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8화.
이쯤이면 포기할 법도 하건만.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고, 천변을 도로 쥐는 도현의 모습에 아시온이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학습력이 없는 거냐. 계속해서 반복될 뿐인 것을…… 이런 놈한테 진 라온, 그놈도 안 봐도 훤하겠어. 내 뒤를 이은 놈이 이런 놈에게 져서야 자격이 없다.”
“라온이라…….”
“……뭐가 그리 우습지?”
피식거리는 도현이 거슬렸던 걸까.
아시온의 목소리가 사납게 다가온다.
저 거대한 남자가 저러니 난폭한 기세가 물씬 풍겨 왔지만, 도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 미안. 어째 하는 짓이 똑같다 싶어서 말이야.”
“?”
“그래서 후임자인 건가? 그 자리 전통이었나 보네.”
“……무슨 뜻이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묘하게 기분이 더러웠던 아시온이 성큼 다가왔다.
화륵-
그러자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불길이 거칠게 넘실거리며 위협했다.
그 모습에 도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와, 생각해 보니 이것까지 비슷하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같잖은 도발을 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우…….”
“무슨 말이긴. 네가 그리 욕하는 라온이랑 너랑 별다를 거 없이 똑같다고.”
“허.”
아시온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더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묻는 걸 그만두었다.
그저 도발하기 위해 떠드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장기전으론 답이 없으니, 자신이 흥분해서 달려들길 바란 거겠지.
‘이제 알겠군.’
라온인가 하는 놈이 진 이유.
‘저 세 치 혀에 넘어간 건가. 불 같은 성격이라 했으니, 좋다고 넘어갔겠지. 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었을 테고.’
아무래도 다른 왕들과 달리, 빈자리를 차지한 왕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에게도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아주 큰 오산이었다.
아시온, 그는 지금의 무법지대를 만든 것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봐도 무방할 정도의 뼈대 있는 개국공신이자,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빌런.
하물며 은퇴도 자신의 의지였을 뿐.
‘그깟 완성된 길드에 끼어든 반쪽짜리 왕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지금 복귀한다 해도 왕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지장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이곳에 모인 왕들보다 더 높은 급에 있었을 거라 확신한다.
어쩌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지금보다도 더욱 강해졌을 수도 있겠지.
그랬다면 이까짓 놈쯤이야 굳이 장기전으로 끌고 가지 않고 무참하게 도륙 냈을 것이다.
그게 아시온의 입장이었지만…….
“……무참하게 도륙? 압도적으로 이겨?”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도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뒤를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보다 더욱 낮고 섬뜩했다.
“왕으로 다시 복귀했으면…… 너 숨도 못 쉬고 뒤졌어.”
“……허세가 심하군.”
농도 짙은 살기.
그리고 그 안에 더욱 짙게 담겨 있는 확신에 순간 움찔한 아시온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아주 찰나지만, 저놈의 기세에 집어삼켜졌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던 걸 뒤늦게 자각하고 멈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누가 봐도 자신의 우세건만.
어느 뱀이 잡아먹히기 전의 개구리에게 겁을 먹는단 말인가?
만약 하룻강아지에게 겁먹은 사자가 있다면, 그 사자는 무리 내에서 소외될 것이다.
그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자 황당한 일이었으니까.
‘……뭐지? 저놈.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
아시온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일까?
자연스레 한 가지 가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아주 만약에.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던 놈이 개가 아닌, 개의 탈을 쓴 호랑이였다면?
개구리는 미끼고, 실은 개구리를 미끼 삼아 뒤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인간이라면?
즉, 지금 보인 모습이 모두 연기거나 전략이라면?
그렇다면 좀 전의 섬뜩함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아니, 그럴 리는 없지. 카이저, 저놈의 정보는 이제 대부분 다 알려져 있으니까.’
놈이 가진 웬만한 기술은 다 보았다.
스펙이 자신에게 크게 밀린다는 것도, 직접 부딪쳐 보니 더 확실하게 와닿았고.
다만, 느낌이 좋지 않은 건 사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빨리 끝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간다.’
아시온의 장점은 높은 유지력과 체급.
그리고 공중전이 가능한 마법사이자, 권사(무투 계열)라는 것.
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말려 죽이는 것이 그의 장점이자 가장 확실한 승리 플랜이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불길함 하나로, 이 장점을 포기하고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피식.
‘표정에 다 드러나는 것 봐라.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는데 자존심도 상하고, 지금까지 잘 이겨 왔으니 하던 대로 하겠다 이거겠지.’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도현이 웃은 이유.
그것은 같잖은 도발 따위가 아닌, 정말로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불 능력을 다루는 거. 그리고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똑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 것까지 똑같냐.’
아마 두 사람 다 너무도 사기적인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이 그 이유겠지.
압도적인 성능을 지닌 만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감이 그 누구보다도 높을 테니.
‘레이드면 모를까, PVP에서 약점 없는 능력은 없는 건데 말이지.’
언제든 카운터를 당할 수 있고, 반대로 카운터를 칠 수도 있다.
아쉬운 게 있다면 라온 때와 달리, 저놈을 상대론 ‘악연의 장’을 펼칠 수 없어서 정말로 카운터를 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도현이 재앙의 탑에서 얻은 건, 시그니처 특성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분명하게 얻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시그니처 특성보다도 더욱 중요하고 강력할지도 모를 것을.
[‘뇌룡강림(雷龍降臨)’의 쿨타임이 끝났습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설 스킬, ‘뇌룡강림(雷龍降臨)’을 발동합니다.]
콰릉-!!
파앙! 파지직-
푸른 뇌룡이 내리꽂히며 주변 일대를 집어삼킨 것과 동시에, 일순 도현의 신형이 사라졌다.
“또 뇌전 이동이냐! 그건 더 이상 안 통한…….”
“빡대가린가. 뇌전 이동을 넌 땅을 박차면서 쓰냐?”
“……?”
아시온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뇌전 이동은 말 그대로 한 줄기 번개가 되어 이동하는 뇌룡강림의 추가 기술.
한데 방금의 카이저는 분명 땅을 박차며 튀어 나가지 않았던가?
‘몸을 휘감은 번개도 무언가 이상…… 아.’
아시온의 눈이 부릅뜨였다.
무엇이 이상한지 발견한 것이다.
……번개!
‘번개가 어째서 다리에만 모여 있는 거냐!’
전신을 휘감아야 할 번개가 집요하게 놈의 다리 부근만 휘감고 있었다.
거센 푸른 번개가 골반부터 내려와 허벅다리와 종아리, 발목을 타고 지면으로 흐르는 모양새가 꽤나 섬뜩했다.
파지지직-!
심지어 거리가 좁혀질수록 놈의 다리를 휘감은 번개의 크기가 더욱 크고, 화려해지고 있다.
‘이게 무슨…….’
아시온은 수많은 무투가들을 만나왔다.
당연히 그중에는 뇌룡강림을 사용하는 무투가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정말 수없이 많이 뇌룡강림을 봐왔다.
비록 자신은 마법사에 보다 가까운 하이브리드 직업이다 보니 뇌룡강림 같은 메인 무투가 스킬은 써 보지 않았지만, 타 직업보다는 뇌룡강림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건 처음이었다.
‘저런 식으로 발동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스킬이, 난생 처음 보는 형태로 돌아오니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건 당연했다.
이건 단순한 뇌룡강림이 아닌, 오직 도현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특수한 뇌룡강림이었으니까.
[추가 부여 능력 ‘뇌룡(雷龍)’을 발동하였습니다.]
[뇌룡(雷龍)의 두 번째 능력 ‘집중’을 시전하여 뇌룡으로 부여한 증폭된 기운을 한곳에 집중시킵니다.]
[발동 시 증폭된 기운을 모두 소모하기에 추가로 부여된 증폭 효과가 삭제됩니다.]
무려 최상급 추가 능력 뽑기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뇌룡강림의 히든카드.
뇌룡(雷龍).
[뇌룡(雷龍)의 기운을 하체에 집중하였습니다.]
그것의 두 번째 효과가 적용된 이펙트였으니까.
이전에는 뇌룡(雷龍)의 기운을 검에 적용하여 극강의 쾌검을 자랑하는 일직선 베기인 ‘뇌섬’을 시전했었다.
그래도 고기도 씹어 본 놈이 잘 안다고.
‘다리에 사용해도 얼추 비슷한 효과겠지.’
한번 사용해 보니 감이 와서 하체에 사용한 건데, 다행히 예상이 얼추 비슷하게 적중했다.
[‘뇌각’을 사용합니다.]
[하체에 뇌룡의 기운을 집중시켜 폭발적인 기동력을 얻습니다.]
[이동한 거리에 따라 기운이 점차 커지며 최대 중첩 상태가 되었을 시 ‘질뢰섬멸각(疾雷殲滅脚)’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발동된 능력은 정말로 폭발적인 기동력을 선사해 주었으니까.
순간 속도는 뇌전 이동보다 느리지만, 이건 기동력 자체를 끌어올려 주는 기술.
파지직- 파직!
“이 무슨…….”
“네가 자랑하는 화염 능력들. 범위만 넓었지 하나같이 느려 터진 건 아냐? 이래서야 맞출 수나 있겠어?”
빠른 대신 직선상의 이동만 되는 탓에 이동 경로가 뻔했던 뇌전 이동과 달리, 엄청난 속도로 전장을 누비는 도현의 속도를 쉽사리 따라잡기란 힘들었다.
실제로 날개를 펄럭여 불길을 일으킬 땐, 이미 도현은 반대쪽까지 이동한 후였다.
그것도 단순히 이동만 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뒤통수를 한 대 천변으로 후려치기까지 했다.
퍼엉! 펑! 펑!
“이런 건방진 놈이!”
결국 눈이 돌아간 아시온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지면을 향해 마구잡이로 마법을 퍼부었다.
신화신에게 받은 전설급 무구, ‘종말의 불꽃’으로 인해, 즉발에 가까운 캐스팅 속도로 발동되기에 가능한 연사였다.
파지직-
하나 도현은 약 오르게도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모두 피해 냈다.
범위기다 보니 그 여파로 조금씩 피해를 입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정도로 아시온의 속은 풀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10초가 넘은 시간이 흘렀을 즘.
타앗!
줄곧 피해 다니던 도현이 돌연 땅을 박차며 크게 도약했다.
“!?”
갑자기 달려들 줄은 예상치 못한 걸까.
어찌나 빠른지 그야말로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아시온이 당황한 것도 잠시.
다급히 날개를 펄럭여 뒤로 크게 물러났다.
왕 출신 빌런답게 신속한 판단이었지만, 도현은 도리어 그 반응을 원했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늦었어.”
“뭐?”
“눈 감는 게 좋을 거다.”
“무슨……!?”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눈에 띈 무언가에 아시온의 표정이 멍해졌다.
도현의 다리를 휘감은 뇌룡의 기운.
‘……저게 저렇게 컸던가?’
그것이 더 이상 휘감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의심될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마치 눈앞에 달이 떠 있는 듯한 기분.
실제로 놈이 앞에 있는 것만으로 그런 착각이 들 만큼 밤하늘이 은은하게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동 거리가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최대 중첩 상태가 되어 ‘질뢰섬멸각(疾雷殲滅脚)’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질뢰섬멸각(疾雷殲滅脚)’을 시전합니다.]
도현이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내려찍기를 가했고,
—-!!
폭발에 가까운 크기의 화려한 스파크가 튀며, 시야가 요동치듯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