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6화.
바탄.
그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높이 손을 뻗자,
—!
그의 부름에 답하듯 칠흑으로 물든 하늘에서 검은빛이 기둥처럼 내려왔다.
검은 기둥은 정확히 바탄에게 떨어져 흉흉한 기운을 퍼트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가득 채운 어둠과 공명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막아라!!”
그 소름 끼치는 기운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알테리온이 다급히 소리치며 마법을 준비했지만, 그땐 이미 늦은 후였다.
[‘바탄’이 광역 마법 ‘테네브라 데보룸’을 시전하였습니다.]
[짙은 어둠이 광대한 범위를 집어삼킵니다.]
[경고! 감당할 수 없는 공격입니다. 피하십시오.]
“……뭐?”
“어?”
화려한 등장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유저들이 어어, 하는 순간, 갑작스레 터져나간 기둥에서 뿜어진 어둠이 전장을 휩쓸어버린 것이다.
어둠의 수렁에 잠긴 듯, 한없이 검은 어둠.
이윽고 커튼을 친 듯 어둠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곳에는 수백 명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호오…… 그 사이 방벽을 펼쳤나. 과연 엘프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라 불릴 만하군.]
“크윽, 이런…….”
그것도 그나마 알테리온이 뒤늦게 펼친 9서클의 방벽 마법이 마을 중심을 막았기에 망정이지.
아마 알테리온이 아니었으면 저 한 번의 마법으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지도 몰랐다.
다행이라면 바탄도 미리 준비했던 광역 마법을 시전한 거라는 것.
저런 광역 마법을 두 번 이상 펼치지는 못하는지 후속타가 날아오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입구 쪽을 지키는 병력이 전멸했다는 것이었다.
[적대 세력이 마을에 진입하였습니다.]
[마을 중앙에서 모든 엘프와 유저가 밀려날 시 엘프 마을이 점령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어어- 그어-
타다닷.
빈집털이를 하듯 심연의 마수들과 침입자들이 순식간에 밀고 들어왔고.
그때부터는 지옥이었다.
“여, 여제다!”
“젠장, 막아!”
“모, 못 막아. 저 괴물을 어떻게 막아!”
“그럼 손 놓고 있을 거야? 안 막으면 다 죽어!”
침입자들과 함께 치고 들어온 여제가 다시금 유저들에게 악몽을 선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싸움이 벌어지자 파괴적이던 엘프들의 궁술과 마법도 전과 같은 큰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한데 뒤엉켜있기에 큰 마법을 쓰지 못하기도 하고.
전과 달리 이젠 직접적인 방해가 들어오니, 마음 놓고 쏠 수가 없던 것이다.
그래도 클라스가 어디 가는 건 아니라고.
푸슉- 퓨퓩!
퍼엉! 콰아앙!
“그어어어-!”
“커헉!”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활 솜씨로 귀신같이 적들을 죽였지만, 문제는 엘프들이 처치하는 속도보다 전방의 유저들이 당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지금 남은 유저들은 최하위권의 랭커조차도 못 되는 수준.
사실상 평범한 게이머들이다 보니 여제와 침입자들을 상대로 버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종이 되어 우리의 위대한 뜻에 도움이 되어라. 하찮은 벌레들아.]
띠링-
[플레이어 ‘카르샤’님이 ‘???’의 종이 되었습니다.]
[플레이어 ‘바겐트’님이 ‘???’의 종이 되었습니다.]
…….
“으, 으아악!”
“씨X 튀어!”
“단검에 찔리지 마라! 찔릴 바에 차라리 자결해! 카신교 놈들처럼 할복이라도 하란 말이다!”
“그게 말처럼 쉽냐, 어어 하는 사이 찔리는…… 어어억!”
설상가상으로 전투가 이어질수록, 아군이 적이 되어 칼을 겨누니 전력 차이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와…….
-주옥 됐네.
-조졌네 이거.
-난 여기까지 보련다. 가망이 없다 이건.
-ㅈㅈ 다들 지금까지 엘라니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참상이 방송으로 보는 이들에게마저 생생하게 전해질 정도.
자연스레 채팅창의 분위기도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던 그때.
[시그니처 특성 ‘스매쉬’를 시전합니다.]
콰가가가-!!
갑작스레 날아온 풍압이 침범하던 침입자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단 척결 – 광신의 심판’이 발동됩니다.]
서걱-!
그리고 이어지는 광전사의 횡베기.
아스트의 스매쉬와 공간 자체를 찢어발긴 듯한 그녀의 광역 베기에 아주 잠깐이지만, 적들과 아군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금세 마수들이 공간을 다시 채웠지만, 그 약간의 틈이면 충분했다.
[엘프 장로,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특성 ‘대마법사’를 발동합니다.]
[광역 마법의 시전 속도가 크게 줄어들며 범위와 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블리자드’를 시전합니다.]
[대마법사 특성으로 인해 시전 속도가 크게 줄어들고, 범위와 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신목(神木)의 덩굴’을 시전합니다.]
“내가 막겠다! 모두 물러나라!!”
그들에겐 그 일말의 틈을 누구보다 알차게 활용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하이 엘프 유일의 대마법사인 그의 손에서 팽창한 마력이, 순식간에 온갖 광역 마법으로 탈바꿈하여 전장에 떨어졌다.
크어어! 끄억!
커헉!
[……쯧.]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던 침입자와 마수들이 거대한 나무 덩굴과 얼음덩이에 깔려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바탄이 혀를 차며 군단을 뒤로 물렸다.
[피하라. 저놈의 마법은 위험하다.]
그러자 마치 그 명령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뒤도 안 돌아보고 물러나는 침입자들.
비록 마수들은 이성이 없기에 이런 구체적인 명령을 듣지 못하고 죽어 나갔지만, 상관없었다.
애당초 놈들은 거대한 덩치로 수성을 뚫기 위한 존재.
이미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으니까.
[다시 돌격하라.]
광역 마법이 끝나자 바탄이 다시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껏 벌린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더니,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광신도와 아스트가 힘을 쓰곤 있으나 고작 둘로는 전체를 막기 버거웠던 것이다.
결국 알테리온이 다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엘프 장로, ‘알테리온 엘란드리엘’ 이 특성 ‘대마법사’를 발동합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신목(神木)의 분노’를 시전합니다.]
다시금 광역 마법이 쏟아졌지만, 바탄은 태연했다.
[비록 놈의 경지가 대마법사에 이르렀다곤 하나, 저렇게 마력을 퍼부어서야 마나가 동날 수밖에 없을 터. 계속해서 돌격하라.]
“크윽…….”
그의 말대로였다.
대마법사의 마나도 결국엔 한계가 있기 마련.
광역 마법을 연달아 시전하는 알테리온의 손이 달달 떨려오고,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식은땀이 온몸을 흠뻑 적신다.
이대로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
[적대 세력의 수장, ‘바탄’이 광역 마법 ‘암흑 전야’를 발동합니다.]
[광범위를 어둠으로 집어삼키며, 어둠 안에 집어 삼켜질 시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습니다.]
[적대 세력의 수장, ‘바탄’이 ‘다크 블룸’를 발동합니다.]
[어둠이 꽃처럼 피어나며 해당 범위를 뒤덮어 큰 피해를 입힙니다.]
[그만 포기하라, 알테리온이여. 그대는 충분히 노력했다.]
심지어 광역 마법을 난무하면서도 방벽을 펼쳐 바탄과 힘겨루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
당장이라도 탈진할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전력 차는 압도적이다. 지금도 놈들의 세력은 커져가고 있어.’
지금은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여기서 자신이 멈추면 애써 유지하던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럼 모든 게 끝난다.
이곳의 주민들도. 이곳에 깃든 추억과 오랜 전통과 자신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도.
더 나아가 위대한 어머니 세계수도.
빠득.
‘……죽을지언정 멈추지 않으리라.’
남은 시간은 대략 30분.
재앙이 강림하는 순간, 더 이상 침입자들도 침공을 이어가지 못한다.
피아식별이 없는 저 끔찍한 재앙을 두고 그랬다간 다 같이 사이 좋게 파멸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만…….
스륵-
하나 애석하게도.
“아…….”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한계는 예정보다 일찍 찾아왔다.
더는 마력이 모이지 않는 것이다.
전장을 사로잡던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사라지자, 공기의 무게부터가 달라졌다.
마수들을 무참히 죽이던 나무 덩굴과 얼음은 사라지고, 온몸을 옥죄는 듯하던 중력 또한 더없이 상쾌해졌다.
[크흐…… 흐하하하! 한계로구나, 알테리온.]
희미해져 가는 시야 너머로 소름 끼치는 웃음을 터트리는 바탄의 모습이 보인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저놈의 숨통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에는 일말의 마나조차 모이지 않아, 알테리온의 의지를 거부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어어어-!
-마법이 끝났다. 모두 돌격하라.
-죽여라. 그리하여 그분께 마을을 바쳐라!
애써 이루던 균형이 허망하리만큼 쉽사리 무너지며, 학살에 가까운 참상이 벌어진 것이다.
“아아…….”
뿌연 시야가 앞을 가로막는다.
무참하게 죽는 주민들을, 동료들을 보지 말라는 듯이.
이 순간, 모두가 직감했다.
-……에휴, 끝났네.
-알테리온 좀 딱하다. 엄청 무리하던 거 같은데.
-와, 아스트랑 광전사가 저렇게 날뛰는데도 수습이 안 되네. 이래서 다굴 앞에 장사 없다는 건가.
-ㄹㅇ 오버 밸런싱 어쩔 건데. 이 기세면 엘라니스 먹고, 바로 라크시아까지 침범하는 거 아니냐?
치열했던 전쟁이 이렇게 끝이 났음을.
그건 현장에 있는 유저들이 누구보다 크게 와닿았고, 대다수의 유저들이 반쯤 포기한 얼굴로 허망하게 서 있었다.
무기마저 떨어트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바벨론의 길드원들도 있었다.
그에 아스트가 분하다는 듯 이를 아득 갈았다.
‘젠장, 쿨타임만 돌았더라면…….’
님프 마을에서 이미 한방을 써버린 게 천추의 한이었다.
이제 10분만 더 버티면 쓸 수 있건만…….
10분은커녕 이대로는 5분도 버티지 못할 기세였다.
[엘프 마을의 일부 지역이 함락되었습니다.]
[중앙이 차지될 시 마을의 소유권을 빼앗깁니다.]
지금 아스트를 비롯한 아군이 있는 곳은 마을의 중앙.
이제 더는 후퇴할 곳도 없다.
이곳이 함락되면 다 끝이었다.
[남은 제한 시간 : 29 : 31 : 34]
‘29분…… 젠장, 이 정도면 많이 버틴 거 아니냐. 카이저 이 새끼야.’
남은 시간을 확인한 아스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시선엔 한 줄기 메시지 창이 더 자리 잡고 있었다.
[카이저 : 재앙 깨어나기 전까진 갈게. 버텨줘.]
‘이러다 재앙 깨어나기도 전에 끝나게 생겼다 인마.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대체.’
2시간 전쯤 카이저가 남긴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보내봐도 답장 하나 없는 것이, 뭘 하는지는 모르나 상당히 바쁜 모양이라 생각하며 넘겼었다.
속이 끓어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메시지라도 하나 보내주고 잠수 탄 게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했다.
뎀로크 시절에는 언질 하나 안 하고 제멋대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내뱉은 말을 어기는 놈은 아니니, 말한 대로 재앙이 깨어나기 전엔 오리라.’ 그리 생각했다.
‘이 상황에 저러고 사라진 거 보면 뭔가 준비할 게 있는 거겠지.’
그건 분명 재앙과의 싸움에 중요한 키포인트가 될 터.
그렇기에 놈의 말대로 버텨줄 심산이었다.
[경고! 마을 구역의 대부분을 빼앗겼습니다.]
[적대 세력의 중앙에 가까워집니다.]
‘더는 못 버텨. 뭘 준비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젠 진짜 와야 한다 이 새끼야.’
하지만 이젠 한계였다.
그어어-!
“아오, 좀 떨어져라!”
심연의 마수의 거대한 몽둥이와 맞대던 철퇴를 거칠게 뿌리친 아스트가 메신저를 켰다.
카이저에게 상황을 알리며 재촉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번쩍-
돌연 하늘이 요동치며 먹구름이 피어오르더니,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그것은 번개이자, 용이었다.
“저, 저길 봐!”
“저건…… 뇌룡?”
“잠시만, 뇌룡이면…… 설마!?”
이제는 모두가 아는 스킬.
뇌룡강림이 발동될 때 나타나는 이펙트 효과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뇌룡강림을 쓰며 나타날 사람이라곤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콰아앙-!!
먹구름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던 뇌룡이 돌연 거칠게 포효하며 지상으로 내리꽂히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타오르는 듯한 도복과, 검은 가면.
파지직-
그에 상반되는 푸른 전류를 뒤집어쓴 남자를 보며 아스트가 허탈한 얼굴로 질책하듯 중얼거렸다.
“이 새끼야, 늦었잖냐.”
-어, 아재다!
-리자리자!
-음!
카이저.
그가 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전장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마스코트가 된 가디언들을 이끈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