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6화.
참(斬).
찌르기와 함께 검의 근본이 되는 기본.
검사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참(斬)을 해보았을 만큼 간단하나, 깊게 파고들수록 그 심오함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기본기가 가장 중요함을, 그리고 자신의 기본기는 아직 완벽하지 못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참격과 찌르기. 두 기술을 지배하고서야 비로소 경지에 접어들 수 있으리라.
칠강(七江)의 검이자 대륙제일검.
검황(劍皇), 가필드 드류조차 그리 말할 정도.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검사의 말이니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아…….”
시르간 또한 그 이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스으으-
호흡마저 검과 함께 내쉬는 듯 정갈해진 순간.
신기루처럼 흩어지던 그녀의 신형이 더없이 또렷해졌다.
마치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을 불태우듯 그녀의 동작이 생생하게 다가온 것이다.
하나 그것조차 그녀가 의도한 것이었음을 그는 조금 늦게 자각했고.
서걱-
그땐 이미 목을 베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시르간은 여전히 넋을 잃은 채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답다…….’
완벽한 참격.
그것은 이토록이나 아름다울 수 있구나를 깨달은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가는 시야 너머로 검붉은 피가 방울방울 허공에 떠오르더니 꽃을 피우듯 허공을 수놓았다.
“일도양단.”
이윽고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무심하게 들려온 순간.
촤아악-!
반 박자 늦게 베였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아직 그녀가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는 것을 보지 못했건만.
끝내 검이 벤 궤도를 따라 피어나는 무언가를 보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플레이어 ‘시르간’님을 처치하였습니다.]
[대상의 카르마 지수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빌런으로 판정되어 선제 공격 페널티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스릉-
메시지를 확인한 검성이 천천히 낮추었던 자세를 펴고, 검을 집어넣었다.
[시그니처 특성 ‘무위검(無爲劍)’을 시전하였습니다.]
[무위검(無爲劍)]
-등급 : 시그니처 특성
-설명 : 검에 평생을 바친 자만이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경지.
검을 휘두름에 있어 어떠한 이질감이 없이 자연의 흐름에 따라 행하라.
심신이 완벽히 하나가 되어 검이 곧 몸이고, 몸이 곧 검이 되었을 때. 비로소 무위(無爲)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효과 : 조건을 충족한 검술에 무위(無爲)의 기운을 담아내어 한 단계 위의 경지를 얻으며 추가 효과를 적용시킨다.
[현재 무위검(無爲劍)을 적용할 수 있는 검술은 2개입니다.]
방금 그녀가 구사한 것은 단순히 시그니처 특성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그니처 특성은 조건부에 해당하는 능력.
시그니처 검술을 발동하였을 때에서야 비로소 발동할 수 있던 탓이었다.
그렇게 무위검을 적용하여 발동한 마지막 검격은…….
[‘신검합일(身劍合一)’을 발동합니다.]
[검과 하나가 되어 극한의 검술을 펼쳐냅니다.]
[일시적으로 보유한 검술의 위력이 최대치로 발휘됩니다.]
[‘일도양단(一刀兩斷)’이 한계를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충분한 경지의 검술입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시그니처 특성 ‘무위검(無爲劍)’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이 한 단계 위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상태로 가한 검격에 추가 효과 ‘섬영참(閃影斬)’이 적용됩니다.]
[재빠른 검격을 가할 시 잔상이 남아 닿는 모든 것을 베어냅니다. 이때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은 대상조차 베어낼 수 있습니다.]
신검합일(身劍合一)
가장 처음 무위검(無爲劍)을 적용시키는 것에 성공한 검술.
신검합일의 특성상 검술을 발동할 때 검과 가장 큰 교감을 나누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빠르게 적용할 수 있던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호재라 할 수 있었다.
신검합일은 하나의 검술이라기보단, 검과 하나가 되어 다른 검술들의 위력을 높이는 기술.
사실상 모든 검술에 적용할 수 있는 버프형 검술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무위검과의 시너지도 엄청났고, 그렇게 발동된 좀 전의 검격은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지만…….
“쯧.”
정작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실전에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아직 수련이 부족하군.”
가장 처음 경지에 오른 신검합일조차 완벽하지 못하다면, 무위검을 적용할 수 있는 두 번째 검술을 발동했을 때의 완성도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훈련에서는 완벽에 가까웠던 걸 생각하면, 역시 훈련과 실전은 다른 법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다시 폭포수에 처박힐 생각부터 하진 않았다.
담금질을 위해서는 뜨거운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야 하듯.
지금부터는 수련이 아닌, 실전을 통해서만 완성시킬 수 있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잡념을 거둔 그녀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시르간의 흔적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법 나쁘지 않았다.”
비록 상대가 기대에 미치진 못했으나, 유저 중에선 실로 오랜만에 만난 진짜 검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하여튼 새끼, 여유 부리기는.”
고운 목소리와 맞지 않는 천박한 말투에 여운이 와장창 깨진 검성이 쯧 혀를 찼다.
“……너도 끝났나.”
“진작 잡았지. 그보다…… 마지막에 보여준 게 시그니처 특성인가 보네? 제법 멋진데. 나한테는 언제 써보냐? 몸이 근질근질하네.”
좀 전까지 싸우던 사람이 맞는지, 이 와중에도 호승심을 불태우는 여제의 모습에 검성이 피식 웃었다.
평소라면 허튼 소리 한다며 무시했겠지만…….
“원한다면 지금도 가능하다.”
“올, 웬일로 안 빼네? 늘 거절만 하더니.”
“……네가 지금까지 대련을 신청했을 때 상황들을 떠올려라, 꾸꾸. 정녕 대련하기에 적합한 상황이었는지.”
“음.”
자신이 대련을 신청했을 때라…….
가장 최근엔 호프집에서 꺼냈던 거 같고.
조금씩 과거로 되짚어가자면…… 저 녀석이 수련 중일 때 폭포수를 뚫고 쳐들어갔을 때나, 함께 중대형 길드를 상대로 참교육을 시전하던 중 삘 받아서 대련을 신청했을 때.
그리고 녀석이 검황과 만나고 있을 때랑 재앙의 탑에서 정도?
“문제없던 거 같은데? ”
“……후우. 그래, 너와 말이 통하길 기대한 게 잘못이겠지.”
“아, 그래서 싸운다고 만다고.”
“분명 좀 전에 동의한 것으로 기억한다만.”
“그럼 지금 바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주먹을 우드득 푸는 여제의 말을 끊으며, 검성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단, 이곳을 나간 후에.”
“뭐? 왜?”
“저길 봐라. 네 눈엔 전투 중인 동료들이 보이지 않나?”
그녀가 턱짓한 곳을 바라보니, 한창 전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두 동료가 보였다.
아스트와 카이저.
두 사람이 각자 맡은 빌런들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콰앙! 콰아아앙!
아스트가 묵직한 철퇴를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터져나가며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카르마일이 클로를 휘두를 때마다 아스트의 몸에 긴 상처가 새겨진다.
화르르-!
붉은 악마라 불리는 남자.
아시온이 검붉은 날개를 펼치며 허공에 날아오르면, 그 등에 매달려 집요하게 쫓는 도현.
결국, 바닥에 나뒹굴어 한데 엉켜 구르며 지면이 불길로 뒤덮였다.
치열하다 못해 장렬한 전투들.
“오, 쟤들은 좀 친다?”
“……음, 아시온이라고 했나. 특히 저 남자의 실력이 상당하군. 능력치나 장비도 상당해 보이고…… 지금의 카이저로선 힘겨루기가 성립이 안 될 것 같다.”
“카르마? 카라마일? 저 녀석도 움직임이 좋은데? 검기를 날리는 클로라…… 단순히 속도만이 아니라 중거리에 특화된 거 같은데 아재랑은 완전히 상극이야.”
한 마디로 태생부터 불리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
보통이라면 동료들을 도우러 간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게 정상이지만, 두 여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제자리에 멈춰섰다.
“여기가 좋겠네.”
“마침 이곳에 부서진 지형이 있다니, 운이 좋았어.”
“다 이 누님이 이런 상황까지 계산한 거 아니겠냐.”
“허튼 소리.”
“어어, 카이저 밀린다. 빨리 안 올라오면 전투 끝난다?”
“……지금 올라간다.”
심지어는 피해가 오지 않는 선에서 전투가 가장 잘 보이는 명당을 찾아가더니, 아예 각 잡고 관전하는 두 사람이었다.
“누가 먼저 끝낼 거 같냐?”
“글쎄. 이전이었다면 카이저 쪽에 걸겠다만…… 지금은 둘 다 밀리는 상황이라 쉽지 않군.”
“그럼 넌 아재랑 카이저가 둘 다 발리는 쪽으로?”
“흐음.”
검성이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현장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누구를 데리고 와도, 동료들이 밀리고 있다는 것에 손목을 걸 만큼 불리한 상황.
“역배에 걸지.”
그에 검성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여제 또한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시원하게 웃었다.
“이럼 나가린데. 나도 같은 쪽이거든.”
“쯧. 내기를 하진 못하겠군.”
“어? 아쉬워 보이는데? 너도 어째 내기에 맛 들린 거 같다?”
“……흠흠. 착각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오랜 세월 동료들과 함께했던 그녀들로서, 저 두 사람이 이 정도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쯤이야 너무도 많이 봐왔던 것이다.
한데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크윽…….”
요란하게 울린 굉음에 고개를 돌린 그녀들이 탄성을 흘렸다.
“어라? 이건 의외인데…….”
“……두 사람이 바뀐 게 익숙한 그림인데 놀랍군.”
“이거, 이럼 내기할 만할지도?”
양쪽의 전투 진영에서 각자 한 명씩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 구도가 그녀들의 예상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아오, 이 날파리 새끼들은 하는 짓이 다 똑같냐. 성가셔 죽는 줄 알았네.”
“커헉…….”
우선 도현 일행에게 호재인 쪽은 아스트가 승기를 잡은 점이었다.
중거리에서 클로를 휘둘러 강력한 손톱 모양 검기를 사정없이 날려대는 속도 특화 무도가 직업군.
[초월 고유 능력 ‘단공섬(斷空閃)’의 효과로 중거리 공격의 위력과 속도가 2.5배 상승합니다.]
[초월 특성 ‘천리참(千里斬)’의 효과로 중거리 공격의 범위가 2배 상승합니다.]
오직 카르마일만이 보유한 초월 고유 능력 단공섬과 중거리에 특화된 초월 특성 천리참.
이것의 조화로 카르마일은 독보적이면서도 가장 개성 넘치는 스타일의 무도가라 할 수 있었다.
근접전을 벌이는 일반적인 속도 특화의 무도가들한테조차 불리한 상성을 탄 게 아스트건만.
근접도 아닌, 중거리에서 싸우는 무도가가 상대다?
아무리 스매쉬가 있다 해도 모두가 다소 애먹을 걸 예상하고 있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무릎을 꿇은 건 카르마일이었다.
“크윽, 어떻게…….”
“어떻게 공격 루트를 예상했냐고? 인마, 내가 피X츄 그 년이랑 싸운 횟수만 천 번이 넘어가. 속도캐인 놈들은 하나같이 나만 보면 괴롭힐 생각부터 하고 보는데 대처법 하나 없겠냐? 이젠 뻔하다, 뻔해.”
질린다는 듯 투덜거리며 아스트가 누군가에게 들은 말들을 떠올렸다.
-새로운 기술을 배워왔다. 실험 좀 하고 가도록 하지.
-샌드백, 이리 오도록.
-이번엔 중거리 기술이다. 뇌룡강림과 제법 합이 좋을 것 같더구나.
-오늘도 좋은 샌드백이었다. 반응이 조금 빠릿빠릿해졌더구나. 다음번엔 새로운 걸 들고 올 테니 기대하도록.
아무리 재능이 없는 아스트라도 매번 상성인 상대한테 하루가 멀다 하고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처맞다 보면, 대처법을 몸이 알아서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한편 아스트가 승기를 잡고 있는 반면…….
화륵-
저벅, 저벅.
화마에 집어 삼켜진 듯 거센 불길이 들끓는 지면 위.
“카이저, 겨우 이게 끝이냐?”
“…….”
고고하게 선 채 내려다보는 아시온의 앞에, 카이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