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7
3. <요동치는 물살(5)>사박 사박 사박하얗게 쌓인 눈이 밟힐 때마다 기분 좋은 느낌이 발끝을 타고 올랐다.
눈 때문에 새로 산 신발이 조금씩 물기를 머금었지만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밟는 기분이 들어 신법을 펼치지 않았다.
해가 뜬 지는 꽤 되었지만 학관을 오가는 학관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학관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이다.
“대사형.”
사(四)
인 기숙사 쪽에서 금·은·동 형제가 다가왔다.
사련도 녀석들과 같이 있었던 것인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은호 녀석이 다 갈라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천검벽(千劍壁)
에 지금 가시는 겁니까?”
“그래. 공부해야 할 시간인데 괜히 온 것 아니더냐?”
눈가에 짙게 찌든 묵빛이 안쓰럽게 보인다.
그러게 왜 그런 엄한 곳엔 간다고 해서.
“아무리 바빠도 태을문의 제자로서 이건 봐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녀석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찌든 몰골로 양껏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뭐라고.
다른 이들은 석공에게 맡기기도 하는데.
하지만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나 또한 석공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을 직접 하기 위해 이렇게 나왔으니.
“빨리 가요. 기다리겠어요.”
사련의 재촉에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 무각 지원이다 시험이다 바빠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몰아서 나누었다.
사실 이 묘한 정적이 불편하고 못 견디겠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어쨌든 사제들을 백랑각에 지원시켜 놓고 나만 나온 꼴이니.
그러나.
“뭐? 어디로 간다고?”
동룡이가 꺼낸 갑작스런 소식에 깜짝 놀랐다.
“맹주전이요.”
맹주전이 공식적으로 사람을 뽑았던가?
아니, 그 전에 학관생이 맹주전을 들어갈 수 있나?
애당초 맹주전은 신규 인원을 잘 뽑지도 않을뿐더러, 뽑더라도 무도의 수준이나 무사로서의 경험, 강호의 명성까지 일정 수준을 넘어 완숙의 경지에 들어선 이들만을 간간이 받아왔었다.
그런데 갓 졸업한 학관생을 받았다고?
무림맹주가 무림맹을 사유화할까 경계하는 이들로 인해, 등용하는 데 있어 한 사람 뽑기조차 워낙에 힘들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명숙의 반열에 들어간 이들 정도는 되어야 겨우 들어가 일하는 실정이었다.
어찌 보면 만통부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곳이 바로 맹주전인 것.
그런 맹주전에서 사람을 모집한다는 소식도 놀라웠지만, 동룡이가 들어갔다는 건 더욱 기함할 일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금표와 은호, 사련도 몰랐던 듯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룡이를 바라봤다.
다행이다. 나만 몰랐던 게 아니라서.
우리가 기겁하거나 말거나 동룡이 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읊조렸다.
“사실 거절할 생각이어서 따로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어요.”
방금 뭘 들은 거지……?
태을문 제자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거절이라니. 그 맹주전을?
“대사형과 사저도 다 백랑각에 간다 하셨잖아요. 저만 따로 가긴 싫었거든요.”
너무도 태연한 대답에 우린 먹이를 본 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그간 항시 놀라운 일이 있어 왔다고 해도, 이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다는 아니지. 대사형은 빠졌으니까.”
사련의 사족에 뭔가 한마디 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눈초리가 날카로워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근데 혹시나 조건을 들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요.”
충격탄이 하나 더 날아들었다.
“…….”
우린 동시에 절간 부처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말하진 않았지만 서로 눈빛으로, ‘우리 막내 엄청 똑 부러지는구나. 맹주전을 상대로 거래라니.’라고 얘기하는 느낌이었다.
정적이 이어지자 동룡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
저 잘못한 건가요? 대사형이라면 이런 상황에 꼭 원하는 바를 제시할 것 같아서…….”
어쩐지 사련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가 뭘…….”
“애들 앞에선 냉수 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거 몰라욧!”
거, 똑 부러지고 좋구만 괜히 그래.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백랑각에 가지 못한 일까지 끌어와 엄청 쏘아붙일 듯해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서 뭘 요구했는데. 설마 돈……
같은 거 요구한 건 아니지?”
만약 그랬으면 진짜 죽고 싶어질 거 같거…….
“개인 교습이요.”
“응?”
“개인 교습을 받고 싶다고 요청했어요.”
동룡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묵림에서 느꼈어요. 대사형을 돕기에는 아직도 멀었구나. 아니, 어쩌면 이대로라면 평생 대사형을 도울 수 없을 것 같다고……
요. 그래서 부탁드렸…… 윽.”
사련이 와락 동룡을 끌어안았다.
동룡의 키도 많이 컸건만 사련은 여전히 막내를 안듯 녀석을 꼭 안아주었고, 동룡은 슬쩍 무릎을 굽혀 높이를 맞춰주었다.
“아니야, 동룡아.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더구나 묵림에서도 우린 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잠시 사련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동룡이,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더 노력할게요. 저를 위해서, 그리고 사형제들을 위해서라도.”
동룡의 각오에 우리 사형제들은 절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진정으로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대사형으로서, 녀석들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래, 얘들아. 어딜 가고 어딜 가지 못하고 그게 뭐가 중요하더냐. 결국 서로가 서로를 위하면 그만인…….”
“혼자 도망친 사람은 조용히 하세요.”
“앗! 미안.”
실패로군.
나를 노려보던 사련은 어느새 표정을 풀고는 기특하다는 듯 동룡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고, 동룡이 녀석은 부끄러운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렇게 나를 제외하고 훈훈한 분위기가 지속되는 와중에.
“근데 개인 수련을 누가 봐주려나? 맹주전엔 딱히 부대랄 것도 없잖아.”
은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곧장 금표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어깨를 툭 쳤다.
“에이, 거기 소속된 고수들이 몇인데, 동룡이 하나 못 봐주겠냐.”
“아니, 그 사람들도 다 사문이 있고 그런데…… 함부로 가르칠 수는 없을 거 아냐.”
“그건 그렇네…….”
“흐음, 그 사람들 빼면 호위들인데…… 설마 호위무사가 나와서 동룡이한테 가르침을 주겠냐고.”
금표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동룡이 녀석에게 물었다.
“동룡아, 누가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 있었어?”
동룡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가르침을 받고 싶은 분이 있다고 따로 말씀드렸어. 다행히 허락해 주셨고.”
태을문 제자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맹주전의 인물 중에 동룡이가 아는 이가 있었나? 하는 생각에 내가 의아함을 표했고.
“그게 누군데?”
동룡이는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명랑하게 답했다.
“무림 맹주님이요.”
그리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 음…… 그…….”
나는 머리가 멍해져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내가 헛것을 들은 건 아니었나 보다.#“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갑자기 들려온 성모란의 음성에 우린 정신을 퍼뜩 차렸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천검벽(千劍壁)
에 가 있을 시간 아니에요?”
아, 그게…… 너무 놀라운 얘기를 들었더니……. 그나저나 성 소저는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할 일도 없고. 그래서 나왔어요.”
태을문의 제자들이야 대사형인 내가 천검벽에 가는 것이 자랑스러울 일이지만, 다른 학관생들에겐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닐진대 그냥 나왔다니.
“우리 기수가 좀 특이합니까? 형님.”
성모란의 뒤편에서 활을 든 모용재화와 은설란이 다가왔다.
모용재화는 한참 활을 쏘다 왔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너희도?”
혹시 오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뒤쪽에서 우리 편으로 다가오던 장우재가 우뚝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검벽으로 향하는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이 늘어났다.
남궁선화와 일각, 철순직과 남화성 등.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인원이 불어나고 또 불어났다.
“니들은 대체 왜 온 거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학관생들이 일제히 엄지를 아래로 내려 보였다.
“흥, 지독한 치욕의 날이니까. 오늘의 치욕은 잊지 않겠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했지. 오늘의 일을 직접 눈에 담고 와신상담(臥薪嘗膽)
의 심정으로 반드시 갚을 것이다. 내 필히 그리할 것이다.”
“나는 그냥 시간이 나서 왔다.”
진짜 다들 더럽게 심심한가 보네.
근데 딱히 이게 비밀스런 일도 아닌지라 말리기도 뭐해서 그냥 따라오게 두었다.
어느덧 무림학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천검벽에 다다랐고.
“진 대표……?”
기다리고 있던 학사와 석공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긴, 좀 많이 모였어야지.
“이런 일은 또 처음이군. 강호인들은 질투가 심하다 했는데.”
나 또한 석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놈들이었다면 복장이 뒤집어져서 삼 일 동안 밥도 못 먹었을 텐데.
“진소운 대표님.”
이어 학사가 나를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학사가 안내한 곳은 천검벽의 한쪽 벽면.
그곳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듯 보이는 글자가 선명히 음각되어 있었다.
무림(武林) 칠십일대(七十一代).■■이 이끌었다.
학사는 빈 공간을 가리켰다.
“조금 작지요. 이곳에 적으시면 됩니다.”
학사가 가리킨 곳의 위쪽을 확인하자, 똑같은 문장이 단어 하나만 다르게 쓰여 있었다.
무림(武林) 칠십대(七十代).
무당(武當)
이 이끌었다.
그리고 같은 문장들이, 문파의 이름만 바뀐 채로 빼곡하게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 문장들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무림학관의 역사와 함께해 온 기록들.
초대의 누군가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던 일.
그것을 이대(二代)
의 학관 대표가 따라 하고.
삼대(三代), 사대(四代)
의 대표들도 그게 마음에 들었던지 이어 글자를 새기면서, 무림학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작은 절벽엔 학관생들만의 전통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전통은 십대(十代), 이십대(二十代) 긴 세월을 거치며 학관 졸업생들의 상징이 되었고.
사십대(四十代)
에 이르러서는 당대 무림맹주가 이 작은 절벽에 직접 천검벽(千劍壁)
이란 이름을 내려주면서 학관의 공식적인 행사가 되었다.
천 개의 기록을 새기라는 뜻의 천검벽(千劍壁).
비록 전생에선 그 이름과 달리, 결국 칠십일대로 끝이 나버렸지만.
무림학관이 사라지기 전까지 천검벽의 문장은 학관생들의 자랑스런 기록이자 기록을 남긴 사문에겐 자부심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장 처음 새겨진 기록을 보았다.
다른 글자들보다 확연하게 큰 글자로 새겨진 글자가 눈에 띈다.
무림(武林) 일대(一代).
소림이 이끌었다.
무림학관을 졸업했다 해서 무림을 이끈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 세대의 인원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상징.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문파가 그 세대에서 부흥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뒤로 ‘무당’ ‘점창’ ‘화산’ 등등 많은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구파일방의 이름들이었고, 그다음으로 오대세가. 간간이 백팔봉의 사문들의 이름도 올라가 있었다.
재미난 점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문파의 이름도 몇몇 남아 있다는 것.
강호에서 사라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버린 문파이지만, 천검벽에 남은 기록은 그 문파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묘한 감상에 젖는다.
학관에 입학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소림으로 시작해 소림으로 끝났던 천검벽의 기록은, 무림학관에 들어온 뒤 줄곧 대표 자리를 욕심부리게 만든 원동력이었으니까.
벽 앞에서 생각에 잠겨있는 그때.
“대체 뭐 하는 거야? 추워 죽겠고만.”
“너무 작아서 긴장되는 거지. 실패하면 개망신이니까.”
“검로에는 그 사람의 깨달음이 담긴다는데, 천박하기 그지없는 검로가 나올까 봐 걱정하는 거 아냐?”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크크크.”
감상에 젖어 있는 나를 깨우는 잡담에 절로 이가 갈렸다.
욕지거리와 함께 놈들을 쫓아내려 휙 돌아보니.
어쩐지 묘한 눈동자로 천검벽을 올려다보는 학관생들이 있었다.
“어떻게든 진소운을 끌어내려 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이 꼴을 보면 분해서 못 참을 것 같았는데.”
그때.
“그런데 말이야…….”
몽롱한 눈빛으로 절벽을 바라보던 한 학관생이 나직이 읊조렸다.
“우리 기수보다 ‘이끌었다’는 저 기록이 명확한 사실이었던 적이 있을까?”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고.
그 말은 어느새 내 가슴에 새겨졌다.
여전히 절벽을 하염없이 훑고 또 훑는 학관생들.
다들 각자의 감상에 젖은 것 같아 그 고요를 깨지 않았다.
추운 날 굳이 보러 와준 게 고맙기도 했고.
나는 몸을 돌려 다시 절벽을 마주했다.
챙.
적광검이 뽑혀 나오고.
학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천천히 태을진경을 끌어올렸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기에,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움직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게.
오백 년 전 태을문을 세운 선조의 뜻과, 미래를 바꾸려는 나의 다짐을 담아.
전생과 다른 이름이 남게 되었듯, 이 기록이 마지막이 되질 않길 바라며.
스스스스스돌가루가 작게 흩날리고, 기록은 천천히 완성되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검로와 함께.
스륵.
검을 거두어들이자.
“오오!”
작은 감탄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온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가 새긴 문장을 기억 속에 깊이 새겼다.
무림(武林) 칠십일대(七十一代).
태을(太乙)
칠십일 개의 기록 중에 처음 기록되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