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0화.
언제부터일까?
검에 희미한 빛이 깃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면 그 빛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지만, 조금씩 짙어져 간다는 걸 느낄 때부터?
[다음 경지에 한 발짝 다가섭니다.]
[일시적으로 격이 상승합니다.]
[상대가 격의 차이에 눌려 본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대상의 불꽃을 베어내었습니다.]
[불길이 잦아들며 상대가 받고 있는 버프 효과가 미약해집니다.]
그도 아니면 무언가 너머의 경지에 한 발짝 다가서고 있음을 자각했을 때?
그래, 이때부터일지도 모른다.
‘느려.’
마치 UFC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송출할 때처럼 느릿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인지 능력만 멀쩡한 느낌.
정말로 그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세포 하나하나가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반응했으며, 감각 또한 슬로우 비디오처럼 생생하고 뚜렷하게 전해졌으니까.
하지만…….
‘아직 부족해,’
지금의 이 느낌조차 데미서스와의 결전 때에 비하면 부족했다.
종이 한 장 차이…… 아니, 종이 세 장 정도 차이로 채워지지 않는 느낌.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집중하면 채워질 것 같은데.
쉬익- 쉭!
아무리 속도를 높이고, 집중력을 키워봐도 도무지 그 빈 공간이 채워지지 않는다.
당장 채울 수 있는 그릇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마치 그때와는 다른 크기의 우물에 물을 담고 있는 것만 같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조급함을 느낀 것일까.
쇄애액-! 촥!
“……! 여기서 더 빨라진다고?”
누군가에게 쫓기듯 도현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건 한 단계 빨라지고 마는 게 아닌, 검을 받아낼수록 가속이라도 붙는 듯 점차 속도가 붙는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도현의 집중력은 극에 달했고.
사아-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소리가 멎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검을 휘두를 때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검을 휘두를 때의 호흡이 어떤지.
이전에는 자각하지 않고 행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촤악- 촥!
그럴수록 천변은 더욱 짙은 빛을 띠었다.
불꽃이든, 신체든 저 검에 닿는 순간 종이 잘려나가듯 손쉽게 잘려나갔으며 더 이상 일대를 뒤덮은 불길은 큰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Just fuck off, you son of a bitch!”
오죽 당혹스러웠으면 아시온의 입에서 본토의 욕이 걸쭉하게 튀어나왔지만, 그마저도 도현의 귀에는 드리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것에만 집중할 뿐.
지금 이 순간.
그저 천변을 휘두를 때마다 그어지는 희미한 빛의 선과, 그 주위로 피어오르는 아시온의 불꽃만이 존재했다.
그야말로 물아일체의 경지.
“저건…… 설마 경지에 들어선 건가?”
그에 구경하던 검성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백옥처럼 하얀 피부가 다소 붉게 상기된 것이 흥분한 기색마저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여제가 불쑥 물었다.
“경지? 네가 맨날 말하던 그 검의 끝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건 말 그대로 검의 끝.”
“? 뭐가 다른 거야? 검의 끝에 도달한 게 경지인지 뭔지 하는 거 아닌가?”
따로 무예를 배워본 적이 없는 여제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의 전투방식은 그야말로 날 것 그 자체. 마치 맹수가 누군가에게 따로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사냥법을 알듯이.
그녀 또한 미친 피지컬을 통해 초근접전을 벌여오며 자신의 강점을 살려왔던 것이다.
무학을 따로 깊게 파고들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무예의 경지에 오른 게 무슨 느낌인지 알 턱이 없었다.
“쯧. 검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배워보라 조언해도 듣지 않으니…… 도통 말이 통하지가 않는군.”
“늘 말하지만 난 안 배워서 센 거라니까. 형식이 존재하는 무술이 다 무슨 의미야? 어차피 내 영역에선 그런 형태나 자세 같은 걸 잡지도 못하는데.”
“…….”
건방지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말이었지만, 검성은 반박할 수 없었다.
재수 없지만 녀석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제는 야수 그 자체.
자유를 추구하는 그녀의 성향답게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지금의 전투방식이 오히려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는 저 모든 방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는 카이저조차 따라 하지 않는, 오직 그녀만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무예라 볼 수 있는 ‘검술’의 끝을 향해 달리는 자신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상반된 녀석.
“쯧.”
하여간 해괴한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혀를 찬 그녀가,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다.
“……조금 전의 물음에 답하자면 엄연히 다르다. 검의 끝은 경지 그 너머의 무언가라고 할 수 있는 영역. 경지에 도달한 수준을 넘어 경지의 끝에 도달한 것이지.”
“호오, 그러니까. 그 말은 쟤가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자격 같은 걸 얻었다는 거네?”
“자격…… 그래, 그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피식 웃은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도현을 흐뭇함 반, 놀라움 반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 하나의 검술만을 알려주었을 뿐인데 못 본 새 경지에 접어들 정도로 성장하다니…… 하여튼 난 놈이로군.”
“저 새끼가 이전보다 더 성장했다라…… 흥분되네.”
여제 또한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 죽겠다는 듯 손을 우드득 풀며, 도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는 듯 손을 부르르 떨면서.
콰앙! 쾅!!
“크어억!”
“어우, 이 새끼도 질기네. 우리도 좀 이쯤에서 끝내자 좀!”
“아니, 쓰러지는 건 네 놈이다, 무기고의 주인! 크아아아!!”
“오냐, 아주 죽자 오늘.”
한편에서 죽어라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아재에겐 미안하지만,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도현과 아시온을 향해있을 뿐이었다.
뎀로크 시절 전설급 스킬 하나 없이 랭킹 1위에 도달했을 만큼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도현.
그가 틀을 깨고 한 발짝 더 성장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직관하고 있다는 것에서 가슴 속 깊이 흥분감과 기대감이 차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변화가 일어난 건 그때였다.
파앗-!!
“어?”
“! 저건……?”
도현에게서 광채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녀들도 익히 아는 빛이었다.
하나 그 익숙한 빛은 그녀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저건 초월의 빛이잖아! 저걸 벌써 깼다고?”
“과연, 검술의 경지에 오른 게, 자신만의 검술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건가.”
“아니, 그보다 저 정도 빛이면…… 최소 대박 아니냐?”
더 놀라운 건 점점 더 도현에게서 뿜어지는 빛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녀들이 초월 특성을 얻었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건만…… 저 정도면 최소한 최상위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얻게 될지도…….’
이를테면 자신들과 같은 ‘유일급 초월 특성’ 말이다.
경지에 접어든 것도 부족하여 정상급 레벨의 초월 특성까지 얻는다?
이번 전투 이후 얼마나 강해졌을지를 생각하니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어쩌면 이젠 대련을 해도 더 이상 힘 조절을 하지 않아도 될 수준에 도달할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불헌 듯 떠오르던 그 순간.
—-!!
마치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낸 듯, 거센 빛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에 구경하던 그녀들이나, 당사자인 도현과 아시온.
“크윽! 이건 또 뭐냐!”
“……카이저? 쟨 또 뭘 일으키고 있는 거야?”
심지어는 반대편에서 싸우고 있던 아스트와 카르마일까지 일순 하던 걸 멈추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빛이 그쳤을 때, 그들은 보았다.
촤악-!
빛무리를 그리며 아시온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도현의 모습을.
* * *
정갈하고 세련된 궤도의 상단 베기.
가히 검의 경지에 오른자답게 예리하고 섬뜩하다.
카앙! 캉!
촤악!
특별한 기술은 없었다.
상단 베기, 하단 베기, 사선 베기…….
베는 곳과 위치에 차이가 있을 뿐, 베기의 연속일 뿐이었으니까.
검술을 배우지 않은 이들조차 할 수 있는 검술의 기본기들.
서걱-
‘이게 무슨……!’
하나 정작 그 기본기를 상대하는 아시온의 동공은 쉴 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기본기?
검을 처음 잡아본 사람도 할 줄 아는 베기?
‘저건’ 겨우 그런 게 아니었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방일체의 경지는 많이 보았지만, 저놈의 검은 그걸 뛰어 넘어있었다.
[패링에 성공하였습니다.]
[공격을 흘려냅니다.]
단순히 방어를 넘어서 흘려낸다.
그저 공격의 연속일 뿐인 것 같은데 빈틈이 없다.
빈틈이라 생각해서 놈의 검과 맞대면 파도에 휩쓸리듯 무력하게 흘려진다.
원래도 패링의 독보적인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게 가능한 영역인가? 어떻게 잠깐 사이 이렇게까지 활용이 가능하단 말이냐.’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녀석의 패링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다.
패링을 할 때는 오직 패링만 가능했던 것이다.
공격 동작과 방어 동작, 그리고 패링 동작이 모두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쉬익- 캉!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언뜻 보면 무대포로 몰아붙이는 듯한 검이, 귀신같이 아시온의 공간을 잡아먹어 공격 흐름을 끊어내어 방어라는 결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건 패링 또한 마찬가지였다.
휘릭, 서걱!
패링과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지고, 공격과 동시에 패링이 이루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두 동작이 아닌, 한 동작으로 행해진 결과이니.
그것을 도현 또한 느끼고 있었다.
‘아. 이게 검술의 힘인가?’
검성에게 배운 단 하나의 검술의 묘리.
유능제강.
그것을 통해 검술의 힘을 일찍이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유능제강을 발휘했을 때뿐.
일종의 스킬을 쓰듯이, 유능제강을 사용할 때만 체감이 되었다면…… .
‘패링뿐만이 아니야. 늘 하던 공격들이 더 날카로워졌어.’
이건 패시브에 가까웠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궤도가 보이고,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움직임이 떠오른다.
그로 인해 패링을 비롯한 각종 스킬들의 활용력이 비교도 안 되게 달라졌다.
‘재밌어.’
이 정도였던 건가?
검술의 경지에 접어든 사람이 보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는 세상의 차이가.
어째서 검성 녀석이 검술에 그리 집착하는지 알 것 같다.
녀석은 이런 카타르시스를 몇 번이나 느껴왔던 것 아닌가. 하물며 검에 있어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러이니, 당연히 중독될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도현은 운이 좋았다.
스으-
마치 세상이 느려진 듯, 세포 하나하나가 극한까지 활성화된 지금.
이 짜릿한 변화를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니, 데미서스 때와 흡사한 상태이기에 이런 움직임들이 가능한 건가?
집중 상태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휘릭, 서걱-!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신난 아이처럼 검을 휘두를 뿐.
그에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크게 백스텝을 밝은 아시온이, 도망치듯 위로 날아올랐다.
마치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 꽁지 빠지게 날아간 까마귀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아시온에겐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저 괴물 같은 자식……!’
더 이상의 맞상대는 안 된다.
근접전을 이어갈수록, 저놈의 검이 한층 더 정교해지는 게 느껴지는 것이다.
[역경을 헤쳐가는 남자의 검이 의지를 받들어 불길을 베어냅니다.]
심지어 놈의 검은 그가 자랑하는 불길마저 허망하기만큼 쉽게 갈라낸다.
놈은 지금 깨달음을 얻으며 일종의 각성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이니, 차라리 놈이 집중을 잃을 때까지 최대한 도망 다니며 공격하는 게 맞았다.
치사하지만 현재로서 가장 적합한 전략.
과거 정점급 빌런이었던 자다운 냉철한 판단이었지만, 아시온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놈의 몸에서 뿜어졌던 찬란한 광채.
그것이 무엇을 뜻했었는지.
띠링-
그리고 아직 도현이, 그것을 통해 얻은 걸 발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시온이 공중으로 떠오른 것과 동시에 울린 경쾌한 알림에, 현혹되듯 멍했던 상태에서 깨어난 도현이 눈을 빛냈다.
[자신만의 경지를 이루어 한계를 깨우쳤습니다.]
[극(極)에 달한 검술로 인해 경지가 열렸습니다.]
[검술 숙련도가 LV61이 되었습니다.]
[히든 초월 퀘스트 ‘극(極)에 달한 무기술’을 완수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첫 번째 초월을 통해 존재의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특성 ‘웨폰 마스터’의 초월 특성을 획득합니다.]
[현재로서 유일한 히든 초월 퀘스트를 완수하여 최초의 초월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좀 전부터 떠 있던 시스템창들.
하지만 도현이 보는 건 그것들이 아니었다.
경쾌한 알림과 함께 그 뒤에 떠오른 한 줄기 메시지 창.
[발동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특성 ‘웨폰 마스터’의 초월 특성 ‘……’을 시전합니다.]
씨익.
‘이거지.’
도현의 첫 초월 특성이 발동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