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3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선언.
하나 그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하늘에서 유유히 수백만 군단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으니까.
하나 그것도 잠시.
-커헉……!
루미사르가 돌연 피를 토했다.
대결계술은 본디 백여 명의 고위 결계사가 힘을 합해야 펼칠 수 있는 진법.
그것을 두 개나 동시에 펼치며 무리하고 있었는데, 카디움에 의해 강제로 격파되자 마나를 담는 서클이 뒤틀린 것이다.
그 탓일까.
–파각, 쩌적-!
쨍그랑-!
이곳을 보호하고 있던 다른 결계들까지 연쇄 작용처럼 깨져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괴한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오는 심연의 마수들.
그어어어-!!! 그어!
밀물처럼 몰려드는 그들은 하나하나가, 여타 보스에 비견되는 괴물들이었다.
심연의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강대한 힘을 지닌 탓이었다.
[대마수 레브타리다]
[대괴수 베루트안]
……
[대괴수 르트론다]
개중에는 7M가 훌쩍 넘는 거대한 덩치와, 그에 걸맞게 특출 나게 강한 힘을 지닌 존재들도 있었다.
어지간한 필드 보스보다 강한 힘을 지닌 자들.
이름을 가진 네임드 마수들이었다.
“미친…….”
“……이게 맞아?”
“너, 너무 많잖아.”
그 수만 무려 십만이 넘어갔다.
이종족의 정예 기사들이 모여서 잡아야 할 존재들의 수만 그 정도.
그어어- 그어-
쿠어어어!
꼬삐 풀린 개떼처럼 미친 듯이 몰려오는 저 검은 파도는, 가히 백만이 훌쩍 넘어갈 정도였다.
그뿐이랴.
[집행자 진영에 속한 플레이어들과 조우하였습니다.]
[그들과 맞서 승리하십시오.]
“들어가자!”
“집행자 편 서길 잘했다, 씨X.”
“저기로 갔으면 주옥 될 뻔했네.”
“가즈아!!”
집행자의 편에 선 유저들의 수도, 대항자의 편에 선 유저들보다 결코 적지 않았다.
……아니, 더 많다고 보는 게 맞았다.
눈치를 보느라 접속하지 않은 유저들도 꽤나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으니까.
실제로 지금도 계속해서 집행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요정왕님!
-루미사르 님을 지키자!
-다들 힘을 보태 줘! 끄응……!
“아아, 내 아이들아…… 여긴 위험하다. 물러나거라.”
-그럴 수는 없어요! 루미사르 님이 없으면 안 된다구욧!
반면 이쪽은 시작부터 치명상을 입은 루미사르를, 요정들이 몰려와 허둥지둥 대피시키고 있다.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
지금이라도 발을 빼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 들 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
“……어?”
“뭐?”
“씨X 이게 뭐야!?”
“지, 지면이 뒤틀린다! 피해!!”
“으아악!!”
돌연 지진이라도 난 듯 대지가 요동치더니, 말 그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거인이 대지 자체를 양손으로 잡고 뒤틀면 이런 모양이 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기괴한 현상.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재해에 기세 등등하게 달려들던 집행자들이, 당황해서 비명을 내질렀고.
그어어-! 거어!
마수들은 뒤틀린 지면의 틈에 끼어 죽음을 맞이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틈 밑에는 공허나 용암이 흐르는 게 아닌,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무지 영문을 모를 상황.
하나 단 한 사람…….
[해왕류(海王流) – 대해의 파벽이 시전됩니다.]
[정통한 해왕의 자격을 지닌 해후(海后)가 파도의 결계를 만들어 냅니다.]
-어머, 이거 참…… 보기 싫은 존재가 왔군요.
새하얀 피부와 화려한 이목구비.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고혹적인 여인.
파도의 결계를 펼쳐 그녀의 주변을 막아 내고 있는 레비아탄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도다.
그야 당연했다.
공간 전체에 울리는 듯한 묵직한 인외의 목소리는, 그녀로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으니까.
[바다의 지배자가 해왕(海王流)이 ‘대해폭류(大海暴流)’를 발현하였습니다.]
[지면이 파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감히 내 앞에서 해왕류를 논하다니…….
100M가 넘어가는 압도적인 크기.
그 거대한 전신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보랏빛 비늘.
심해에서 4,000년을 버틴 대괴수만이 지닐 수 있는 심해의 비늘, ‘그라탄’ 중에서도 유독 색이 짙은 저 비늘의 주인공은…….
[세 번째 왕좌 네레시움의 주인]
[해왕(海王), ‘아비스론 네레시움’이 전장에 출몰하였습니다.]
모든 바다의 지배자이자 심해의 왕, 아비스론이었으니까.
심연의 본능인 것일까.
죽어 가는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아비스론의 비늘을 물어뜯고 할퀴는 마수들이었으나…….
그어- 거억!
-가소롭구나, 겨우 그 정도로 생채기나 날 성싶더냐.
7,000년을 살아온 그녀는 몸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이자 방어구였다.
파바바밧-! 커허억-!
그어어-
전신을 뒤덮은 비늘을 날카롭게 만든 채.
지면 위로 뛰어 올랐다가 들어가는 것만으로, 반경 30M에 있는 모든 마수들이 처참한 몰골이 되어 죽은 것이다.
유일하게 파벽을 쳐 내고 있던 레비아탄과, 그녀의 주변만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린 레비아탄이 손을 뻗었다.
[해왕류(海王流) – 대해의 분노를 시전합니다.]
-……사실상 은퇴한 늙은이는 빠지세요.
그러자 주변에 펼쳐져 있던 대해의 파벽이, 소용돌이치듯 그녀의 손으로 빨려 오더니.
붉은 파동을 머금은 파도로 바뀌어 전면으로 들이쳤다.
하나 그것이 아비스론의 비늘을 뚫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해왕류(眞海王流) – 대해노도(大海怒濤)를 시전합니다.]
그녀의 해왕류는 이곳 전체를 집어삼킬만큼 거대했으니까.
해왕류(海王流)는 본디 아비스론에게서 탄생한 권능과도 같은 기술.
아류라 할 수 있는 레비의 해왕류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콰가가가가!
파도가 더 큰 해일에 순식간에 휩쓸려 가는 걸 보며, 아비스론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겨우 그 정도로는 3,000년은 이르다. 도둑질한 힘에 취한 어린 대해의 여왕이여.
-어머, 도둑질이 아니라 정당하게 취한 겁니다만?
-그랬다면…… 발전을 시켰어야지. 어린 여왕이여.
-……그럼 볼래요? 내가 다루는 당신의 해왕류가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자존심에 제대로 스크래치가 난 것일까.
레비의 푸르던 머리가 붉게 닭아오르더니, 푸른 비늘로 만든 듯한 드레스까지 모두 붉은색으로 변질되었다.
청순하면서도 매혹적이던 이전과 달리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바다의 대괴수 레비아탄이 본신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본신을 드러내어 스스로 봉인해 두었던 권능과 힘이 발현됩니다.]
—–!!!
붉은빛이 번쩍인 순간.
아비스론과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는 거대한 모습이 된 것이다.
다른 게 있다면 아비스론이 참치와 흰수염고래 사이 같은 형태에, 보랏빛 비늘이 가득한 모습이라면…….
-질투에 눈이 멀어 보살펴 준 신을 배신한 괴수…… 과연 간사하고 흉하게 생긴 모습이로다.
레비아탄은 간사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뱀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냥 뱀이 아니었다.
이무기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한 외관이 범상치 않으면서도 흉흉하게 느껴졌다.
한데 그런 외관과 달리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달콤하기 그지없다.
-질투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해 줄래요? 제 마음은 오직 카디움 님을 위한 거랍니다.
-어리석은 아이로고.
-전부터 궁금했어요. 당신과 나 둘 중에 누가 진짜 바다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붉은 파도를 끌어 올리며 그녀가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뱀의 아가리가 기분 나쁘게 찢어지며 올라간다.
-내 영토의 여왕이 될 때, 당신은 이미 잠적한 지 오래였으니까.
-그게 네 유일한 행운이었던 게지. 내가 활동하고 있었다면, 네가 좋아 죽는 카디움이 널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니.
-……노인 대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죽이고 싶어졌거든.
콰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두 괴물이 얽혀 몸싸움을 벌이며, 뒤틀린 지면 밑으로 들어갔다.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는지, 어두운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는데…… .
보랏빛이 번쩍이며 위치가 빠르게 바뀌는 것으로 얼마나 격렬하게 싸우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하나 해왕의 영향력은 여전히 전장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해왕(海王)의 심해 군단이 파도를 타고 돌격합니다.]
[물이 흐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토를 버리고 나온 레비와 달리, 해왕은 심해의 왕이자 바다의 지배자.
그녀가 이끄는 심해 군단은, 튼튼한 비늘과 거대한 덩치, 그리고 날카로운 주둥이를 지니고 있는 살인 전차였으니까.
촤자작- 촤자-
솨아아아!
-그어어어어!
“끄하악! 씨X 저게 다 뭐야!”
“아니, 안 보이는 데서 갑자기 튀어오르면 어떻게 피…… 꺼헉!”
“마, 마수들 뒤에 숨어!”
“젠장, 그래도 죽잖아! 후, 후퇴! 일단 후퇴해!”
“대체 어디까지가 물이 찬 땅인 거야!?”
그리고 그 순간.
파앗-!
이종족의 군단 사이에서 한 인영이 높게 뛰어올랐다.
그것은 한 여인이었다.
길게 휘날리는 금발에 대검을 들고 있는 여인은 순식간에, 네임드급 심연의 마수들이 날뛰는 곳까지 날아갔고.
그어어!? 그어!
10M쯤으로 거리가 좁혀지자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번쩍-!
[위대한 님프 대전사, ‘르시아 그란델’의 ‘정화의 검’이 발현됩니다.]
[주변 일대를 잠식한 모든 어둠을 정화합니다.]
[일대를 잠식하는 심연의 기운이 강대합니다.]
[정화의 검이 심연화의 급격한 가속을 낮추는 대신, 심연의 마수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그어어어어!!!
그러자 정화의 빛이 번뻑이더니, 심연의 마수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괴로워했다.
눈이 멀고 전신이 불태워지는 극한의 고통.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수십 마리의 네임드급 대괴수들과 수백 마리의 마수들을 녹여 버린 것이다.
“르시아 님이 나서셨다!”
“우리에겐 르시아 그란델 님이 계신다, 모두 뒤를 따라라!”
“와아아아아아!!”
“여왕님께 승리를 바치자!”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리는 강력한 한 방이었다.
“거참, 여전한 실력이구먼. 나도 질 수 없지. 흐읍!”
그에 고개를 저으며 감탄한 권왕이, 뒤따라 뛰어들어 괴수들을 가축 잡듯 쥐어 패 가며 학살하기 시작했다.
곧장 그의 앞을 막아서는 남자가 있었으니…….
콰앙-!
“허어, 또 네놈이냐. 사자 갈기.”
-영감은 내가 침 발라 놨거든. 우리 못다 한 게 있잖아?
사자 갈기를 뒤집어쓴 날렵한 근육질 남자, 다칸이었다.
대뜸 앞을 막아서 기습적으로 태극권 같은 자세를 취하자, 권왕의 몸이 회전하며 위로 붕 떴다.
그에 회전 방향에 맞게 몸의 균형을 잡아 착지한 권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몸도 예전 같지 않건만, 노인네를 못살게도 구는구먼.”
-이래 봬도 나도 인간이야. 엄살 부리지 말고, 들어와. 나이를 먹었어도 내가 더 먹었을 테니.
“흐음, 그럼 왜 날 영감으로 부르나? 내가 자넬 영감으로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꼬우면 영감도 환골탈태 하든가.
“것도 그렇구먼.”
고개를 끄덕인 권왕이 곧장 기운을 끌어올렸다.
[권왕(拳王) 드란 그라디트가 극성에 이른 극양진권(極陽眞拳)을 발현합니다.]
[극한의 양(陽)에 도달한 기공입니다.]
[극성에 이르러 적신(赤神) 상태에 돌입합니다.]
[전신의 열이 한계까지 팽창해 신체 대사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신체 능력을 몇 배로 증폭시킵니다.]
[잠재되어 있는 ‘극복’의 힘을 발현합니다.]
[극양진권(極陽眞拳)의 리미트를 풀어 적신(赤神)을 극한까지 끌어올립니다.]
[‘태양극(太陽極)’ 상태에 진입합니다.]
전신의 피부가 붉다 못해 화산로처럼 붉으락푸르락해졌으며, 열기를 뿜어내던 아지랑이는 불꽃을 피어냈다.
-휘유~ 뭐야? 저번이랑은 완전 다른데?
“자네가 상대면, 시간 끌 거 없이 바로 전력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럼 그게 영감 전력?
“그렇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도 전력으로 가 줘야 예의겠네.
즐겁다는 듯 씨익 웃은 다칸이 자세를 취했다.
한데 전의 그 태극권과도 같던 자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자세.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이전의 자세와 정확히 반대되는, 파괴력을 강조하는 투박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사자패왕격(獅子霸王擊) – 사자열쇄(獅子裂碎)]
-잘 받아. 제대로 못 받는 순간, 죽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