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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이지 않는 격류(2)>화정산이 다녀간 후로 한동안 기숙사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본래 나 혼자 쓰는 별채이긴 하지만 매일 드나들던 금·은·동 형제까지 발길을 뚝 끊었다.‘하긴 어디 놀러 다닐 분위기는 아니지.’졸업을 앞두고 들떠야 하는 마음은 무림학관에 방문한 유족들로 인해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매일 보던 친구와 동기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자각하면, 그때부터 또 다른 우울이 시작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더불어 나도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고.
그런데.
“굳이 싫은 사람을 내가 왜 지금 마주하고 있어야 하지?”
“…….”
용소아가 무감한 표정으로 당서희를 바라봤다.
작은 키의 당서희는 나와 용소아 사이에 서서 우리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마치 낑낑대는 강아지 마냥.
“싸웠다면 서로 화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화해할 일 없는데요?”
“싸운 적이 없다.”
나와 용소아가 동시에 내뱉은 말에 정적이 흘렀다.
죽일 듯이 서로에게 검을 휘둘러 놓고 싸운 게 아니라고?
“……
화해하지 않을 생각인 것이야?”
고개를 숙인 채 혼자 무언가 중얼거리는 당서희.
이윽고 품에서 작은 자개병 세 개를 꺼내었다.
“백독불침도…….”
그녀의 얼굴 위로 스산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시름시름 앓는 독인 것이야.”
당서희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서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죽이려 했던 것을 방어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당서희가 자개병을 넣었는지 흘끗 확인했다. 아직 넣지 않았다.
“사과했으니 그쪽도 사과하지 그래?”
“사과할 일 없다.”
나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혹여나 독의 영향권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난 분명 사과했다.
“휴……. 애들같이 왜 이러는 것이야. 서로 앙금이 남으면 커다란 원한이 되는 것이야.”
뭐지? 협객 놀이하던 그 당서희 맞나?
용소아가 어른스러움을 보이고 있는 당서희에게 말했다.
“자리 좀 비켜주겠나.”
사과할 것이야?”
이대로 끝이 없을 것 같아 내가 대신 대답했다.
“안쪽에 다과가 있을 겁니다. 무한의 홍가다과에서 사 온 거라 하던데요.”
당서희가 입을 삐쭉 내밀다가 용소아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진소운에게 물어볼 것이야.”
당서희가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별채로 들어간 후.
나는 용소아에게 턱짓했다.
“그만 가보지. 우리가 그리 편한 사이도 아닌데. 당 선배에게 적당히 얘기는 해둘 테니.”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거석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던 용소아.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진로는 어디로 정했는지 궁금하다.”
전생에도 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번 생엔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걸 그쪽이 왜 묻는데?”
“학기 말이고 이제 곧 졸업이지. 그렇다면 진로를 정해야 할 때고.”
지난 생에야 워낙 거리감이 있었으니 이해를 할 건덕지가 없었다 쳐도, 이리 지근 거리에서 보게 되었는데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대체 뭘까.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아직 정하지 않은 건가? 방만하군. 뛰어난 학관생이라면 이미 반년 전에 자신이 갈 곳에 대한 조사를 마쳤을 텐데.”
뭐 하자는 거지?”
“아직도 슬픔에 젖어 있는 건가?”
가슴이 차게 가라앉는다.
“어리석군.”
애당초 용소아와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아니니까.
지금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고.
“닥쳐.”
“슬퍼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내기가 움직인다.
그렇게 뻗어나간 살기가 용소아를 옥죄었다.
진짜 원하는 게 뭐야?”
겨우 내가 어디에 지원할지가 궁금해서 죽은 사람들을 언급하는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진로를 어디로 정했는지 궁금하다. 그뿐이다.”
분명 마인들도 진저리쳤던 살기가 뻗어나가고 있음에도 녀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왠지 맥이 탁 풀린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바위 앞에서 화를 낸다 한들 바위가 반응을 하는 것도 아닐진대.
“말하지 않겠다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더 말하기 싫군.”
살기를 뿜어댔을 땐 아무렇지 않았던 용소아가 왠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짧은 생각을 마치곤 다시금 나를 바라봤다.
“진소운…… 넌 불확실성이다.”
또 똑같은 말을 내뱉는다.
“혼란을 초래하지 마라. 그땐…….”
하지만 무게감이 다르다.
“제거할 수밖에 없으니.”
무감하게 말을 마친 뒤, 용소아는 왔던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돌아갔다.‘제거한다라…….’어지간히도 내가 거슬리나 보다.
용소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그나저나 저 새끼는 똑똑한 거야 멍청한 거야?’용봉지회를 제외하곤 무림맹 소속 배정 시 부대장의 허락이 있어야만 확정이 된다.
성적으로 내가 못 갈 곳은 없겠지만, 들어가서 곤란할 곳은 많다.
어디든 안 그러겠냐마는 대부분의 부대들이 정도회든 백도회든 12봉성이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따져봤을 때. 천목각이나 신의각 등 특별한 곳들을 제외하고.
이어 각각 정도회, 백도회, 12봉성이 차지하고 있는 곳들을 제외하면.
내가 맘 편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용봉지회와 황봉각, 백랑각밖에 남지 않는다.‘어차피 처음부터 백랑각에 갈 생각이었지만.’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완벽한 부대를 만들어 둘 생각이다.
소정대도 구하고, 태을문의 제자들도 보호할 수 있는 최강의 부대를.
“후후후. 그러고 보니, 내가 학관 졸업생이네. 소정대 놈들은 자연스레 내 부하가 되겠고. 흐흐흐.”
왠지 다과 먹을 생각을 하지도 않았건만 군침이 싹 돈다.#최근 강호인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의 이야깃거리는 바로 ‘묵림’이었다.
어디서부터 퍼진지는 알 수 없으나, 묵림에서 학관생들이 죽은 사실이 알음알음 퍼져나갔고.
그 피해가 막대하다는 정보를 두고 그 진위 자체에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대체 누가? 왜? 죽고 싶다면 쉬운 방법이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학관생들을 공격해?”
“학관생들에 대한 무림맹의 과보호가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꽤나 미친놈들인가 보네. 흑도 놈들이면 제일 가까운 만독문 놈들이려나?”
“허어, 그게 아닐세! 이번 묵림 사건에서 만독문이 학관생들을 많이 도와줬다던데?”
이 친구 술이 많이 취했군. 예전부터 허언을 많이 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있는 사실 그대로가 전달되어도 믿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은 묵림에서의 일이 거짓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무림맹에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것도 오해를 키우는 데 한몫을 했고.
하지만 각 문파와 가문의 사람들이 무림맹으로 향하는 것을 보곤, 거짓이라 말하던 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 행렬의 규모가 작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들의 차림새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침통하고 슬픈 표정들 속에서 묵림에서의 일은 진짜 있었던 것이라 확정 지어졌다.
한 가지 의문이 해소됨과 동시에 다른 한 가지 궁금증이 금방 생겨났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학관생들을 공격한 것인가?
역대 학관생들은 가장 중요한 존재로 무림맹의 보호를 받았다.
묵림에서 일어난 일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은근슬쩍 흑도 방파들이 학관생들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티 나지 않게 이번 사건과 자신들이 연관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의 당연한 상식을 정면으로 박살 내며 무림맹에 엿을 먹인 상대에 대해 궁금증이 이는 건 너무도 당연한 반응.
하지만 무림맹은 유족들이 방문하여 문의를 해도 범인이 누구인지 발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림맹의 수상한 침묵이 이어질수록 강호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맹주전의 수장과 만통부의 수장이라고 이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아니, 되려 다른 이들보다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하는군요.”
평소 그렇게도 차를 좋아하던 혁무강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군산은침이 다 식을 때까지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다들 전쟁을 위한 만반에 준비가 되었다는 전서가 수백 통입니다.”
차분하게 술을 마시던 제갈소명이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아직 이 제갈소명이 정체도 못 밝힌 적과의 전쟁이라……. 그들에겐 이미 적이, 아니, ‘적으로 삼고 싶은 존재’가 정해져 있나 보군요.”
사천에서의 일로 이미 강호인들의 피가 들끓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의문은 언젠가 의견이 되고, 곧 대세가 되겠지요.”
들끓는 살의가 아군에게로 향하고 있다.
황금기가 지속돼 내실을 다질 시간이 많았던 만큼 모든 문파들이 자신에 차 있었다.
무림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이때를 틈타, 제 영역을 확장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사문을 위해, 자신들의 가문을 위해.
“최소한 정체라도 시원하게 밝혀주면 좋으련만.”
숨은 적은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자신들의 그림자를 꽁꽁 숨기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이 무림을 마음껏 요리할 수 있다 판단할 때쯤이나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때 나타난 적을 무림맹은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빤히 미래가 보임에도 방향을 틀 수 없는 상황에 혁무강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패도(霸道)
가 필요한 시기인가…….”
작게 중얼거리는 혁무강의 말에 제갈소명이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그는 그럴 수 있는 인간도 아니니까.
“되레 공격의 목표가 맹주로 바뀔 겁니다.”
한 사람이 열 손을 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무인이라고 하나, 혼자서 천하를 모두 상대할 순 없을 터.
이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을 혁무강이 ‘패도’를 입에 담았단 것은, 그만치 상황이 막막하다는 방증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제갈소명이 그를 위로했다.
자신도 답답한 마음이지만 어쨌든 그는 맹주를 다독여야 하는 군사였으니까.
“그래도 천만다행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피해로 끝났다는 것이.”
잔뜩 찡그려져 있던 혁무강의 미간이 미세하게나마 펴졌다.
그렇겠지요. 총군사께서도 집행각의 조서를 보셨습니까? 진소운 그 아이가 마경으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아마 학관생들 모두가 묵림에서 죽었을 겁니다.”
참 내, 대체 집행각의 조서는 또 언제 본 거람.
그래도 근심이 조금은 덜어진 듯한 혁무강의 모습에 제갈소명 또한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전원이 사망했다면 손써볼 틈도 없었겠지요.”
피해가 더 컸다면, 더욱 거대한 명분이 섰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전쟁을 벌였겠지.
범인을 만들어 내서라도.
진소운이 한 일은 그저 학관생들을 구출한 것으로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해낸 일은, 무림에 들이닥칠 뻔했던 전쟁의 화마를 막아낸 것이었다.
제갈소명이 찻잔을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인재가 뚝 하고 떨어진 건지.”
제갈소명이 몇 마디 맞장구를 쳐주자 혁무강이 더욱 신이 난 듯 덧붙였다.
“아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운이 그 녀석이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움직였다고 합니다. 애당초 상명하복을 요구한 것도 자신의 뒤에 아이들을 세우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려는 의도 아니었겠습니까?”
마치 머리맡에서 영웅 신화를 들은 어린아이처럼 혁무강은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소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도 조서를 봐서 잘 압니다.”
“크흠…… 미안합니다. 괜히 이야기를 떠올리자니 흥분이 되어…….”
“괜찮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적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본디 그런 희망을 좇을 수 있기에, 절망을 이겨낼 힘 역시 생겨나는 법이니까.
어찌 되었든 제갈소명도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아마 강호의 사람들도 맹주님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러니,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아이를 띄워야겠습니다.”
혁무강의 미간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그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까 혁무강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은 것이 제갈소명 자신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갈소명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영웅이 필요한 시기가 아닙니까.”
“하지만…… 진소운에겐 용소아와 같은 배경이 없지 않습니까. 총군사께서도 그간…… 그걸 가장 고민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어쩌면 거목이 될지도 모르는 새싹을 폭풍우 속에 노출 시키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지체하기엔 저희의 사정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잠시간의 침음성이 흘렀다.
숙고하던 혁무강이 눈을 떴다.
“그렇게 하시지요.”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지만 쉬이 답을 하지 못하는 제갈소명.
막상 머뭇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혁무강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진소운 그 아이가 그리 쉬이 꺾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총군사께서도 분명 그리 생각하셨기에 결단하신 거겠지요?”
“그리고 총군사라면…… 방도를 준비해 두지도 않고 말을 꺼낼 사람도 아닐 테고요.”
역시나 그냥 무림맹주 자리에 오른 이가 아니다.
“세가의 힘을 조금 실어야겠지요. 마침 그 아이와 제 조손이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니…… 명분이 조금 부족하지만 얼추 구색은 맞출 수 있겠지요.”
“그럼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혁무강에 제갈소명이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사실 그간 조금 걱정하긴 했습니다. 총군사께서 책임지고 데려간다 하셨지만, 그 아이가 만통부에서 일을 한다면 반대가 만만치 않겠습니까. 맹주전은 말할 것도 없겠고요.”
온갖 오해와 음해에 가까운 소문이 덕지덕지 붙은 아이였다.
“혹시나 그 아이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백랑각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되레 걱정했었지요.”
그 거뭇거뭇한 소문들이 혹여 녀석의 날개를 꺾지는 않을까, 혁무강은 내심 노심초사했었다.
사실 저도 일단 용봉지회로 조금 두다 천목각을 통해 끌어오려 했었습니다.”
이는 제갈소명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씁쓸한 현실에 조소가 흘러나온다.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이번 묵림의 일로 명분도 생겼고, 우리까지 힘을 보탠다면 그 누구도 쉬이 그 아이를 끌어내리지 못하겠지요.”
“다행입니다.”
문득 진소운에게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며 혁무강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아이가 무척이나 좋아하겠군요. 사문에서도 좋아하겠고요.”
“좋아하다 뿐이겠습니까? 백랑각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헤벌쭉하겠지요.”
시련이 예정되어 있지만, 녀석의 앞길에 미리 커다란 선물을 준 듯한 기분에, 두 사람의 마음의 짐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물론 본인의 의사 따윈 고려하지 않은 선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