정도는 준비해 놓는 거 아닙니까?”
되려 이상하단 듯 되물어온다.
시벌, 대체 어떻게 된 준비성인데.
하긴 전생에도 마교들을 보지 않고도 경로를 척척 알아맞히던 양반이니 이런 상황이 놀랍지도 않다.
그리고 한 가지 큰 깨달음이 찾아온다.‘정도회 그 병신들은 대체 감히 누구한테 시비를 건 거야……?’사이 좋게 지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마당에 모가지를 따겠다고 덤볐다가 실패했으니, 내가 정도회 간부라면 얼른 이불 속에 들어가 목침을 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리라.
어쨌든 담악의 정신 나간 준비성 덕분에 우리는 안휘성으로 가게 되었다.
마침 안휘성에 태을문과 왕가장이 자리 잡고 있으니, 마차를 이끌고 안휘성으로 달려간다 해도 차후에 변명할 거리도 있고.‘누가 더 뻔뻔하게 아닌 척하느냐인가. 대결이네.’저쪽은 자신들이 담악을 습격했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할 것이고, 나는 담악을 도왔다는 점을 어떻게든 숨겨야 한다.
이 졸렬한 복마전에 가슴이 옹졸해진다.
이게 강호의 흑과 백의 싸움이라니, 이게 무림이라니. 시벌, 존나 의기 충만해지네.
문제는 이쪽은 시간이 없고, 저쪽은 시간이 널널하다는 것.
시간만 넉넉하다면야 학관생들과 왕가장의 인원들을 총 동원하여 시위하듯 차근차근 나아가겠지만, 현재는 온 천지사방에서 흑도 무인들이 ‘우리 소중한 담악’ 내놓으라고 염병들을 떨고 있다.
그중 한 놈이 ‘어라, 손이 미끄러졌습니다!’라도 시전하는 날엔 전쟁 발발.
그때부턴 ‘담악 탈출 시키기’ 작전이 ‘담악과 함께 사흑련으로’라는 끔찍한 작전으로 바뀔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 안에 안휘성에서 대기 중이라는 사흑련 부대에 담악을 던져야 한다.
아마 상대도 그걸 알기에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작전으로 곳곳에 인원들을 배치시켜 놓았을 터.
그때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멈추시오! 잠시 검문이…….”
이 새벽에 화롯불을 켜 놓고 검문이라고? 녹림맹도 이 시간에 지나가는 인원들은 그냥 보내준다.
어떻게 아냐고? 거, 내가 녹림맹 중에 친한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멈추시오! 멈추지 않으면 무림맹의 이름으로…… 으아아악! 미친 새끼야!”
“이럇! 이럇!”
아무리 기세등등한 무림맹의 이름이라도 폭풍 질주하는 준마들의 기세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검문을 하던 이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옆으로 비켜선다.
뒤이어 호위들이 날린 수리검에 ‘으악’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드르륵.
마차의 작은 창문이 열리며 담악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흠…… 검문이라는데 협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도 그러고 싶네요. 쟤들이 당신 목을 원하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죠.
재미없는 농담은 사절이라 창문을 닫아버리곤 말 고삐를 쥐어 당겼다.
속도를 올려 달리니 어느새 호령산 일대에 당도했다.
거리상으론 호북성을 지나기엔 아직 멀었지만 일단 호령산만 지나면 무한의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겠지.
접선 장소인 마성까지만 들키지 않고 갈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네 명? 아니, 여섯 명이구나.’우리 마차에도 여섯의 추적자가 붙었다.
철순직을 비롯한 학관 졸업생들이 열심히 막는다 한들, 애당초 정도회의 무인들을 모두 막을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만 해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봐줘야겠지. 무려 상대는 정도회의 특작 부대니까.
아무튼 아직은 정체를 들켜선 곤란하다.
여기서 들켜버리면 안휘성까지 지지부진하게 싸워가며 뚫고 가야 한다.
한시가 바쁜 때에 그럴 여유 따위 있을 리가.
“말 고삐를 부탁합니다.”
“또 추적자가 붙었나요?”
경력이 오래된 마부답게 눈치가 빠르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최대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 경력이 삼십 년입니다.”
“그럼 속도를 최대한 유지해 주세요.”
그렇게 마부에게 고삐를 맡기고 마차 지붕 위로 올랐다.
호위들이 검을 들고 함께 일어서려 했지만 말렸다.
누차 말하지만, 댁들이 나서면 여기에 담악이 있는지 추격자들이 뻔히 알아차릴 거 아냐.
최고의 작전은 호북성을 넘어설 때까지 담악이 어떤 마차에 타고 있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다.
포위망은 그만치 얇아질 테고.
정도회 특작 부대를 뚫고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아직입니다. 만약 제가 막지 못하거든, 그때 나서 주세요.”
호위들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나는 마차 지붕 위에 놓인 무기들을 둘러봤다.
표사들은 한 번의 표행 동안 다양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주력 무기 외에도 각기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한다.
잠시 고민하다 활과 도끼, 태도와 곤들 사이에 놓인 낡은 수리검 몇 개와 창을 집어 들었다.
이번 생에선 창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더구나 지금 쓰기 마땅한 창법을 하나 알기도 했고.‘육시랄 그놈이 슬슬 육가에서 쫓겨나 백랑각에 들어올 때가 되었지.’스스로 별호를 육식랑이라 칭했던 이 미친놈은 감히 육가의 창식 여섯 개를 훔쳐 무인 행세를 했다.
이놈이 대장군부의 무공인 육가창식을 마음대로 쓰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정마대전이 터졌기 때문이었고.
우린 매번 놈에게 하루 두 번 마교 쪽으로 절을 하라 놀리곤 했었다.‘난전 속에서도 육시랄 그놈이 창법을 펼칠 때마다 무림맹의 고위 인사들이 움찔움찔 놀라곤 했었지. 청수진인 그 인간이 이 창법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나는 그 재수 없는 낯짝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꼴을 상상하며 창 끝에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나무 위를 달려오던 추적자들이 새벽빛을 등지고서 마치 새가 날갯짓하듯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