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7화.
“카이저다!”
처음에는 작은 외침이었다.
워낙 화려하게 등장한 만큼, 모두의 이목이 쏠린 탓에 한 유저가 저도 모르게 소리친 것에 불과한 외침.
하나 그 외침이 함성으로 바뀌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카이저! 카이저가 왔다!!”
“와아아아아!!”
“홀리 쉿!!”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카이저의 이름을 외쳤다.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을 때 나타난 카이저라는 존재는, 유저들에게 있어 동굴에 드리운 한 줄기 빛과 같았던 것이다.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수십이었던 함성이 수백, 수천이 되며 전장의 모두가 희망을 품었다.
-미친, 카이저다!
-와씨,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네?
-아아, 카멘…….
-아니 어디 있다가 이제 오는 거야?
-오이오이,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고.
-이거 진짜임? CG 아니지?
-와, 카이저 하나 참여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든든하냐.
-아니, 근데 카이저 하나 나타났다고 뭐가 달라지냐? 지금 개판이 됐는데.
-ㄹㅇ 이미 끝났음. 헛된 희망 품지 마셈.
그건 채팅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몇몇 채팅의 말처럼 카이저 한 명 나타났다고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일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라이하스 나타나는 것보다는 카이저 나타나는 게 더 든든하지 않냐?
-그…… 건 그렇긴 하네.
-ㄹㅇ 뭔가 막 기대되는 그런 게 있음. 결국 마지막엔 카이저 바짓가랑이 붙잡으면 카이저가 캐리해줬었자너.
-아 이번에도 해줘 해줘.
하지만 그가 여태 걸어온 길.
모두가 불가능하다 외쳤던 길을 완주해온 그의 업적이, 이번에도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 있는 이들만큼, 그것을 가장 크게 느낄 수는 없을 터.
와아아아아!!
-와, 다들 주인 이름 외치는데? 주인이 이 정도였나?
-리자리자!
-음! 무지렁이들이 비로소 주군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눈을 얻게 되었군. 옳게 되고 있는 일일세.
마치 유일한 희망인 양.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는 그들을 보며 가디언들이 소곤거렸다.
당황한 건 도현도 매한가지였다.
사정상 마지막에 등장한 적이야 많지만, 이토록 격렬한 반응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나 그것도 잠시.
곧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한 도현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뭔가 오늘따라 반응이 좀 다르다 싶더라니…… 상황이 많이 안 좋아.’
거짓말이 아니라, 만약 1분만 더 늦게 왔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마수들이 사방을 둘러싼 채 엘프와 유저들을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중앙이 점령당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
“아아, 나의 신이시여…… 면목이 없사옵니다. 기사께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카멘…….”
-아닐세. 자네들은 충분히 할 만큼 했네.
“그래. 고생했어. 여러분들도요.”
“아아…… 어쩜 이리도 자애로울 수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각을 유지하며 한쪽 무릎을 굽히는 광전사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신도들.
찰리의 말마따나 그들은 한계 이상으로 노력했다.
아마 그들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올 때까지 버티긴커녕 진작 게임이 끝났을 것이다.
그때 뒤편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난 안 보이냐? 이놈이 버텨달래서 죽어라 버텼더니 아는 체도 안 하네.”
“아, 아재.”
녹초가 된 몰골의 아스트였다.
지친 와중에도 가디언들도 인사하는 걸 안 한다고 연신 투덜거리는 모습에 피식 웃은 도현이 주먹을 내밀었다.
낯간지러운 말은 못 하겠고, 고생했다는 의미의 제스처였다.
“하여튼 이놈들은 짜기로 했나. 불리하다 싶으면 주먹부터 내밀고 보지. 어휴.”
……물론 아재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더 따질 생각은 없는지, 아재가 금방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어떤 거 같냐.”
“……솔직히 많이 안 좋긴 하네. 버티라고 했지, 중앙 빼고 다 주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야 인마. 그게 마음처럼 쉽냐. 꾸꾸 녀석도 저기서 저러고 있는 판에. 이렇게 버틴 것도 기적이야. 알테리온 없었으면 다 죽었을 거다.”
“알테리온이면…… 장로?”
아스트는 대답 대신 휙 옆쪽을 턱짓했다.
턱짓한 곳을 보니, 마라톤을 완주하다 실패한 사람처럼 기진맥진하면서도 분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엘프 장로가 보였다.
눈이 마주친 그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게, 일어나고 싶어도 말을 듣지 않는 모양.
반면에…….
[저놈은 또 무엇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저자가 마석을 부순 자입니다. 쓸모없는 버러지들이 처리하겠다 호언장담하다 역으로 당했던 그놈이죠.
[쯧. 그래 봐야 벌레 하나가 늘었을 뿐이건만, 참으로 쓸데없는 희망들을 가지는구나.]
그어어- 그어!
저쪽은 멀쩡하다 못해 쌩쌩해 보였다.
마수들이나 침입자들의 수가 많이 줄었긴 하나 지금도 거의 2천이 넘어갔으며, 수장과 2인자가 건재했다.
척.
-이거 잘됐군요. 이 여인은 저놈의 동료. 동료의 손에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은 유흥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정적으로 그들의 앞에 선 은백발의 치명적인 여인.
여제, 그녀가 붉은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아아-
짙은 살기를 뿌리며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진다.
동료로서 함께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왜 적들이 눈만 마주쳐도 도망치기 일쑤인가 싶었는데 이해가 되었다. 위험한 맹수를 마주한 것처럼 온몸의 경고 센서가 울리고 있었으니까.
낯설지만 그렇다고 처음 느끼는 느낌은 아니었다.
“옛날 생각나네. 처음 만날 때 저년이 저랬었는데.”
“지금 과거 회상할 때냐? 어떻게 방법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기다려봐. 곧 시간 되어가니까.”
“시간? 그게 뭔…… 야. 설마 재앙 깨어나는 시간 말하는 건 아니겠…….”
하나 감상평은 더 이어갈 수 없었다.
파아아-!
거센 반동과 함께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적대 세력의 수장, ‘바탄’이 광역 마법 ‘다크 생츄리얼’을 시전합니다.]
[주변 일대를 뒤덮는 어둠의 공간을 펼쳐 시전자가 발동하는 어둠 마법의 위력을 상승시킵니다.]
[적대 세력의 2인자, ‘???’가 ‘약화의 꽃’을 시전합니다.]
[어둠 마법이 시전된 곳에 약화의 꽃을 만들어냅니다.][
[약화의 꽃에 노출된 대상은 상태 이상 ‘약화’에 빠지게 되어 모든 능력치가 15% 감소합니다.]
바탄과 2인자의 합공이었다.
마치 커튼이 쳐지듯, 세상이 둥근 어둠으로 물드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헛된 희망을 품은 자들의 영웅이 된 사도여. 참으로 우습구나.]
바탄의 가소롭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녕 네놈 혼자 감당할 수 있겠느냐. 내 보기엔…… 네놈 동료 하나조차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
“…….”
그의 명령을 수행하듯 앞을 가로막은 여제와 2인자.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유저들과 침입자, 그리고 마수들.
인정할 건 해야 한다.
아무리 도현이 강해졌다곤 하나, 이런 불리한 상황 속 저들을 뚫고 바탄을 죽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씨익.
“뭐래. 누가 혼자 왔대?”
[……뭐?]
……혼자라면 말이다.
-맞아, 우리도 있다고!
-리자!
-……주군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지 않나.
[……설마 네놈 옆에 있는 가디언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그 순간이었다.
둥! 두웅-!
[……?]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거대한 북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웅장한 나팔 소리와 쇠로 된 실끼리 맞닿아 내는 특이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입구 쪽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범위를 넓히더니 이내 주변 전체에서 들려왔다.
“뭐, 뭐야? 갑자기 웬 연주 소리?”
“그러게. 그런데 뭔가…… 꼭 행진곡 같지 않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설마 또 뭐 터지는 거야?”
그에 유저들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기껏 카이저가 나타나서 기뻐했는데, 또 감당 못 할 사건이 터지나 싶었던 것이다.
하나 정작 얼굴이 굳은 건 도현이 아니었다.
[이 소리는…… 설마?]
바탄, 그가 드물게도 깜짝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이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그건 몇몇 나이가 든 엘프들도 마찬가지인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응이 큰 건 알테리온이었다.
“이 연주는 분명…… 맙소사. 정말 그 녀석이 살아있는 게 맞았구나.”
당황함 뒤로 어딘가 아련한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그가 애써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곤 저 너머, 북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둥- 두웅!
벌써 백 년도 더 전에 들은 소리.
하나 백 년이란 세월도 이 소리를 기억에서 지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때는 친우와 함께 같은 북소리를 내며 걸었으니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질수록 커져갔고,
“어어!”
“미친…… 저게 다 뭐야!?”
“와씨, 진짜야?”
“대박!”
이윽고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이들의 형체가 보일 때쯤 되자, 유저들이 기함을 토해냈다.
“아아, 맙소사…….”
“세계수시여. 감사합니다. 저들이 다시 바깥으로 나왔군요.”
“아직 살아있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군. 내가 죽기 전에 이 광경을 다시 보고 될 줄이야.”
먼 과거를 기억하는 하이 엘프들 또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몇 이들은 눈물마저 훔치고 있을 정도였다.
그 장대한 광경을 보며 아스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준비한 게 이거냐? 대체 무슨 꼼수를 부린 거야?”
“저들의 우두머리랑 인연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둘 사이의 오해를 좀 풀어줬거든.”
“오해?”
“그런 게 있어.”
도현은 구태여 답하지 않고 피식 웃어 보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곧 아스트도 상황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알테리온.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해지듯 귓가에 박힌다.
남자가 손짓하자 바탄이 펼친 결계가 허물어지며, 기존의 마을 풍경이 펼쳐졌다.
다섯 왕좌를 차지한 종족이 펼친 게 아닌 한, 어떠한 결계든 무조건 한 번은 부술 수 있는 능력.
“아…….”
-오랜만에 보는구나. 한데…… 꼴이 말이 아니군 그래.
오직 한 종족에게만 주어진 고유 능력.
씨익 웃으며 알테리온과 눈을 마주한 검은 피부의 남자가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그리곤 역수로 쥐더니, 알테리온에게 손잡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도우러 왔다. 친우여.
다크 엘프가 낳은 가장 찬란한 영웅이자, 몰락해버린 비운의 영웅.
동시에 과거 엘프가 가장 찬란했던 시절 알테리온과 함께 전성기를 누리던 자.
“……아스트라.”
아스트라 라벤시아.
그가 숨어 지내던 다크 엘프 군단을 이끌고, 다시금 세상 밖으로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크 엘프들만이 아니었다.
우어어어어-!
카아아!!
마을을 포위한 수천을 넘어 일만이 넘어가는 압도적인 수의 군단은 다크 엘프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숲의 주민들?”
-내가 데리고 왔다. 베헤모스를 막을 유일한 기회라고 하니 따라와 주더군.
3대 종족인 엘프와 님프 요정을 제외한, 세간의 눈을 피해 숲에 숨어 살고있는 여러 이종족들이었다.
비록 그들 개개인은 3대 종족에 비해 약할지언정, 이렇게 함께 뭉치게 된 지금.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알테리온. 자네와는 풀어야 할 게 많지. 비록 오해는 풀렸으나,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거든. 아마 자네도 그러겠지.
“……그래. 알고 있다.”
알테리온이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답하던 때였다.
돌연 아스트라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
-모든 걸 다 잊고. 잠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나. 무서울 것 없던 그 시절로 말이야.
딱딱하기 그지없으나, 어딘가 미묘하게 짓궂은 표정.
과거 젊은 시절 장난을 험악하게 친다며 ‘그녀’가 자주 핀잔하던 그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서 있을 거냐. 어서 잡지 않고.
피식 웃은 알테리온이, 아스트라가 줄곧 내밀던 검을 맞잡았다.
와아아아아-!!!
우렁찬 함성이 뇌리처럼 울려 퍼졌다.
다크 엘프와 엘프.
본디 한 종족이었으나 분열되었던 그들이, 백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섯 왕좌의 자리마저 위협하던 그때의 종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