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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이지 않는 격류(8)>초반의 무거운 분위기가 술향과 함께 날아간 듯 송화각에 모인 학관생들은 요란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갔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따라 부르고, 농담을 던지면 되받아쳤다.
내 예상보다 술자리는 점점 길어졌다.
애도를 표하고, 슬픔에 젖다가 다들 지친 기색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크하하하! 여기 술! 술 가져와! 가장 비싼 술!”
“태을문 상단이 요즘 그렇게 잘나간다며? 안주도 있는 대로 다 가져와!”
이 씹새들이 아주 날을 잡은 듯 미친 듯이 뜯고 맛보고 마시기 시작했다.‘씨바…….’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가는데.
문파별로 소속별로 앉았던 인원들이 다 제각각 서로 섞여들기 시작했다.12봉성에 소속되어 있던 자가 정도회 소속이었던 이와 술잔을 나누고.
백도회에 속한 자가 12봉성의 인원에게 장난을 쳤다.
“얘들…… 왜 이렇게 친하냐?”
이 분위기가 생경하여 내 옆에 앉아 있던 은호를 바라보니.
“가끔 학관 내에서 대대별로 모이고 그랬습니다.”
“응?”
뭔 소리지?
영 알 수 없는 대답을 해온다.
다시금 물어보려는 찰나.
“오(五) 대주!!”
위립군과 종추악이 은호의 양 옆구리를 잡고 녀석의 몸을 들어 올렸다.
“허어……! 대주가 돼서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이거이거 직무유기외다!! 대원들이 다 기다리고 있지 않소!”
이거…… 진짜 뭐지?
“빨리 가십시다!”
“가즈아!!”
요란스레 채근하는 소리에,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린 은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가봐야겠군요. 술 조금만 드세요, 대사형.”
“…….”
끌려가는 건지 원해서 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은호가 가버렸다.
뒤이어 금표, 동룡과 모용재화, 은설란도 가버리고 내 탁자에 남은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오붓하게 우리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요.”
아무래도 아이들이 있으면 남궁선화나 성모란 등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힘드니…….
“제가 왜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이건 또 뭐지?
항시 상냥하고 친절한, 더구나 당서희의 돌출행동까지도 늘 받아주던 남궁선화가 왠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음,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내가 질문하자, 갑자기 남궁선화가 허둥거리기 시작한다.
“……
자, 잘못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아니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순 없고…….”
“잘못한 걸 알려주시면 시정하도록…….”
“어, 어쨌든 제가 항상 진 공자님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에요!! 아시겠어요?!”
다시금 서늘한 표정으로 일변한 남궁선화.
그녀는 소리 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을 찾는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이쯤 되니 머리가 아파 온다.
“성 소저…… 혹시 제가…….”
“실망이에요.”
“네? 뭐가요?”
성모란은 말을 채 끝내지도 않은 채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여자 맘을 모르는 나라지만, 이건 좀 어처구니없는 행동 아닌가?
고개를 돌려 사련을 바라봤…….
“대사형……. 항시 행실을 똑바로 하라 가르치지 않았던가요?”
그러니까 ……
무슨 행실.”
“그런 게 있어요.”
사련마저 그렇게 말하곤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떠버렸다.
“아니, 대체 그게 뭔데…….”
내게 뭔가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학관생들이 사활단 대대별로 모여 있다.
술이 좀 과하게 들어가서인지 다들 목청이 커졌기에, 원치 않았음에도 토론하는 소리가 다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나 봤더니.……
너네 대주가 병신이냐 우리 대주가 병신이냐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꽤 심각했는데.
여차하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이거 말려야 하…….
“잠깐…… 잠깐…… 어차피 이대로 결론이 안 나니, 흐음…… 그래! 단주가 병신인 걸로 하자!”
씨벌, 나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어떤 한 놈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중재를 시도했다.
갑자기 멍청한 말을 하는 놈은 집단 구타를 당하기 마련이다. 분위기 파악 못 한 저놈의 명복을 빌어주려는 순간…….
“호오오!!”
팽팽하던 긴장감이 갑자기 풀리며 이곳저곳에서 동의가 흘러나왔다.
“좋아!”
“좋다!”
“옳은 결론이다!”
“자네 천잰가!!”
시발 장난하나?
오 층의 인원들 사이에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무당파와 모용세가, 죽현방의 합격이 일품이었다.
곽수산이 이끌었던 사(四) 대대 놈들은 묵림에 갔다 온 후에도 손발을 맞춰 본 건가?‘시끄럽네.’내공이 오르며 오감이 민감해진 후로 평소에는 어느 정도 감각을 차단하고 생활했기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술을 과하게 마신 오늘 같은 날에는 감각 차단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런저런 소리들이 자꾸 들려온다.‘후…….’학관생들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일·이 층과 위층에서 하는 이야기까지 들려오다 보니 내부에 앉아있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쐴 겸 주루 뒤쪽으로 가려는데 학관생들이 하나둘 말을 걸어온다.
“단주, 어디 가시오?”
“바람 좀 쐬러.”
“왜, 재미가 없소?”
“바람 쐬러 간다고 멍청아.”
“거 뭔 바람은 바람이오. 이리 오시오. 술이나 한잔하게.”
하긴 청승맞게 혼자 바람 쐬는 것도 웃긴 일이지.
못 이기는 척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다른 학관생이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소곤거리는 것치곤 꽤 큰 목소리였다.
“야! 단주 오면 불편한데 왜 붙잡아! 그냥 나가게 놔두지……!”
“아, 그래서 안 부른 거였어?”
“그래! 우리의 주적은 상관 아니냐!”
시벌, 유달리 내 주위에 사람이 없다더니.
나 따돌림당하고 있었던 거냐?
왜지?
인격적인 결함은 전혀 없는데. 더구나 이렇게 술도 화끈하게 사주고.
아니, 세상에 이런 상관이 어디 있다고? 더구나 애초에 실제 상관도 아니잖아. 빌어먹을.
난 한잔하자고 말을 꺼낸 녀석이 곤란해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됐다. 바람 쐬고 들어올 테니 정신이나 붙들고 있어라.”
“흐흐흐. 다녀오시구려. 놈들도 좀 더 취하면 상관이건 동료건 못 알아볼 테니.”
나는 녀석의 장난스런 미소를 뒤로하고 정원으로 향했다.
송화각은 커다란 주루와 함께 뒷마당에 펼쳐진 큰 정원이 명물이다.
송화각 내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비싸지만, 이 정원 사이사이에 있는 전각에서 마시는 술은 내부에서 마시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비싸다.
그래도 연못을 낀 산책로는 전각과 거리가 있기에, 오가며 정원을 구경하는 덴 제약이 없었다.
술 취한 사람들 몇몇이 바닥에 구르는 모습을 지나쳐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자 고요한 분위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연못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머리가 조금은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부 비워낼 순 없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다곤 하나 전각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아아, 여기서 이러시면…….”
상단엔 내가 미리 이야기했으니 우릴 분명 선정…….”
“복수할 거야…… 날 버린…….”
술기운을 빼내고 감각을 차단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어차피 안에 들어가서 더 술을 마실 예정이었으니까.
최대한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고 반짝이는 별의 개수를 세고 있었는데.
“문주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태종 학관생이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들었습니다.”
정원의 끝 가장 은밀한 곳에 위치한 전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였다.
의도치 않게 시선이 전각으로 향했다.
어스름한 촛불 사이사이로 화려한 복장의 사내들이 서넛 앉아있었고, 그 가운데 해진 무복을 입은 사내가 조용히 술잔을 넘기고 있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우나 축하드립니다.”
화려한 장포를 입은 사내의 말에 해진 무복을 입은 사내는 주향을 음미하듯 천천히 술잔을 넘겼다.
이윽고 술잔을 내려놓은 사내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고맙소이다. 내 이리 일이 풀릴 줄은 예상치 못해서.”
송주생의 말에 주변에 앉은 이들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유족 보상금이 꽤 많이 책정된다 들었습니다.”
“교관들이 워낙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어야 말이지.”
“보상금은 사문으로 전해 주겠지요?”
송주생이 술을 한 잔 더 받으며 잠시 생각에 젖어들었다 이내 고개를 치켜들었다.
“금태종 그 아이는 일학문을 제집처럼 여겼소. 우리 또한 그 아이를 자식처럼 생각했고. 분명 우리를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생각할 거요.”
장포를 입은 사내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
“하지만 보상금…… 그게 뭐 중요하겠소? 진짜 중요한 건 다른 것이지. 이번 백팔봉성을 선정하는 때에 여러분들이 힘을 실어주었으면 좋겠소.”
“흠…… 아직 천목장이 발목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천목장도 백팔봉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텐데요.”
“그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오.”
“해결된다는 말씀은?”
“우리 사문의 제자가 죽었소. 지금 무림에서 학관생 유가족의 슬픔보다 더욱 강력한 명분이 어디 있겠소?”
“흐흐, 새옹지마(塞翁之馬)
로군요.”
“그렇지요. 새옹지마…… 새옹지마지요, 하하하!”
해진 무복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비단장포보다 더욱 눈에 띄었다.
워낙 많이 빨아 색이 다 빠져버린 탓이겠지.
“하아…….”
좀 전까지 들끓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장에 달려가 송주생을 폐인으로 만들면 속이 풀릴까?
아니면, 그에게 또 다른 명분을 주게 되는 걸까?
자기 제자의 죽음을 이용하는 인간이 자신의 부상은 이용하지 못할리가 없겠지.
머릿속에 범람하는 상념들을 멈추었다.
무슨 상관이람.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금태종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남의 죽음을 이용하려는 놈들이 잘 먹고 잘사는 꼴은 배 아파서 못 보겠네.’부웅
-무복이 거칠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독한 주향이 코끝을 간질거렸다.
주향이 빠지고 나자 머리가 맑게 돌아왔다.
마신 술이 아깝지는 않았다.
오늘 밤은 더 이상 술을 마실 일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그대로 송화각을 빠져나와 무림맹으로 향했다.#“……
으헉!”
책상에 엎드려 자던 맹주원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잠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서류들을 살폈다.
애써 만든 서류가 침으로 인해 망가진 건 아닌지 걱정하며.
“휴…… 다행이군…….”
사천에서의 일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금 묵림에서 일이 터지며 만통부의 인원들은 갈가리 갈려 나가고 있었다.
도중에 못 하겠다며 탈주한 인원들을 천목각에서 붙잡아 오기도 했었다.
감찰각과 집행각에 신고하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탈주 인원에게 ‘그럼 일이 더 많아질 텐데?’라는 말로 안정을 선물하는 일도 있었다.
그만큼 한계의 한계에 다다라 있는 상황.
그나마 희망이라면 무림학관의 졸업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갈소명의 말에 따르면 만통부에 데려올 만한 인원이 무려 서너 명은 된다고 하니…….
이는 만통부의 인원들을 일하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자 원동력이었다.
“진소운은 곧장 일을 시킬 수 있을 테고, 다른 인원들은 진소운더러 교육을 시키라고 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조금만, 조금만 견디면 된다.
그럼 이 지옥 같은 만통부 생활도 어느 정도 해소가 될 것이다.
진소운과 그 동기들이 갈려 나가겠지만…… 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하지 않던가.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응? 이게 뭐지?”
서류 더미 안에는 두 개의 못 보던 문서가 있었다.
하나는 묵림에서 죽은 학관생들의 유가족 보상안에 대한 계획.
학관생들에게 주어지는 유족 보상금이 사문을 통해 전달될 경우 손실될 위험이 있기에 직접 보상하자는 제안, 그리고 그 방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대로라면 확실히 사문을 통하지 않고도 학관생 유족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줄 수 있을 듯싶었다.
다른 하나는 천목각에서 올라온 첩보였다.
이미 무림맹에서 묵림의 일과 연관 지어 사술을 익혔다는 누명을 씌우는 행위를 엄금했음에도, 죽은 학관생들의 사문 중에 일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일학문이라…….”
그러고 보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사천의 일이 있었을 때도 일학문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었지.
때마침 맹주령이 선포되면서 잠잠해졌다 생각했는데…… 다시금 일을 벌이려는 건가.
두 개의 문서를 살펴보던 맹주원은 알 수 없는 찝찝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첩보야 그렇다 치고…… 보상안은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사실 맹주원의 입장에서 예전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던 것인 만큼 그 내용이 더욱 눈에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이런 문서를 만든 기억이 없다는 것.
“흠…….”
문서를 다시금 보았다.
너무도 완벽하게 설계된 문제 제기와 그 해결법.
그야말로 만통부의 일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문서였다.
한참을 꼼꼼하게 문서를 살피던 맹주원.
“아!”
그가 깨달음과 함께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내가 만든 것이로구나.”
이제는 자는 와중에도 이런 완벽한 문서를 만들 수 있다니.
맹주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다시금 감탄했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군.”
부장 전결 도장을 찍으며 문서 두 개를 속히 처리했다.
“킁…… 킁…… 근데 어느 놈이 업무 중에 술을 마신 거야.”
왠지 집무실 내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주향에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이내 가볍게 넘겼다.
“하긴 이미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아니지. 나도 간만에 한잔하면서 할까?”
아직도 그의 책상 위엔 수십 개의 문서가 남아 있었고, 그 또한 술 없인 그냥 처리할 수 있는 양은 아니었으니까.#급하게 문서를 만들고 만통부에 들렀다 나올 때쯤.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 별들이 많음에도 여명이 차오르는 하늘은 묘한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하필 이런 때에 이런 풍경이라니.”
어쩌면 내가 한 행동은 금태종이 바라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금태종이 일학문을 가족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일학문의 부흥을 더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꽈악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일학문주는 금태종의 죽음을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제자에 대한 존엄을 버렸다.
금태종이 아무리 사문의 부흥을 바랐다고 한들 내가 묵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숱한 죽음이 이어져 언젠간 목숨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해도, 벌써부터 그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벌써부터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만통부 건물을 벗어나 다른 각들의 건물을 지나는 길.
꿈틀
-연무장의 한편에 작은 덩어리가 있었다.
야생동물인 줄 알고 다가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덩어리는 웅크린 금태선이었다.
며칠 전 봤을 때보다 더욱 때가 탄 옷은 이제 화려한 색깔마저 빛바래 버렸다.
내 인기척 때문인지 금태선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얼굴에 가득한 얼룩 중 유독 눈물 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이는 마지막에 봤던 때처럼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마가 오라버니랑 놀 수 없대. 오라버니는 나랑 놀기로 약속했는데…….”
“다 나빠! 엄마도 아빠도 문주 아저씨도!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는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인데, 다들 오라버니가 약속을 안 지킬 거라고만 말해…….”
그의 죽음을 전하는 것보단 그가 나쁜 사람이라 이야기하는 게 마음이 더 편했을까.
어떤 이야기를 전하든 결국 흐려질 기억이라면, 커다란 상실감보단 작은 실망감을 전달하는 게 나으리라 판단했겠지.
녀석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그렇구나.”
“다 나빠. 아무도 약속을 안 지켜! 무사 삼촌도 나빠! 오라버니 찾아주겠단 약속 안 지켰어.”
하지만 나 또한 그들처럼 비겁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상처는 세월 속에 아물어 갈지라도 아이의 흉터 자국은 오래도록 남을 테니까.
또 마침, 품 안에는 당서희가 좋아하는 홍가당과가 있기도 했고.
“당과 먹을래?”
안 먹어!”
고개를 홱 하니 돌린 작은 몸 뒤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맛있어. 내가 아는 어떤…… 꼬마도 되게 좋아해.”
잠시 고민하던 금태선이 천천히 몸을 돌려 당과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오물오물 당과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니?”
아니! 맛없어.”
내게 보여주려는 듯 당과를 잠시 내려놨던 아이는 금세 당과의 맛에 이끌려 다시금 당과를 입에 넣었다.
“많이 먹어.”
다 먹어도 돼?”
“응.”
진짜야?”
“그래.”
아이는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으로 당과를 한가득 베어 물었다.
“이 약속은 지킬 거지?”
그래.”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천천히 떠오르는 여명 때문에 빛을 받은 눈물 자국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겹쳐진 당과의 숫자를 기억하려는 듯 몇 번이나 ‘하나, 둘, 셋……’을 반복하는 금태선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몇 개 있는지 안 세어 봐도 돼.”
열 개도 넘는데?”
“이 오라버니가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은 무지 좋거든. 그러니 걱정 말고 먹어.”
금태선은 머쓱한 기분이라도 느낀 듯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떠오르는 여명을 바라보았다.
아마 태선이에겐 오늘 먹은 당과도, 오늘의 슬픔도 세월 속에 점차 흩어져 갈 것이다.
어른들이 바랐던 대로 흐릿해지는 기억을 뒤로하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며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기억할게.”
당과의 개수도, 금태선의 슬픔도, 금태종의 죽음도.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력을 가진 내가 기억할 것이다.
이날의 슬픔도, 지난날의 죽음도 모두 내가 기억할 것이다.
전생에서처럼 이 기억들이 나를 짓누르고 뭉갤지라도.
오늘의 분노와 슬픔을 잊지 않고.
오늘의 기억과 아픔을 모두 기억한 채로 반드시.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이 약속은…… 꼭 지킬게.”
대답 없는 금태선에게 지워지지 않을 맹세를 몇 번이나 되뇌고, 또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