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1화.
극복.
튜토리얼에서 도현이 얻은 특성 중, 줄곧 발동되지 않았던 유일한 특성.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 기억 한 편에서 잊혀진 특성.
한데 그것이 사실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자, 무려 권왕이 소유하고 있다는 게 밝혀진 순간.
-호오, 그걸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심지어는 시큰둥하던 르시아마저 저것을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깊은 관심을 보인 순간.
‘얼마나 좋은 특성이길래?’
도현은 기대했다.
개화 조건이 필요한 것부터 인간만의 특성인 점까지.
모든 면에서 범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도현으로선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극복은 대체 무슨 능력입니까?”
이 빌어먹을 정도로 있어보이는 특성이 무엇인지.
응당 당연한 의문에 르시아는 흔쾌히 답해주었다.
-극복은 말 그대로 한계를 극복하는 재능이다.
“음. 더 자세히는 없어요?”
-이보다 자세할 수는 없어. 그것밖에 설명할 길이 없으니.
“……?”
순간 말 장난인가 싶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내가 본 극복의 재능은 비록 세 명 뿐이지만…… 그들 모두 조건이 달랐다. 누군가는 인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조건이었고, 또 누군가는 스스로 가둬둔 잠재력의 틀을 부수고 날아오르는 것이 조건이었지.
“아.”
-후후, 아마도 재능의 소유자마다 다르게 적용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극복일 수도 있지. 저마다 극복해야할 것은 다를 테니 말이야.
“일리 있네요.”
-그래. 하지만 한 가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게 하나 있다.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그녀가 말한 것이 바로 심상공간이었다.
극복해야할 조건을 달성해야할 무대.
그곳은 오직 도전자의 내면에 있는 심상공간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성취해야만 하는 것.
-궁금하단 말이지. 기묘한 기운을 가진 네가 극복할 것은 무엇일지. 그렇게 개화한 재능이 무엇일지.
그녀의 말에 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무척이나 궁금하고 기대되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심상공간에 들어갈 수 있게 인도해주는 것뿐. 본래 스스로 심상공간을 깨닫고 들어가려면 수 년이 걸리니 고맙게 생각해. 무려 수 년의 시간을 벌어준 거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무운을 빌게.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경쾌한 알림이 울렸고,
[심상공간으로 이동됩니다.]
곧이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끝으로 도현은 이동되었다.
이것이 대뜸 홀로 이 아무 것도 없는 흐릿한 무의 공간에 도착하게 된 사연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지금.
생애 둘도 없을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철그럭-
180cm가 조금 넘는 신장에 늑대처럼 날렵한 체격.
전체적으로 검정색에 견장과 같은 부위에 은색이 섞인 갑옷.
시야가 좁아진다는 이유로 투명화한 투구 때문에 훤히 드러난 검은 머리와 얼굴.
적당한 길이의 은색 한손검.
‘……설마 아니겠지 싶었는데 이건 뭐 복장부터가 빼박이네.’
어딜 어떻게 봐도 확실하게 뎀로크 시절의 카이저다.
전설급 스킬 하나 없어 불운의 상징으로 불렸으나, 압도적 1위 랭커로 한 게임을 풍미했던 캐릭터.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 빛나던 자신 말이다.
‘이거 참…….’
기분이 묘하다.
3자의 시선으로 움직이는 자신을 보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오묘한 건 뎀로크 시절의 모습을 다시금 보았다는 것이었다.
뎀로크는 서비스가 종료된 게임이니까.
망겜이라 욕해도 애정을 가지고 키웠던 캐릭터.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자신의 캐릭터가 적이 되어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이게 되는 것도 신기하네.’
알X고 보다 수십 배는 뛰어난 성능의 인공지능이라더니.
생체 정보를 통해 기억 속 모습을 재현한 건가?
한데 그렇다기엔 다소 의아한 것이 뎀로크 시절에도, 이런 비슷한 현상을 일으키는 보스가 있었다.
서큐버스 퀸.
몽마의 여왕인 그녀는 대상에게 가장 달콤한 꿈을 꾸게 한 후 그것을 현실화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형태만일 뿐.
‘개발사가 다르니 당연하겠지.’
이미 존재하는 프로그램도 아니고, 즉석에서 그렇게 뚝딱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사아-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잘생긴 저 놈은 뎀로크 시절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만.
왜일까?
[자세를 잡으십시오.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될 시 전투가 시작됩니다.]
스윽.
말없이 자세를 잡는 저 녀석의 모습이 소름끼치도록 자신과 똑같다.
정확히는 과거의 자신과 같았다.
천변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자세를 조금 바꾼 지금과 달리, 온전히 검과 상대에게만 집중한 자세.
스으으-
그리고 살짝 옆으로 쥔 검에서 새어나오는 저 은은한 은색 빛.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짙어져 어느덧 은은함을 벗어나 광채를 내고 있는 것까지.
‘소드 오러…… 에 전설급 무기 그란테리온의 오러 증폭 효과?’
모든 게 그 시절 자신과 똑같았다.
이걸 과연 형태만 재현한 거라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무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베일에 감싸여있던 극복 특성의 개화를 위한 자리에서 형태만 재현한다?
그것도 이상했다.
두근,
도현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저 카이저는 그저 모양만 흉내낸 것이 아닌, 진짜라고.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른다.
뎀로크는 갓오세의 이전작이니 정보가 남아있는 걸 이용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인공지능이 미치도록 뛰어난 거겠지.
두근- 두근.
뭐가 되었든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그런 의문 따위, 이미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과거의 나와 싸운다고?’
꿀꺽 마른침이 넘어갈 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더욱 크게 들려온다.
상대 입장에서 보는 나는 어떨까?
과연 나는 과거보다 발전했을까? 퇴화했을까?
‘곧 알게 되겠지.’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걸 굳이 막지 않으며, 도현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눈앞의 카이저의 공격적인 자세와는 다소 다른, 언제든 스텝을 쉽게 바꿀 수 있게 공간을 더욱 넓힌 자세로.
이윽고 들이마쉰 호흡을 고요하게 가다듬은 순간.
[준비를 마쳤습니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놈이 움직였고, 도현이 곧장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서걱-
목이 베였다.
* * *
“이런 미친……!”
눈을 뜨자 시간을 되돌린 듯, 자신과 마주보고 서있는 카이저를 보며 도현이 욕부터 내뱉었다.
그런 그를 조롱하듯 떠오른 메시지.
[당신은 패배하였습니다.]
[다시 도전하시겠습니까?]
‘일격에 죽은 거야?’
치열한 전투를 기대했건만, 이리도 허망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심상공간이기에 죽어도 재도전할 수 있기에 방심하기는 했다만…… 일격이라니?
이건 단순히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도로 격차가 난다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검을 휘두른 순간, 마주 휘두르던 놈의 검이 순간 뱀처럼 휘감기더니 공격이 패링됐다.
그 직후 내질러진 검을 패링하려했으나 실패했다.
턱-
붙어있느라 보이지 않는 하단 시야에서 튀어나온 발이 다리를 밀어 거리를 벌린 것이다.
간발의 차로 사거리에서 벗어난 사이, 놈의 검의 궤도가 아래에서 대각선 위로 바뀌며 목이 베였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소름끼치도록 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당초 자신을 재현한 건데 반응 못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너무 집중을 못 했어. 다시 해보자.’
도현이 지긋이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설렘과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가슴은 차갑게 내려앉아있었다.
눈을 뜨자 여전히 하공에 자리잡고 있는 메시지가 보인다.
“다시 할게.”
이번에는 제대로 간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외치자, 놈이 곧바로 자세를 잡는다.
좀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도현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순식간에 공격을 받았으니, 이번엔 역으로 돌려줄 심산이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또 다시 목이 베였다.
“……다시.”
고요한 놈의 낮짝에 열이 뻗친 도현이 다시 뛰어들었다.
푹!
그리고 심장을 꿰뚤렸다.
“다시.”
푹, 서걱-
주시안인 오른 눈이 찔려 생긴 암흑시야로 날아온 검에 목이 베였다.
꽈아악-
이번엔 검도 아니고, 초크로 질식사했다.
그렇게 찔리고, 베이고, 졸리고.
서걱- 석-
죽고, 죽고, 또 죽고…….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허.”
미간을 잔뜩 찌푸린 도현과 달리, 태연한 놈의 얼굴이 보인다.
한 번 경험했다고 벌써부터 익숙한 풍경이다.
마치 모바일 게임에서 죽으면 저장한 위치에서 부활하는 기분이다.
한숨을 내쉰 도현이 타오르는 눈빛과 달리,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방심한 게 아니야.”
집중을 못해서 진 게 아니었다.
처음에나 그랬지 두 번째부턴 집중했고, 세 번째부턴 진심으로 싸웠다.
그리고 네 번째부턴 온갖 스킬과 능력들을 다 활용했다. 거기엔 역천기와 잊혀진 왕의 검술까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쉽게 죽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기로 싸웠을 정도.
‘…….’
그 결과 깨달은 것은 이곳에서 스펙의 차이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속도가 더 빠르고, 스킬이나 아이템의 등급 차이와 성능 차이는 있겠지만 그저 유리한 정도일 뿐.
‘결국 목이 베이고, 심장이 찔리면 죽어.’
이곳에서의 법칙은 게임보단 현실과 같았던 것이다.
즉 무엇보다 중요한 게 서로의 기량이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 기량에서 도현은 밀리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빠득-
최근 데미서스와의 싸움 이후로 한 층 더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이전에 튜토리얼에서 철혈의 마용종을 잡았을 때도 오히려 몸이 더 가볍다고 여겼다.
‘착각이었던 건가?’
몸이 더 가벼운 거야 VR보다 풀 다이브 형식의 가상현실이 더 생동감 넘치니 당연한 것이고.
성장했다고 여긴 것도 사실은 과거의 영광을 쫓는 것에 불과했던 건가?
‘……아니.’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성장한 건 맞아.’
데미서스와의 전투 때 보았던 느린 세상과 고도의 집중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맞으니까.
심지어 뎀로크 시절보다 수많은 아이템과 특성, 그리고 스킬이 있지 않은가.
게임적인 것이든, 실력적인 것이든 분명 성장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이유?
우습게도 너무 많은 걸 가져버려서였다.
‘새로운 것에만 몰두하느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걸 버렸어.’
가진 수많은 스킬과 특성을 활용할 생각부터 하는 자신과 달리, 저 놈…… 아니 과거의 자신은 어땠는가?
상대가 어떠한 걸 가져와도 오직 검 한 자루로 무너트렸다.
가는 실처럼 미세한 틈만 보여도 귀신같이 파고들어 숨통을 끊어내는 것이다.
‘……심리전과 사소한 디테일.’
처음 목이 베였을 때.
놈은 자신의 공격을 유도한 후 발차기로 허벅다리를 밀쳐 중심을 무너트렸다.
이때 발차기가 보이지 않게 상체의 액션을 자연스럽게 크게 휘둘러 시야를 가렸다.
역천기를 사용하며 묵직하게 받아치면, 놈은 신출귀몰하게 움직여 혼란을 주는 척하곤 단숨에 목을 꿰뚫었다.
하얀 사자와 눈보라로 공방을 이어가도 어차피 한 번만 목이 찔리면 죽으니 큰 의미가 없었다.
놈은 그걸 귀신같이 파악하며, 오히려 상대의 자신감을 역으로 이용했다.
‘방금도 그래.’
검을 거세게 내지른 것을 패링하자, 흘려지는 검에 중심이 무너지기 전에 스스로 손에서 검을 놓았다.
그리곤 곧바로 안다리를 걸곤, 뒤를 잡으며 넘어진 후 백초크를 걸었다.
도현이 뒤잡기를 사용하여 벗어남과 동시에 일어난 순간.
놈은 예상했다는 듯 이동베기로 목을 베며 지나가는 묘기를 선보였다.
‘……다 내가 했던 것들이야.’
우습게도 그 모든 게 자신이 과거에 한 번씩은 해봤던 전투 양상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하는 쪽이 상대였다는 것.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지금 활용해도 좋을 거 같은데 왜 안 쓰고 있던 거지?’
반문해보지만 이미 도현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굳이 저런 짓을 안 해도 될만큼 좋은 능력이 많으니까.
전설급 스킬만 해도 수두룩하고, 천변으로 무기를 바꿔가며 싸우기만 해도 만들 수 있는 변수가 수두룩하다.
사소한 디테일에 신경 쓸 이유가 없던 것이다.
그 순간, 우연인지 놈과 눈이 마주쳤다.
고요하게 가라앉아있는 그의 눈에는 소름끼칠 정도의 자기확신과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하.”
도현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왼손으로 눈을 가렸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물렀던가. 언제부터 스킬에만 의존했던가.
최후의 최후까지 왔을 때.
마지막까지 믿을 건 다른 무엇도 아닌 한 자루 검과 제 몸뚱아리 뿐인 것을.
“그래. 그게 맞지.”
손을 뗀 도현의 눈은, 카이저와 똑같아져있었다.
언제나 불합리한 조건 속에서 상대를 압도하던 그때의 눈과.
“어디 끝까지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