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6화.
멸살과 대립한 직후.
도현은 확실하게 느꼈다.
‘다르다.’
대륙 퀘스트 때 엘라니스에서 보았던 멸살과 지금의 멸살은 다르다고.
그저 놈의 기세를 겪었을 뿐임에도 확연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이게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놈, 더 강해졌어.’
성장한 것이다. 꾸꾸 녀석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말이다.
가뜩이나 정점으로 거론되던 녀석이 몇 단계는 더 높이 올라간 상황.
겨우 따라잡았나 싶었더니 다시 격차가 벌어진 셈이다.
-으음…… 그래도 너무 강하던데 주인. 으, 아직도 몸이 오싹하네.
-리자리자…….
-확실히, 소름 끼치도록 강한 자였습니다.
당장 녀석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원체 겁이 많은 지하드는 그렇다 쳐도 찰리마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
하지만 도현은 담담했다.
‘이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애당초 전설급 스킬 하나 없이 정점들과 싸우는 게 일상이었던 그이지 않은가.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단편적이긴 해도 녀석의 전투 스타일을 직접 보기도 했었고, 당장 뉴튜브만 들어가도 놈의 전투 영상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도현에겐 아직 남은 패가 하나 있지 않은가.
[철쇄천겁(鐵鎖千劫)]
[등급 : 전설++(유일)]
[설명 : 세상이 종말이 천 번 일어나더라도 결코 파괴되지 않고 대상을 불태우려는 겁화(劫火)의 사슬.
세상에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는 특이한 소재의 무구이며 사용자의 의지에 깊게 관여한다.
단, 철쇄천겁은 사용자에게도 무겁고 위험한 무구.
제대로 다루려면 사슬의 시험을 통과하여 계약을 맺어야 한다.
계약을 성사하지 않을 시 사용자의 생명력/정신력도 깎여나가며, 방심하면 되레 사슬이 착용자를 불태울 수 있다.]
[레벨 제한 : 100]
[착용 제한 : 엘라니스를 30,000점 이상의 공략 점수로 1위를 달성한 자]
[물리 공격력 : 3781~4037]
[내구도 : 100/100]
[겁화(劫火)의 심판 : 자격을 증명하지 않은 자에게 겁화(劫火)의 심판을 내린다.]
[계약 : 철쇄천겁의 시험을 받아 철쇄천겁이 만족할 시 계약을 맺는다.]
졸업 퀘스트를 깨며 얻은 갓오세 최초의 전설++등급의 무구.
신화 속 무구들이 다루기 위해선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있었듯이, 철쇄천겁 또한 그러한 조건이 있었다.
-계약.
그리 칭하지만, 실상은 면접이나 시험에 가까운 일방적인 조건.
무기가 주인을 고르는 것을 넘어 주인을 시험하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무구인 것이다.
심지어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심판을 내리기까지.
그야말로 건방짐을 넘어서 오만함의 극치였다.
‘그만한 값어치를 안 하기만 해봐라.’
그리 불평을 내뱉지만, 사실 그렇기에 더 기대되는 게 사실이었다.
저 정도의 에고를 자랑하는 무기면 그 본연의 힘이 얼마나 뛰어나겠는가?
[철쇄천겁(鐵鎖千劫)과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주의! 철쇄천겁(鐵鎖千劫)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시 겁화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말 도전하시겠습니까?]
[실패 시 이후 재도전의 난이도가 상승합니다.]
[계약에 세 번 실패할 시 철쇄천겁(鐵鎖千劫)이 당신을 떠납니다.]
-이건 다음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주인? 점점 어려워진다잖아.
-리자리자.
-으음.
그게 이유였다.
메시지부터 가디언들까지 잔뜩 겁을 주고 있음에도, 도현이 망설임 없이 도전 버튼에 손을 뻗는 이유.
“아니, 해야 해. 이게 가장 확실하니까.”
-그렇기는 한데…….
-주군이 그러하시다면 이유가 있을 터. 이 미천한 검은 주군을 믿습니다.
멸살과의 차이를 확실하게 체감한 지금.
가히 그 위력이 예측조차 되지 않는 전설 ++무기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
‘시험에 통과하고 이걸 천변으로 포식하면?’
최초의 15강짜리 전설++등급 무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천변에 포식된 온갖 무기들의 형태로.
그렇기에 부푼 기대를 안고 도전을 누르자, 그런 도현을 반기듯 곧이어 메시지가 떠올랐고.
[철쇄천겁(鐵鎖千劫)과의 계약을 시작합니다.]
시야가 점멸되며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 * *
‘여긴…….’
눈을 뜬 도현이 본 것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전의 자연의 웅장함이 담긴 숲이 아닌, 온통 붉은 세상.
그런 세상을 본 도현의 첫 감상은…….
‘심상 공간?’
르시아에 의해 과거의 자신이 있던 공간.
그 공간과 흡사했다.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있던 그곳처럼 이곳 또한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눈이 아프지 않은 것은, 다양한 붉은 계열의 색이 섞여 있기 때문이리라.
다만, 뭐랄까…….
‘좀 다른데.’
하얗게 물들어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던 그곳과 달리, 이곳에는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어디가 끝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은 세상.
철그럭-
그 세상의 중심에 사슬에 묶인 거대한 무언가가 있던 것이다.
철걱-
무언가가 움직일 때마다 사슬이 비명과도 같은 거북한 소음을 토해낸다.
오랜 세월 방치된 듯 끼긱, 거리는 불쾌한 쇳소리가 울릴 때마다 묶여있는 무언가도 더욱 거칠게 발버둥 쳤다.
그것만으로도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철걱, 철그럭-
그러나 도합 7개에 달하는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옥의 쇠사슬이 저러할까 싶을 만큼 붉고 거대한 사슬이 네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 목덜미를 모두 빈틈없이 구속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괴물이었다.
‘……도깨비? 오니? 좀 다른가?’
정확히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최소한 그간 갓오세에서 보아오던 몬스터는 아니라는 것. 그냥 종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애당초 갓오세에 도깨비같이 생긴 몬스터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크기가 10M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도깨비라면 더더욱.
‘튜토리얼 떠오르네.’
묶여있는 괴물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철혈의 마용종이 떠오른 도현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하나 눈은 조금도 접히거나 휘지 않았다.
스윽.
그저 놈을 보며 묵묵히 천변을 쥘 뿐.
이곳은 평화로운 심상 공간이나 숨겨진 필드 같은 곳이 아니다.
철쇄천겁과의 계약을 위한 시험을 치르기 위한 곳이지.
척 보아하니 저놈을 상대하는 게 시험이지 않겠나.
띠링!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알림이 떠올랐다.
[철쇄천겁(鐵鎖千劫)의 공간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곳의 주인에게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아.’
그에 도현이 천변에서 손을 뗐다.
다만, 여전히 눈은 놈에게서 떼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놀란 눈이 되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계약을 맺으러 왔느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쇄천겁(鐵鎖千劫)과 조우하였습니다.]
‘……저게 철쇄천겁이라고?’
생전 처음 보는 괴물.
그 괴물이 바로 전설++급 무구 철쇄천겁의 본체였으니까.
도현은 한동안 벙찐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근래 받은 충격 중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아니, 신선한 충격으로 치면 가장 클 것이다.
‘저게 철쇄천겁이라고? 그럴 수가 있나?’
저게 어딜 봐도 무기란 말인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지.
아니, 그냥 생명체도 아니고 척 봐도 무지막지한 괴물이다.
영혼이 존재하여 자유의지를 지닌 ‘에고’ 무기들은 들어봤어도, 저렇게 멀쩡히 몸뚱이를 본체로 둔 무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멀쩡히는 아닌가?
놈은 꼼짝없이 묶여있는 신세이니까.
-크흐흐. 신기한가.
“…….”
도현의 눈빛에 감정이 드러난 걸까.
-어찌하여 도구에 불과한 무기가 본체를 지니고 있는지.
소름 돋는 웃음을 흘리며 내뱉는 놈의 말에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철쇄천겁이라면 적은 아니란 소리니.
-타당한 의문이다. 아니…… 옳은 의문이라 봐야 하겠지.
-나는 철쇄천겁이면서, 동시에 철쇄천겁이 아니니.
“그게 무슨……?”
철그럭,
사슬이 거슬리는지 몇 차례 몸에 힘을 주던 괴물이 이내 몸을 축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나는 꼼짝없이 묶여있는 신세다. 그리고 철쇄천겁(鐵鎖千劫)은 사슬이지. 이곳에 사슬이라곤 이것밖에 더 있을까.
“그렇다는 건 설마?”
-크흐, 그래. 이 거지 같은 사슬이 네놈이 찾는 철쇄천겁(鐵鎖千劫)이다. 난 재수 없게도 그것에 묶여 봉인 당한 상태고.
“!”
즉, 철쇄천겁은 저 괴물이 아닌, 괴물을 묶은 사슬을 뜻한다고 봐야 했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사슬에 봉인 당한 지도 어언 1,000년…… 내 몸을 불태우려 하는 이것에 저항한 지도 천 년이 되어간단 소리지.
그 때문에 존재가 동기화되기라도 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사슬이 날 죽일 수 없으니 방법을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덧 이것과 하나가 되어 있더군.
“아.”
-크흐흐, 무어 이런 건 네 녀석에게 하등 중요하지 않겠지. 누가 너에게 시험을 내리는가 그게 중요할 터.
정곡을 찌르는 말에 도현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는지 괴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고.
-내 이름은 카엘리보루스. 과거 파천귀(破天鬼)라 불리었던 존재. 계약의 조건으로 너의 자격을 시험하겠다.
그와 동시에 경쾌한 알림이 연이어 울렸다.
[파천귀(破天鬼), 카엘리보루스]
-타이틀 : 파천귀(破天鬼), 하늘을 부수는 자, 파멸의 존재, 신멸도깨비(神滅鬼).
-타입 : ??
-특성 : ??
-설명 : 신계를 멸망시킨 라그나로크가 일어나기 전, 하늘을 부수고 신들을 멸하려 파멸의 도깨비.
수많은 신들과 싸움을 거듭했고, 이내 신들에 의해 지옥의 사슬 철쇄천겁(鐵鎖千劫)에 봉인 당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간 봉인 당한 그는 강렬한 복수의 불꽃을 품고 있다.
‘미친.’
파천귀(破天鬼).
하늘을 부수고, 신들을 멸망시키려던 도깨비.
거창한 타이틀과 설명 외에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은 정보창도 이목이 쏠리기에 충분했지만, 도현의 시선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철쇄천겁(鐵鎖千劫)의 계약이 시작됩니다.]
[오랜 기간 ‘철쇄천겁(鐵鎖千劫)’에 봉인되어 하나가 된 ‘파천귀(破天鬼), 카엘리보루스’가 계약을 원하는 당신에게 시험을 내립니다.]
[그를 만족시킬 시 시험에 통과합니다.]
[또한, 시험 성적에 비례하여 사용할 수 있는 사슬의 개수와 위력이 증가합니다.]
‘시험 성적에 비례하여 무기의 위력이 상승한다고?’
도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던 탓이다.
더불어 기대되기도 했다.
위력은 그렇다 쳐도 개수가 늘어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철그럭, 철걱-
놈을 묶고 있는 일곱 개의 사슬.
그것들 하나하나에 힘이 깃들어있다는 소린데 그 말은…….
‘얻는 능력이 일곱 개일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무기 하나로 다섯 개의 특수 옵션을 다룬다?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다.
심지어 철쇄천겁은 무려 신들을 멸하려던 괴물을 억누르고 있는 사슬이다.
능력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을 터.
하지만,
‘쉽진 않겠지.’
아마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일 터다.
보상이 큰 만큼 입수 난이도가 극악에 달하는 건 뎀로크 때부터 있던 특징이니까.
아마 보통은 하나를 얻는 게 정석일 터.
[단, 시험에 통과하더라도 성적이 비루할 시 기존의 능력 외에 어떠한 사슬의 힘도 지급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연이어 메시지조차 이리 협박하고 있으니.
모 아니면 도인 셈이었으나, 도현은 도리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는 만큼 주는 거?
‘오히려 바라던 바야.’
실로 공평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