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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적 복수(8)
해가 뜬 후, 유흥가를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마저도, 전날 화끈한 밤을 보낸 이들의 흔적을 치우거나 몸을 가누지 못해 길거리에 뻗어버린 사람을 깨워 집으로 보내는 점소이들이 대부분.
밤새 열심히 일했으니 착한 유흥업소의 직원들은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이처럼 모두들 눈을 붙이기 위해 문을 닫는 시각.
유흥가에선 볼 수 없는 복장의 인형이 골목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골목을 쓸던 한 점소이가 동료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고.
“이봐…… 저기.”
낯선 이의 복장을 알아차린 사내가 아연실색하며 동료의 입을 막았다.
“쉿! 잘 봐! 소림사의 승복이야!”
“어이쿠……. 경을 칠 뻔했네.”
아무리 목소리를 줄인다 해도 워낙 거리가 썰렁한 탓에 점소이들의 말소리는 공명하듯 주위로 울려 퍼졌고.
주름진 두피가 붉게 달아오른 혜성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이를 꽉 깨물며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하필 장소를 잡아도 이런 곳을…….’이해는 한다.
만통부와 맹주전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상황에서 맹의 인물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이런 곳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
지금도 무림맹 내에선 제갈소명이 장로전을 뒤집어엎는 중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좀 더 얌전(?)
한 곳에 장소를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혜성이 한 주루 안으로 들어서자,“아! 어서 오십시오.”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점소이가 비틀거리며 인사를 건네온다.
“모시겠습니다.”
내부는 이미 전날의 흔적을 깨끗이 치웠는지 청소를 마치고 환기를 하는 중이었다.
점소이를 따라 주루 뒤편으로 가자 전각을 등지고 선 청수진인이 뒷짐을 진 채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서 오시오.”
“간밤에 잠은 좀 주무시었소?”
혜성의 물음에 청수진인이 연못을 누비는 잉어를 바라보다 답했다.
“놈의 죽음을 확인하고 잘 생각이오.”
그렇소이까.”
“잠이 오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혜성은 침음을 삼켰다.
하긴 예상보다 더 시간이 걸리긴 했다.
당초 자신들이 예상했던 바론 담악은 무한 안에서 죽었어야 하는데.
죽기는커녕 버젓이 살아서 호북성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 탓에 일이 더욱 꼬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혜성은 추가된 나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총군사가 사실을 알아버렸소.”
일순, 청수진인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잠시 살기가 흘러나오던 몸을 추스르곤, 그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천목각주가 오지 못한 이유가 있었구려.”
그러나 혜성의 낯빛은 계속해서 어두워져 간다.
일이 예상과 달리 흘러가고 있소이다.”
“걱정 마시오. 개방이 움직이고 있으…….”
“총군사가 알았으니 맹주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란 말이오!!”
착
-언성을 높이던 혜성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순백의 부채를 펴 들곤 여유로이 바람을 즐기는 청수진인의 모습에 얼이 나가버린 것.
잠시 미간을 꿈틀거리던 혜성은, 이내 부채 뒤로 서늘히 번뜩이는 청수진인의 눈빛을 발견하곤 쉬이 침묵을 깨지 못했다.
그러길 잠시.
“그들이 두렵소이까?”
나직히 던져진 질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시는 게요.”
크흠.”
혜성이 겸언쩍어 입을 다물자 청수진인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쪼르르.
술잔 대신 놓인 찻잔에 향긋한 향이 어린다.
“어차피 이 끝엔 결국 전쟁이 벌어질 것이오. 이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끝난 후에…… 우리에 관해 역사가들의 기록이 어떻게 남겨질 것이라 생각하오?”
“…….”
청수진인이 대답할 시간을 주듯 차를 천천히 들이켰고.
혜성은 쉬이 입술을 열지 못했다.
“썩은 무림맹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무림맹의 폐망을 방조한 자들. 아니면…….”
청수진인이 이번엔 방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전쟁에 앞서 악의 두뇌를 제거하고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 자들. 혜성대사는 어찌 평가받고 싶으시오?”
“두려워 마시오. 혜성 대사.”
두려워하지 않았소이다.”
정도회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청수진인의 말끔한 얼굴을 보며 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만, 진소운 그놈이 끼어들었다는 것이 우려될 뿐이오. 당최 예상할 수 없는 놈이니.”
진소운.
지금 가장 거슬리는 이름이 언급되자 청수진인의 얼굴에도 잠시 금이 간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다잡곤 천천히 찻잔을 매만지며 그.
내 그리하여 현영이를 직접 보냈소이다.”
“허어…… 그렇소?”
청수진인의 눈빛이 한순간 광채를 발했다.
“그 아이는 일각이처럼 삿된 것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
제자의 이름이 나오자 혜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걸출한 후기지수로 손꼽히던 일각이 혜성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 이후로 혜성의 위신 역시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으니까.
“그, 그 아이는 삿된 것에 흔들리지 않았소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백랑각에 지원한 것이오.”
혜성은 얼굴이 발갛게 물들다 못해 귀와 두피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쯤 되자 혜성은 잔뜩 약이 올라 부동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제 말을 듣지 않는다 한들 일각은 소림사의 역근경을 익힌 직전제자였으니까.
“일각 그 녀석이 지금 잠시 혼란을 겪고 있는 건 사실이오.”
사춘기 소년이 반항을 한다 하여 그것을 두고 패륜이라 말하는 부모는 없다.
단지 나쁘게 물들인 친구를 탓할 뿐.
일각은 지금 잠깐 방황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진소운 그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외다. 그만치 교활하고 무서운 놈이오.”
청수진인이 가소롭다는 듯 혜성을 바라봤다.
“놈이 범상치 않은 놈이란 건 나도 인정하는 바요. 하지만, 자신의 제자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굳이 상대를 높일 필요는 없지 않겠소이까.”
혜성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누군가 정원을 가로질러 급히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누구냐!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였거늘!”
혜성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사방에 진동하자 다가오던 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잔뜩 겁에 질린 인형이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개, 개방에서 왔습니다.”
“개방?”
“예. 추격 도중 급한 일이 생겨 보고드리려 합니다.”
“보고라니. 담악을 처치하였는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렇담 무슨 전달을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한시가 바쁜 이때에.
지금쯤이면 담악이 어떤 마차에 들었는지 알아내고 병력을 집중할 때가 아니던가.
각종 의문과 분노가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그때, 개방도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도주 중인 마차들 중에서…… 군부의 창법을 쓰는 자가 나왔습니다.”
“군부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청수와 혜성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개방도는 서둘러 부연했다.
“육가창식을 쓰는 자가 나왔습니다.”
“육가창식…… 북경 육가 말인가?!”
“네.”
청수진인과 혜성의 눈동자가 서로 복잡하게 얽혔다.
“북경 육가라니…….”
너무 뜻밖의 이름이 등장하여 머리가 멍해질 지경.
군부가 어찌 무림의 일에.”
예로부터 관은 무림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는 무림 또한 관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으로 갈음되니.
하지만 군부라면 조금 다르다.
군부는 오직 황실의 명령만 듣고, 황실을 움직이는 건 결국 황제의 권한이니까.
“담악 그자가 황실에 몸담은 적이 있다 했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다 생각하시오?”
혜성의 말에 청수진인이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그가 황실에서 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소. 단지 속임수에 불과할 수도 있소이다.”
그때, 개방도가 끼어들었다.
“저희들도 교차 검증한 후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육가창식이 확실합니다.”
개방도의 확언에 혜성이 청수진인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확실하다잖소. 이제 어찌할 것이오?”
“변하는 건 없소이다. 애당초 그리 중요한 인물이라면 그가 사흑련에 가는 걸 황실이 그냥 두고 보았겠소.”
혜성도 알고 있다.
청수진인의 말은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걸.
황실의 변덕이 무림을 뒤집어 놓았던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어떤 말도 함부로 얹을 수는 없었다.
“저…… 추적은 어찌합니까.”
“어찌하다니?”
“태을문의 마차와 육가창식을 쓴 자가 탄 마차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두 마차 모두 쫓도록 하게.”
“그리하려면 지금 인원으론 부족합니다.”
개방도의 말에 청수진인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정도회에서 사람을 보내지.”
“알겠습니다.”
개방도가 정원을 돌아 나간 뒤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머릿속이 몹시도 복잡해지기 시작했으니까.#육가창식을 보고는 도깨비라도 만난 듯 화들짝 놀라 자취를 감춘 추적자들.
덕분에 밤이 다가올 즈음엔 호령산을 넘을 수 있었다.
“으어어…… 하루 종일 마차에 타 있으려니 온몸이 찌뿌둥하군요.”
화롯불 앞에서 고깃국 한 그릇을 뚝딱 말아 먹은 담악이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며 불만을 토로한다.
당최 누가 쫓기는 사람인 건지.
“더 먹어도 되는 것이야?”
담악과 함께 마차 안에 있었던 당서희와 제갈천기는 불량한 담악과 달리 불평 한 마디 없다.
우리 애들 좀 보고 배워라, 이 사악한 흑도 무림의 거두야.
나는 당서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서희와 제갈천기가 얼른 솥에 나무 국자를 집어넣어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담악이 물끄러미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오후부턴 추격자가 없는 것 같던데, 당최 어떻게 한 겁니까?”
“기밀이라 알려줄 수 없습니다.”
“째째하군요.”
허, 참나. 어이가 없어서.
“이제 추격은 끝인 겁니까?”
그럴 리가.
육가창식에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여기서 포기할 놈들이라면 집요한 정도회가 아니지.
정의를 향한 놈들의 집념은 가히 피를 갈구하는 마인의 집착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담악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안휘성에 갈 때까지 마음을 놓지 마십시오.”
“그렇군요. 하아암.”……
아니, 천하태평하게 마음 놓지 말라…….
“그럼 먼저 좀 자도 되겠습니까. 역시나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탓인지 금방 피로하군요.”
내 말은 씹어 삼켰는지 어느새 담악은 바닥에 덜렁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태을문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금·은·동 형제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조용히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는 괜찮으십니까?”
“너는 밥을 먹었느냐?”
문주님의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와서 조금 쉬거라. 아까 보니 홀로 싸우느라 힘들었을 텐데.”
크으,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낯선 문주님밖에 없구나.
아버지는 우째 이런 다정함이 없으십니까.
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아버지를 바라봤다.
뭘 꼬라보냐?”
캬! 누구 아버진지 자식이 진짜 불쌍하네.
“대체 왜 여기에 끼신 겁니까? 왕 장주님과 함께 가시라니까.”
“이 자식이! 나도 태을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무인이다.”
그거야 그렇지. 외당 당주로서 새어 나가는 돈을 틀어막기 위해 실력 행사를 한두 번 했던 게 아니니까.
“에이…… 근데 그건 과거 기준이잖아요.”
내 공격에 분명 노하리라 생각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내 예상과 달리 진중하게 바뀌었다.
“난 꼭 같이 가야겠다. 네놈이 얼마나 위험한 짓거리를 벌이고 다니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으니까.”
그렇게까지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진 않습니다.”
“흥! 네놈 말을 믿느니 사기꾼 말이 더 신용이 간다.”
참 나, 세상에 자기 자식한테 이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대.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당주님은 제가 호위할게요.”
“오라버니 말고! 대사형!”
소소의 말에 사련이 막고 선다.
뭐지, 소소는 웃고 있고 사련이는 무표정인데 왜 보는 내가 무서운 거냐.
“대, 대사형…… 저도 미약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옆에서 조신히 앉아 있던 유성이 녀석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왔고,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다.”
소소가 그간 얼마나 성취를 이뤘는진 모르지만, 사련이와 유성이가 있다면 그리 위급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버지의 동행에 동의했다.
금·은·동 형제들이 탄 마차가 얼마나 더 많은 시선을 끌어줄지 모르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이곳에 있는 태을문의 사람들이 시선을 끌어줘야 한다.
부디 그 과정에서 크게 부상당하는 이가 없길 바랄 뿐.
그런 내 마음이 전달되었음인가.
낯선 문주님이 다부져진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걱정 말거라. 태을문은 무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합비로 돌아가는 길이다. 누구도 우리의 길을 막을 명분도 이유도, 없다.”
이런 게 마음이 통한다는 건가.
그간에도 금·은·동 형제와 사련이가 늘 함께하긴 했지만 매 순간순간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때론 등에 짊어진 짐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서.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태을문과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정도회 전체가 달려든다 해도 무섭지 않다.
내 어깨를 두드리던 낯선 문주님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만약 막아선다면…….”
그의 주위로 거칠거칠한 패기가 뿜어져 나온다.
이윽고 그의 입술로 새어 나오는 담담한 목소리.
“지옥을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투사의 눈이 된 너무나도 낯선 문주님이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소운이 넌 뒷일은 아무 걱정 말거라.”
막 불구덩이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아…… 진짜 적응이 안 된다.
대체 당신 누구야. 우리 문주님 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