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4화.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발생 예정이었던 이벤트가 삭제되고, 숨겨진 루트의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돌발 이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숨겨진 루트의 돌발 이벤트.
이는 일전에도 본 적 있는 문구였다.
다름 아닌 프라텔에서 길베룬과 안젤라의 퀘스트를 깰 때, 진정한 등불 축제가 열리기 전 떠오른 문구.
그리고 제국의 1황자가 있던 무덤을 찾았을 때나, 그 외의 몇몇 순간에도 보았던 문구.
‘……!’
그렇기에 도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숨겨진 루트의 이벤트는 여타 다른 히든 피스와 비교해도, 더욱 중요도가 높은 종류의 것이라고.
도현이 경험했던 숨겨진 루트의 이벤트가 하나같이 거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이벤트에는 필연적으로 발생 조건이 있었고,
[르시아의 왼쪽 팔]
지금 상황에서 조건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르시아의 왼쪽 팔을 인벤토리에서 꺼내어 루팔로에게 보여 준 순간, 귀신같이 이벤트가 발생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그, 그건……! 설마 르시아의 팔?
루팔로가 당황하다 못해 경악하며 말을 더듬은 것이다.
라그 베헤모스의 거대한 눈동자가 하늘을 집어삼키는 걸 실시간으로 볼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건만.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감이 확 온다.
‘이거 대박 건수다.’
예상보다 더 엄청난 이벤트가 될 것이라는 감이.
그렇기에 도현은 차분히 기다렸다.
가만히 서서 루팔로가 진정하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그러한 배려 덕일까.
생각보다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은 루팔로가 특유의 신비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마석을 파괴하니 나타났다 했나?
하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렇게 된 건가. 침입자들의 수장, 그와의 결전에서 그녀가 한쪽 팔을 잃은 건 알고 있었다만…… 설마 그 팔을 매개체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영물답게, 짤막한 설명만으로도 순식간에 전후 상황을 유추해 내는 모습.
그 예측은 도현이 듣기에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아니, 그것 말곤 답이 없었다.
그 수장이란 놈이 뒤틀린 예술혼이 있어 잘린 팔을 마석 안에 숨겨 두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가 아니고서야,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봉인을 지키려는 우리의 심리를 이용한 건가. 봉인을 지키려 애쓸수록, 도리어 놈들의 계획을 돕는 꼴이었다니…… 완전히 이용당했구나.
“…….”
-우리가 의심하지 못하도록, 잔재를 미끼로 뿌리며 꾸준히 결계를 약화시킨 것이지. 결계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그뿐이랴.
마석을 부수었음에도 라그 베헤모스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걸 보면, 도현이 부순 마석이 끝이 아닐 것이다.
아마 그 마석에서 흡수한 힘을 이어받을 무언가가 있을 터.
-이 어찌나 치밀하고 위험한 자인가.
경탄하는 루팔로에게서 분노보다는 자책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어째서 의심하지 않았는지.
왜 발상의 전환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는지. 어째서 자신이 잘 대처하고 있다고 믿었는지.
모든 것이 자기 탓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후우…….
하나 루팔로는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영물.
그의 고귀한 영혼은 마음껏 자책할 수도 없게, 금세 심장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한때는 이 점으로 인해 슬퍼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미안하군. 이런 상황에 자책에 시간을 쓰다니.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간단하게 하도록 하지.
이런 긴급 상황에선 빠른 상황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진지해진 루팔로의 목소리에 도현을 비롯해 일행들도 호들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본디 우리가 봉인이 깨어지지 않게 지키던 이유는 놈들이 베헤모스의 심장을 되찾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베헤모스의 심장은 결코 부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심장이 더는 의미가 없어진 지금.
구태여 르시아가 봉인된 채 놔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치명상을 입은 상태라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인데…….
말끝을 흐린 루팔로의 시선이, 허공에 떠 있는 르시아의 왼쪽 팔을 향했다.
어딘가 긴장한 듯 보이던 그가 조심히 말을 이었다.
-그 팔이 있다면…… 어쩌면 혹시 모르지.
-확신은 못한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놈들이 팔에 숨겨 둔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치밀한 자이니까.
루팔로는 묻고 있었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
그리고 도현의 답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괜찮습니다. 보내 주세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것이야말로 도현이 걸어온 길 그 자체였으니까.
일말의 고민 없는 대답. 그리고 그에 걸맞는 확고한 눈빛을 보며 루팔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친우여.
그것으로 끝이었다.
루팔로가 무어라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영창을 외우자, 도현의 밑으로 거대한 결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흐익! 뭐, 뭐야. 이 엄청난 밀도의 마나는!
-리자리자!
-대마법사에 버금가는 마력…… 아니, 순도만 두고 보면 그 이상으로 느껴지는군요.
“호오, 이것이 영물의 마력인가. 신비롭군.”
“오, 그러게. 이펙트부터가 다르네.”
가디언들은 물론, 동료들마저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순수하고 깨끗한 바람으로 이루어진 태풍이 거대한 마법진의 범위를 장악한 느낌.
하지만 정작 도현은 체감할 수 없었다.
사아아-
사방을 찢어발기는 태풍이, 정작 그 중심은 더없이 고요한 것처럼.
그저 바람이 살랑이며 얼굴을 간지럽히는 느낌만이 드는 것이다.
하나 도현이 집중한 건 그러한 이질감이 아니었다.
‘무언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발밑에서 소름 끼치도록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곤두서는 느낌.
마치 심연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꺼림칙한 감각이 점액처럼 전신을 휘감은 그 순간.
—!
그 사이로 태양처럼 뜨거운 한 줄기 기운이 지면을 뚫고 나와 도현을 관통했고.
동시에 눈앞이 번뜩이며, 환한 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하나 그것도 잠시.
띠링-
눈꺼풀 너머로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컴컴해진 것을 느낀 것과 동시에, 경쾌한 알림이 귓가를 자극했다.
그에 천천히 눈을 뜬 도현이 멈칫했다.
“여긴…… 나 혼자만 이동된 건가?”
조금 전까지 숲 속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캄캄한 공간.
마치 거대 생물의 내부에 들어온 듯 물컹하면서 꺼림칙한 공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건 전혀 와닿지 않았다.
눈을 뜬 순간, 보인 것이다.
철그럭-
기둥에 묶인 채 눈을 감고 있는 금발의 여인이.
늘씬한 몸매로도 가려지지 않는 탄탄하게 압축된 근육과 가만히 있음에도 새어 나오는 패도적인 기세.
범상치 않은 모습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봉인된 르시아 그란델과 조우하였습니다.]
[르시아의 왼쪽 팔이 반응합니다.]
르시아의 팔이 보다 높이 떠오르더니, 자석에 이끌리는 철분처럼 그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어어, 하는 사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렇게 날아간 팔이 그녀의 비어 있는 왼쪽 어깻죽지 밑에 붙은 순간.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의 푸르다 못해 은색처럼 느껴지는 눈동자가 도현을 담았고, 곧이어 경쾌한 알림이 울렸다.
[역대 최강의 님프 대전사 ‘르시아 그란델’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숨겨진 루트의 이벤트 ‘르시아의 인정’이 발생합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르시아 그란델’과 조우하였습니다.]
[모험의 서에 기록됩니다.]
[모험의 서 랭킹에 변동이 일어납니다.]
‘……인정? 잠에서 깬 거면 봉인에서 풀려난 건가? 그렇다기엔 아직도 묶여 있는데.’
하나 눈앞을 어지럽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
무표정으로 도현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이 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루팔로의 보옥이 느껴지는데. 네가 나를 깨운 거냐?
시니컬한 어투.
별 대수롭지 않게 묻는 듯한 목소리지만, 솜털이 쭈뼛 서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도현은 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왼팔에 감각이…… 네가 내 팔을 찾아 줬구나. 침입자의 수장을 만난 건가? 아니, 만났으면 저리 멍청한 얼굴이나 하고 있진 않았겠지.
-루팔로의 기운이 짙게 느껴지는 걸 보니, 녀석이 직접 보냈구나. ‘그녀’는 아직 멀쩡한 것 같고…… 나를 깨운 거면 재앙이 깨어난 건가?
추측인지, 아니면 모든 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 상황 파악을 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놀랍도록 정확하게.
-맞나 보네. 쯧, 심장을 봉인한 걸로는 부족했나? 하긴, 그 잔 대가리 잘 굴러가는 놈이 아무 대책도 안 세우고 손 놓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맞습니다.”
혀를 차며 투덜대던 그녀가 도현의 대답에, 잠시 불만을 거두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1초, 2초, 그리고 5초.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딘가 오묘해지더니, 5초가 넘었을 땐 흥미롭다는 듯 눈빛에 이채를 띠었다.
-……호오. 초월의 길이 하나가 아니잖아? 심지어 재미있는 걸 가지고 있네? ‘저걸’ 가진 놈은 드란 이후로 처음인데.
도현이 흠칫했다.
초월할 특성이 많은 걸 간파한 것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저걸’ 가진 놈이라는 표현에 반응해서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 다음에 이어진 이름이 고막에 팍 꽂혔다.
‘드란? 드란이면 설마…….’
공식적으로 드란이란 이름은 갓오세의 NPC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이다.
칠강(七江) 중 하나이자 주먹 하나로 정점에 선 남자.
권왕(拳王), 드란 그라디트.
그래, 생각해 보니 그녀에 대해 조사할 때, 권왕과 무언가 깊은 사정이 있었던 듯한 기류가 있었다.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지금은 급한 불부터 꺼야 되는 상황.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상황을 보니 팔에 함정이 숨겨져 있던 것 같지도 않으니, 이것부터 해결하자.’
잠시 궁금증을 뒤로 미루고, 라그 베헤모스에 대한 얘기부터 하려던 순간이었다.
[보유한 특성에 대해 아는 인물을 만났습니다.]
[특성이 반응합니다.]
[한 번도 발현된 적 없는 특성입니다.]
“……음?”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성? 무슨 특성?’
그동안 특성 잘만 쓰고 살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나 의문도 잠시.
곧 도현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보다시피 내가 바로 움직일 처지가 아니라서. 원래는 적당히 베헤모스의 대처법을 알려 주고, 유물 하나 던져 주면서 시간 좀 끌어 보라고 하려 했는데…… 이럼 좀 기대가 생기는걸?
여태 무표정에 가깝던 그녀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분명 기분 좋게 웃는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사자가 떠오르는 미소였다.
-너, 이름이 뭐지?
“……카이저입니다.”
-그래, 카이저. 너 그거 한 번도 발현 못 해 봤지? 발현되었으면 기세가 그리 약해 보일 수가 없지.
“아까부터 대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와, 이것 봐라. 아예 잊고 살고 있었나보네. 하긴 드란, 그놈도 아무 재능 없는 줄 알고 나 만나기 전까지 허송세월 보냈었지.
“……?”
-베헤모스 놈이 당장 깽판 치고 있으면 나한테 왔을 리는 없고…… 강림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나 있지?
“……48시간입니다.”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 라는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지만 끝내 내뱉어지진 못하였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도현의 모습에, 피식 웃은 그녀가 짤막한 대답을 놓은 것이다.
그건 고작 두 글자로 된 단어였다.
하지만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도현은 곧장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극복.
“……!”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재능.
가장 찬란한 재능을 가진 님프라 평가받는 그녀나, 하이 엘프들.
하다못해 왕좌의 주인에 오른 다섯 종족들까지도 못 가지는, 오직 인간 종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
-어디 한번 보자고. 네 극복은 과연 드란과 비교해서 어떨지. 시간이 부족하니 집중해야할 거야.
그것이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던 극복 특성의 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