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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지 않는 격류>환영회는 없었다.
학관의 마지막 행사인 대여정이 있고 나면 커다란 연회로서 학관생들을 치하하는 자리가 본래 있었지만, 이번엔 그런 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학기 말이면 으레 풀어지며 소란스러워져야 할 학관 분위기도 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졸업을 앞두고 학관생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각의 초청장이 올지 기대하기보단, 누구의 장례식이 먼지 열릴지 씁쓸함을 느꼈다.
다들 하루라도 빨리 학관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보단,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학관생들 중 몇몇이 집행각에 소환되었다.
대주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불려갔고, 일반 단원들 중에서도 몇몇이 소환되었다.
아마도 지난번 집행각의 인원이 말한 면밀한 조사가 시작된 것이리라.
교관들 모두가 감찰각에서 조사받고 있기에 수업은 없었고, 나 또한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냈다.
촤르르르르르.
검날이 풀어 헤쳐지며 개인 연무장을 가득 메운다.
소천검법에 이은 대천검법.
그리고 연환식으로 펼쳐지는 쌍천검결까지.
쏟아내고 또 쏟아낸다.
촤르르르륵.
펼쳐내는 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환검을 계속 쏟아낸다.[아아아!][여기서 끝인가…….][저 빌어먹을 놈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명한 기억들을 지워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겨우 몸을 움직이는 것 따위로 지워지지 않을 기억임을 잘 안다.
전생에 심산유곡에서 홀로 고통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까.
도망친 곳에서도 난 자유할 수 없었다.
촤르르르륵달려오는 마인들을 향해 다시금 검을 날린다.
그때와 똑같은 검.
다른 시도를 해본다.
달려드는 마인을 베는 것이 아니라 찌르고 밀쳐낸다.
“빌어먹을……!”
하지만 여전히 죽는 사람이 나온다.
태을진경의 경지가 높아지면서 전생의 기억 속에 약동하는 일은 많이 줄었건만, 새로이 새겨진 기억들은 여전히 감정을 격화시킨다.
두근
-더 빨리 검을 베어본다.
방어식도 펼쳐보고, 파쇄식도 펼쳐본다.
하지만 여전히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피를 흘리며 또 죽어간다.
내공을 쏟아붙고 검을 휘두르고 몸을 던져봐도 계속 죽는다.
-전생에 비하면 아득할 높이의 경지에 올랐건만.
-난 여전히 기억 속에 무능하다.
두근 두근 두근다시금 검을 휘두른다.
촤르르르르륵.
가장 최적의 공간에 가장 최적의 속도로.
조금씩 더 빠르게.
조금씩 더 정확하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중천에 채 뜨지도 않았던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단전 안에 내공이 텅 비고 적광검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자 뒤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뭔 수련을 이리 무식하게 하냐.”
화정산이었다.
그가 이미 세 시진 전에 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게, 저 먼 곳에서 자신이 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니까.
하지만 모른 척했다.
지금은 누구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어차피 시일이 흐른 후엔 지겹도록 말을 섞어야 할테니까.
하지만 우리의 화정산은 역시나 싸가지가 없다.
“어이, 씹냐?”
“후…… 진짜 눈치가 없으시군요.”
“뭐 인마?”
그는 연무장에 다가오더니 자리를 잡고 털썩 바닥에 앉았다.
“몸을 풀고 싶은 거라면 나를 부르지 그랬냐. 새롭게 만든 신매화검을 보여주려 했는데.”
“선배 분풀이할 겸 말입니까?”
화정산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걱정하는 거냐? 누가 네게 욕을 할 수 있다고.”
“때론 슬픔을 쏟아낼 배설구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선배도 그러기 위해서 절 찾아온 거 아닙니까?”
“…….”
난 잘못하지 않았다.
다시금 기억을 되돌려 복기해 보아도 그건 내 최선이었다.
아마 운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그나마 행운이 작용한 거라 생각한다.‘그래 분명 그렇다.’하지만 머리론 알고 있어도 답답한 가슴을 풀어낼 방법을 찾곤 하는 게 인간 아닌가.
당연함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더구나 나의 동료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비이성적인 생각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나 또한 태을문이 멸문하고.
무림맹에 와있던 사제들의 전사지를 받아 들었을 때 똑같았으니까.
떨림을 겨우 감춘 목소리가 날아든다.
“조개룡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방을 썼던 녀석이지.”
화산의 주량을 보여주겠다 호언장담했던 녀석이었다.
문득 녀석이 피를 뒤집어쓴 채 웃어 보이던 하얀 이빨이 떠올랐다.
“나보단 안 되지만…… 그래도 충분히 화산의 이름을 드높일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었고.”
내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화정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네놈의 말이 맞다. 네놈에게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아니,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만독문에서도 물어보고 싶었다.”
화정산의 눈빛은 어쩐지 불 꺼진 숯처럼 회색빛이었다.
“정말로 조개룡이 죽었어야 했는지, 혹여나…….”
침을 삼킨 그는 몇 번이나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과거 내 행적 때문에 그 아이가 죽었던 건 아닌지…….”
화정산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고개를 숙이며 조소를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닌데…….”
아마 지금 무림맹으로 달려오는 이들 대부분이 그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꼭 자신의 제자여야 했는지.
꼭 자신의 자식이어야 했는지.
“……
화산의 아이들이 너를 비호하더구나. 그래서 묻지 못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자지 못한 듯 두 눈이 시뻘겠다.
그러곤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내내 생각나더군. 정말…… 태을문에서 있었던 일과 상관이 없었는지.”
화정산의 두 눈엔 어떤 열망이 가득했다.
내 시선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한.
나는 그의 두 눈을 올곧게 응시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까?”
“어떤 말?”
“태을문에서의 행동. 그저 그 역할이 필요했기에 일부러 그랬다는 말.”
나는 전생에 듣지 못했던, 하지만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물었다.
“진심은 아니었다는 그 말 말입니다.”
화정산은 한참이나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극심한 내적 갈등 끝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즐겼다.”
더없이 솔직한 대답이 이어진다. 아니, 터져 나온다.
마치 물을 막던 제방이 무너진 것처럼.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 터져버린 듯 술술 흘러나왔다.
“그 역할이 필요했다 한들 그건 분명 비례(非禮)
였다. 하지만 난 화산의 신매화검이고, 용봉지회 소속의 화정산이었으니까.”
그의 얼굴이, 수치심과 진솔함으로 얼룩져 일그러진다.
“그래도 되었다. 그래서 그랬다. 태을문은 그래도 되는 문파였으니까.”
아마 이보다 더 진솔하게 이야기할 순 없겠지.
아까 그의 눈에 비치던 열망은 솔직한 말을 듣고 싶다는 열망이었나.
나는 다시금 물었다.
“묵림에서의 일. 제 대답이 필요한 겁니까?”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내가, 우리가 전생에 짊어졌던 그 무게를 짊어질 수 있겠냐고.
화정산은 입술을 꽈악 물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멈칫거리던 화정산의 눈빛이 복잡하게 얽혀든다.
“난 용소아나 일명처럼 척하면 척 알아듣는 게 안 되는 인간이다. 그러니 그냥…… 말해주면 좋겠다.”
더 이상.
화정산은 내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가 등 뒤에 짊어진 정도회도, 화산도 절대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되려 앞으로는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관계가 되겠지.
그렇기에 나는 더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내게 빚이 있고 난 그에게 빚이 없으니까.
내가 전생에 겪었던 그 좌절과 절망을 똑같이 느끼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어쩐지 조개룡의 그 하얀 이를 드러낸 미소가 선명하게 어른거린다.
이래서 오늘 이야기 따윈 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알고 있다. 묵림에서 살아 돌아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너를 원망하는 게 얼마나 비이성적인 짓인지. 하지만,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의 음성에 물기가 잔뜩 어려 있다.
“조개룡은 그런 곳에서 쉽게 죽어도 될 아이는 아니었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원망이 배회한다.
스스로를 찔렀다가, 상대를 찔렀다가. 아무리 배회하고 또 배회해도 힘을 잃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본디 원망이란, 그런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원망의 근원엔, 내 사람을 모두 살려 돌아온 나에 대한 질투도 담겨 있을 것이다.
내 선택을 두고 화정산을 납득시킬 필요 따윈 없었다.
나는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고,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니까.
그가 전생의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고 무심하게 말할 수도 있다.
이미 나도 충분히 힘든 상태이니까.
그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 따윈 없으니까.
하지만.[진 단주 주머니 걱정 좀 해야 할 거야. 화산은 기본 주량을 단지로 세니까. 하하!]
빌어먹을 조개룡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며 이를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화정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해 주었다.
과거의 내가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을.
“태을문의 일 따윈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몹시도, 듣고 싶어 했던 그 말을.
“중요한 일에, 사감을 넣지 않습니다.”
내 단언에 그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다 이내 씁쓸하면서도 조금은 풀어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랬군. 자넨 확실히 다를 줄 알았네…….”
본래 그런 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실을 안다 한들, 감정이 해소되는 건 아니니까.
여전히, 동료의 죽음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떨쳐낼 수 없을 테지.
고맙다. 얘기해 줘서.”
겨우 괜찮은 척 웃음을 지어 보이고선 뒤돌아서는 화정산.
나는 멀어지는 그의 등 뒤로, 한마디 덧붙였다.
“조개룡은…… 진짜 무인이었습니다.”
화정산이 우뚝 멈춰 섰다.
“동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사람이 진정한 무인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머뭇거리던 화정산의 입가에 ‘무인’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어렸다.
그러길 잠깐.
이내 그가 개운한 얼굴로 활짝 웃어 보였다.
“역시 물어보길 잘했다. 고맙다.”
그는 연무장을 나서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몇 번이나 ‘무인’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다음 날 나는 감찰각으로 소환되었다.
다른 학관생들이 집행각에서 조사를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대우도 듣던 것과 달랐다.
집행각 인원들의 태도가 정중하긴 했지만, 다들 조사실에서 꽤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며 조사받았다고 했던 반면에.
나는 당주의 집무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으니까.
쪼르르르.
뜨거운 김이 올라오며 차향이 우러나온다.
나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좀 더 좋은 차는 없습니까?”
험악한 조사관의 얼굴이 더 흉악하게 일그러진다.
거참,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지.
하여간 저 여전한 인성하고는.
“없으면 괜찮습니다.”
조사 차 왔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
“분위기가 물어봐도 되는 분위기였지 않습니까.”
친근한 안내에 정중한 태도, 거기다 조사 중에 차를 마실 여유까지.
취조받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 물론 조사관이 악병비라는 점만 빼면.
“이미 조사는 충분히 했다. 묵림에 조사관들을 파견하여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교관들이 무림맹에 먼저 당도하려 한 데엔 분명 목적이 있었을 테니까.
분명 자신들의 연줄이 닿아 있는 곳에 사방으로 전서를 보내고 조사를 방해하려 했을 텐데, 대체 어째서…….
“용소아의 보고서가 교관들과 정반대의 의견을 주장하고 있었으니까.”
허, 또 용소아인가.
용소아의 발언으로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는 건 좋았지만, 반대로 아득한 벽을 느끼게 만들었다.
혹여 그가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한다면, 그때 과연 내 의견이 고려 대상이나 될 수 있을까?
“물론 학관생들의 의견이 일치된 것도 영향이 있었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일치했다고요?”
자고로 승진을 바라는 놈들은 윗사람들과의 갈등을 좋아하지 않는 법인데…….
“그래. 몇 사람을 조사하건 다 공통된 이야기를 했다.”
최소 몇 놈들은 분명 선배들이나 사문 어른들의 압박에 진실과 다른 이야기를 할 거라 예상했건만.
이거 괜히 감동…….
“응?”
순간, 악병비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다 진소운 네 녀석…….”
“!”
뭐야, 대체 뭔데.
분명 방금 전까지 날 칭찬하던 분위기 아녔어?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악병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네 덕분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한 거다. 다들 네 칭찬을 했다고.”
“아니…… 그걸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이야기하십니까? 참 나.”
어처구니없어하는 나를 보며 악병비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웃은 건데…….”
시벌 두 번 웃었다간 심장 떨어지겠네.
잠시 시무룩해 있던 악병비가 신색을 회복했다.
“고생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료를 이끈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왜 그렇게 쳐져 있는 거지. 넌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랬겠지.
놈들의 정체를, 그리고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대처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 알면서도 당했다는 것에.……
잃었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놈들의 악의가 느껴지기에 감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본다.
하지만, 마음속을 짓누르는 이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장례는…… 언제 치러집니까?”
“일단 조사가 끝나야 한다.”
학기가 다 끝날 때쯤에나 치러지겠군요.”
“그냥 죽음이 아니니까.”
이번 일을 추적하다 보면 무림맹이 그간 몰랐던 적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가시화되지 않은 적들의 정체 때문에 무림맹은 한동안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장례는 어떻게 치러집니까? 단체로 치러질까요?”
“만통부에서 맹장으로 진행할 생각인 것 같다.”
“그렇군요. 다행이군요.”
어찌 돼도 좋을 이야기들이 잠깐 오가다가.
악병비가 툭 하니 질문을 던진다.
“거기서 본 놈들이냐?”
거기가 어디인지 명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확신하지?”
“확신이 필요한 일입니까?”
내 대답에 악병비는 침음성을 숨기지 못했다.
사흑련에서 만난 그놈들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진짜로 놈들이 있는 거로구나.”
악병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참이나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잠시 후, 무거운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강호가 혼란에 빠지겠군.”
“아마 당주님께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불가시한 적만큼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기 좋은 대상이 없으니.”
“부디 저와 같이 억울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커흐음. 커흠.”
악병비가 머쓱한지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거참, 민망해하긴.
내가 피식 미소를 짓자, 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말인데…… 졸업한 뒤엔 어디에 지원할 생각이더냐?”
이내 악병비가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감찰각에 오고 싶다면 자리 하나를 만들어 두마.”
이 인간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감찰각은 그야말로 무림맹의 황족 중에서도 황족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만통부엔 제갈소명이 제시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문턱만 있다면, 감찰각은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집안과 배경까지 모두 갖춰야만 들어갈 수 있다.
나 같은 삼류문파의 제자가 아무리 성적이 좋다 한들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씀.
설사 들어간다 해도 정상적인 일을 맡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뭐, 결국 심부름이나 하다가 결국 쫓겨나겠지.
“됐습니다. 허드렛일이나 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으니까…….”
쾅!
“누가 허드렛일을 맡긴다더냐!”
씨바 깜짝아! 왜 갑자기 탁자를 내려치고 난리야.
본인도 민망했는지, 악병비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덧붙였다.
커흠. 이번에 내가 대당주가 된 것은 알고 있지?”
“네. 정말 말세네요.”
“이 자식이…… 크흠, 아무튼 그 덕분에 삼(三) 당의 인원들이 한 자리씩 올라오며 대주 자리가 하나 났다.”
나는 얼토당토않은 말에 말문이 멎었다.
감찰각과 집행각은 다른 직군들보다 계급이 한 단계씩 높다.
즉, 감찰각의 대주 자리라면 일반 직군에선 대대주 자리에 준한다는 이야기.‘그러니까 말이냐 되냐고.’아무리 학관 수석이라도 과분한 자리다.
아니,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이야기.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악병비가 또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또 험악…… 아.”
저게 미소 짓는 거라 했지.
진짜 봐도 봐도 적응되지 않는 미소였다.#학관으로 돌아가는 길.
무림맹엔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한쪽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다른 한쪽엔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 친지로 보이는 구성원들부터, 한 문파의 인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원통해하고 분통해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맹원들의 설명을 듣다 혼절하는 사람, 격분하면 맹원들의 멱살을 틀어쥐는 사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슬픔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가만히 걷고 있자니, 몇몇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자들이 있었고, 황망히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울면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까지.
저들에게 앞으로 더 흘려야 할 피가 남았다고 이야기해 준다면 위로가 될까?‘그럴 리가.’전혀 위로가 되지 않겠지.
세상에 당연한 죽음이란 없으니까.
한편으론 그런 의문이 든다.
지금쯤 마교 놈들은 슬퍼하고 있을까? 아니면.
환호하고 있을까.
희생의 슬픔보단 자신들의 전공에 더욱 즐거워하고 있겠지.
어쩐지 보지도 않은 그림이 눈앞에 떠오르는 바람에 가슴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치고 올라온다.
나는 다시금, 소중한 이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곤, 선명한 기억 속에서 마교 놈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다짐한다.
언제까지고 슬픔이 우리만의 것은 아닐 거라고.
언젠가 너희들도 황망한 죽음에 침통한 분위기를 겪을 거라고.
반드시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