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9화.
숨겨진 조건. 돌발 이벤트.
이것들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히든 피스!’
게임 내에서 고의적으로 숨겨둔 장치.
그것을 발동시킬 조건을 달성하여 이스터 에그가 발동된다는 것.
설마하니 이번에도 그런 게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이번의 경우엔 근방의 모든 심연의 잔재를 부수는 게 그 조건이었던 모양이다.
‘지배자의 눈이 아니었으면 절대 못 깼겠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루팔로의 가호가 반응하는 건 어디까지나 근처에 있는 잔재에 한해서일 뿐.
일단 유저가 그 근처에 있어야 반응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하나 찾기 위해서 숲을 하염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고.
‘심지어 그중 몇 개는 가호에 반응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
아마 단순히 가호만으로는 찾지 못하게 숨겨둔 잔재일 터.
성적에 따라 연계 퀘스트에 변화가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연계 퀘스트가 숨겨둔 잔재를 부수는 것일 수도 있을 터였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럴 거야.’
뎀로크와 갓오세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뻔했다.
한데 도현 일행이 지금 그 잔재를 모두 부숴버렸다.
그럼 기존의 연계 퀘스트는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퀘스트로 바뀌겠지.’
그리고 그 퀘스트에 이 히든 피스가 영향을 줄 확률은 차고 넘쳤다.
아니, 그걸 떠나서 히든 피스를 얻었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에 도현이 진지해진 얼굴로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고, 그 기다림에 부응하듯 곧이어 알림이 울렸다.
[주의! 돌발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숨겨져 있던 비밀 던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쿠구구구–
“!?”
“흠!”
갑작스레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하는 지면에 여제와 검성, 도현은 곧장 자세를 낮추었다.
거의 무릎반사에 가까운 속도.
덕분에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워매, 뭐여?”
-케헥!? 뭐, 뭐야 주인!
-리자리자!?
-주군, 위험합니……!
거대한 덩치가 창피하게 철푸덕 엉덩방아를 찧은 아재.
냅다 바닥을 뒹구는 지하드와 그 모습에 폴짝 찰리의 머리 위로 점프한 엘리자를 보면 말이다.
그나마 찰리가 크게 휘청이긴 했어도 중심을 잡으며 도현을 찾았지만…….
-크, 크흠.
태연한 제 주군의 모습에 이내 멋쩍음의 헛기침을 했다.
쿠구구구.
그러는 사이 진동은 차츰 잦아들었고, 이내 메시지 창과 함께 바뀐 풍경이 드러났다.
정확히는 풍경이 바뀐 게 아니었다.
마지막 잔재가 있던 곳.
-저, 저게 뭐야?
-리자!?
-으음, 균열 같기도 하고 생명체 같기도 한 것이 기묘하구만.
그곳의 지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올라와 있었다.
한데 그 크기가 범상치 않았다.
높이만 5M에 달하는 것이 거대한 보스 몬스터를 보는 것도 같고, 흉흉한 기운이 끔찍한 무언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런 무식한 게 솟아오르니 땅이 그리 흔들리지.’
하나 정체 모를 무언가의 갑작스런 등장에도 도현과 동료들은 비교적 침착했다.
그들의 눈에는 보이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눈(모조)이 열렸습니다.]
[심연의 눈(모조)]
-등급 : ?
-타입 : ?
-특성 : ?
-설명 : 심연과 지상을 잇는 단 하나뿐인 입구이자 하나뿐인 심연의 눈.
누군가 그것을 인공적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연구와 자원을 쏟아부은 흔적이 느껴지는 입구이다.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재료로 만들었는지 모를 오래되고 끔찍한 기운이 느껴진다.
[입장 제한 인원 : 숨겨진 루트를 달성한 자]
저것의 정체가.
물론 비교적 침착하다 이거지,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리 없는 비명이란 말이 있듯이,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을 뿐 경악하고 있었다.
‘심연의 눈이라고?’
심연의 눈이 무엇인가.
파멸자 게이먼과 잊혀진 왕의 무덤 때 열릴 뻔했던 돌발 이벤트.
제대로 열린 것도 아니고 그저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전해졌던 전율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것에 반해…….
‘음, 그 정돈 아닌데?’
이 심연의 눈은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기운이 전해져 다가가기 섬뜩한 느낌은 맞는데…… 딱 그 정도일 뿐.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고장을 보내는 듯한 위기감은 없었다.
“심연의 눈? 이게 그때 그거라고?”
“지X. 그때에 비하면 심장이 쫄깃한 게 하나도 없구만.”
“흐음. 동감한다.”
“아, 맞다. 너희도 있었지.”
동료들도 같은 생각인지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
“뭐, 모조품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진짜 심연의 눈이랑은 다르겠지.”
“그런데 이거 나만 느낌 오냐? 인위적으로 만든 심연의 눈? 그리고 그게 하필 히든 피스?”
“뭔가 느낌 오긴 해.”
여제의 말대로였다.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조합이나 상황이 너무 그럴싸했던 것이다.
아무리 루팔로와 요정족들이 건들지 못한다 해도, 세계수를 병들게 하는 핵심적인 재료인 심연의 잔재를 고작 마수들한테 맡긴다?
무언가 석연찮긴 했다.
하지만,
‘심연의 잔재를 안 지킨 게 아니라, 지킬 필요가 없었던 거라면?’
침입자들의 목적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사실 심연의 눈을 완성하는 것이었다면?
심연의 잔재는 일종의 쇼.
눈막음이라 생각하면 이 모든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이 된다.
마치 내내 비어있던 퍼즐 조각 하나가 맞춰진 듯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질 정도.
“……그럴싸한데?”
“와, 이 생각을 못 했네.”
“이러면 루팔로가 모를 만하지. 잔재 자체를 부술 수가 없었으니.”
“올. 웬일로 머리 잘 굴러가냐.”
“카이저, 저 녀석이 원래 머리는 꾸꾸 너보다 잘 굴렸지.”
“뭐 인마?”
이 와중에도 티격거리는 여제와 검성을 가볍게 무시하며 도현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된 상황에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루팔로한테 가도 모를 텐데 굳이 갈 필요는 없겠지.”
“혹시 몰라. 이거 방치했다가 사라지거나 할지.”
“그럼 결정된 거지?”
“당근빠따지, 인마.”
“……와 그건 또 언제적 말이야, 아재.”
“아, 왜. 또 뭐. 그래 니들 젊어서 좋겄다. 너흰 나이 안 먹을 거 같지? 30줄 넘긴 순간 순식간이다?”
“그럼 그때 아재 나이는…….”
“뒤질래 진짜?”
이젠 아재와도 싸움에 합세한 모습을 익숙하다는 듯 넘긴 도현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 보자고.”
“좋지.”
“바라던 바다.”
그에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 곧장 싸움을 중단하고 답하는 동료들.
-으으, 난 조금 꺼림칙한데…… 다들 간다니까 알았어.
-음! 이 미천한 검. 주군이 가는 길이라면 언제든 곁에 설 따름입니다.
-리자리자!
그리고 그 곁에 서는 가디언들까지.
만장일치로 결정된 걸 확인하며 도현이 심연의 눈에 손을 뻗었고, 그 순간.
파앗-!
[자격이 확인되었습니다.]
[비밀 던전 ‘심연의 눈(모조)’에 입장합니다.]
시야가 점멸되었다.
* * *
심연.
먼 과거 아브타르텔에 쳐들어온 신과 수많은 종족들이 싸운 여파로 생겨난 새로운 세계.
아브타르텔 전체를 집어삼킬 뻔했던 끔찍한 존재.
고대 인류를 패하게 만든 가장 큰 원흉.
극심한 마기를 견뎌야 하기에 아브타르텔로 치면 일개 필드 몬스터에 불과한 마수들조차 엄청난 내구성과 힘을 지닌 곳.
그런 놈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심연은 어떻게 생겼을까?’
항상 그들이 쳐들어오거나 침범해올 뿐.
이쪽에서 심연에 발을 들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메인 퀘스트의 초창기부터 엮여왔고 상대해왔던 놈들이자, 핵심적인 놈들인 만큼 더욱 호기심이 동했었다.
그리고 지금.
도현은 그 궁금증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심연의 눈(모조)에 입장하였습니다.]
[심연의 눈의 마기가 부족하여 심연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심연과 지상의 경계 ‘심연경(深淵境)’에 진입하였습니다.]
[심연에서 경계로 흘러나오는 마기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10% 저하됩니다.]
[특성 ‘영웅’이 정신오염을 막아냅니다.]
[특성 ‘영웅’이 정신오염을 막아내는 것에 실패하였습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심연에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심연이 아닌, 심연과 지상의 사이에 있는 경계에 불과한 듯했지만.
“오?”
“호오.”
“새롭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기에 도현을 비롯한 동료들의 눈이 반짝이며 빛이 났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으으…… 공기가 너무 끔찍해. 숨쉬기가 힘들어.
-리자리자…….
마나에 민감한 지하드와 엘리자는 헛구역질을 하며 힘겨워했으니 말이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하는 녀석들에겐 미안하지만, 도현은 주변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윽.
편견이라 해야 할까.
심연에서 나온 놈들의 생김새도 그렇고, 심연의 눈이 열리려 할 때 보인 검은 마기도 그렇고.
솔직히 그저 아무것도 없는 어둠 그 자체일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거친 붓으로 밤하늘과 지상을 표현한 듯한 질감.
아니, 지상과 하늘 그 사이 경계 부분의 세상에 서 있으면 이러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특이하고 몽환적인 풍경이다.
뭉크의 절규 속 세상 같다고 해야 하나.
눈동자에 비친 모든 게 신비롭고 자극적이었다.
“경계라고 하더니, 정말 딱 그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그러게.”
“이름값 제대로네.”
“그런데 마수들은 없네?”
“심연이라기에 솔직히 화끈한 게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이건 뭐 아무것도 없네.”
“흐음, 경계라서 그런가? 따지고 보면 그 사이 어딘가지 심연은 아닌 거니까.”
그에 도현 일행이 한동안 멍하니 풍경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여제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딘 순간이었다.
띠링!
갑작스레 알림이 울렸다.
한데 알림음이 심상치가 않다.
띠잉! 띵!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게 알림음보다는 마치 당장 그 발을 떼라는 듯한 경고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정확했다.
[기존에 심연경(深淵境)에 진입했던 이들이 새로운 진입자의 존재를 감지합니다.]
“뭐?”
“잉?”
“흐음?”
예상치 못한 메시지에 당혹스런 기색을 보이기 무섭게, 저 멀리에서 무언가 빛살처럼 날아든 것이다.
어둠을 갈라낼 듯 아름다운 한 줄기 섬광에 시선이 현혹된 순간.
카앙!
검성이 역수로 쥔 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제공권.
주변 영역에 한에선 조건반사에 가까운 속도로 막아내는 이 기술이 아니었으면 눈 깜짝할 새 베였을 만큼 경이로운 속도였다.
“워매, 뭐여!”
-흐익!
-리자리!?
실제로 움찔하며 자세를 잡은 도현과 여제를 제외하곤, 아무도 반응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두 사람도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빠르다. 치명상만 가까스로 막았겠어.’
두 사람조차 반 박자 정도 늦게 반응했으니 말이다.
어지간한 기습은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피지컬을 가진 여제조차 다소 늦을 정도로 수준 높은 기습.
그게 영 거슬렸던 걸까.
“넌 뭐…….”
여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던 찰나, 이번엔 반대쪽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이전만큼 빠르진 않지만, 그보다 더 위협적인 기운.
하나 이미 기습을 인지한 순간, 똑같은 기습에 당해줄 여제가 아니었다.
콰앙!
어느새 피로 물들어진 손아귀로 막아내자, 주먹이 잡힌 거구의 남자가 씨익 웃어 보였다.
“오, 이걸 막다니. 듣던 대로 제법인데.”
“이건 뭔…….”
대뜸 주먹을 내지르곤 인정하는 투로 호쾌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에 여제의 찌푸린 눈살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그 반응은 검성도 비슷했다.
그녀에겐 다소 드물게도 고운 미간은 잔뜩 찡그리고 있는 게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씨익.
그리고 그 모습조차 그저 기껍다는 듯, 처음 섬광 같은 기습을 가했던 서양검을 쥔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
“반갑다. 그대가 조선제일검이라지. 나는 서양 검술의 일인자. 늘 조선의 제일검과 한 번 검을 겨뤄보고 싶었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또 다른 인기척.
이번에는 기습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장신의 남자가 여유로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띠링, 알림이 울렸다.
[악연을 맺은 대상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무법지대와 카이저 님은 지독한 악연 관계입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악연의 장’이 펼쳐집니다.]
[거역의 서(書)가 적합한 힘을 탐색하기 위해 시전자와 대상에 얽힌 서사를 읽고 있습니다.]
[반항의 연(緣)이 발동됩니다.]
[운명에 강하게 저항하여 상대에게 죽을 수도 있을 운명 중 하나를 거스를 힘이 주어집니다.]
‘무법지대? 설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상황에 나타날 놈들의 정체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혹시나 해서 이곳부터 들어와 봤는데…… 옳은 선택이었네.”
도현이 놈들의 정체를 직감한 사이.
밤하늘과도 같은 빛에 희미하게 얼굴이 드러난 남자가 도현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라온, 그 멍청한 놈이 교육 좀 당했던데…… 교육해준 사람 얼굴이 너무 궁금하더라고. 그렇게 와봤더니 정작 얼굴을 가리고 있네? 그러면 그 가면을 벗겨줘야지, 안 그래?”
“…….”
“카이저.”
카르마일.
그가 무법지대의 왕들을 이끌고 나타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