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8화.
위대한 엘프.
과거 엘프는 그렇게 불리었다.
공성전, 야전, 사가전 어느 무대든 전쟁이 열리는 순간, 엘라니스에서 엘프를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약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지나다니는 평범한 주민조차 소드 익스퍼트에 달한다는 근접전의 대가 다크 엘프.
태생적으로 궁술에 특화된 엘프.
그들이 한데 뭉치는 순간, 결코 뚫을 수가 없는 철옹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서걱- 푹!
퍼어엉! 콰앙!
괜히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쟁취한 종족을 꼽을 때, 늘 엘프가 거론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유저들로선 솔직히 그리 체감되는 말은 아니었다.
엘프들이 강하고 잘난 건 알겠는데 솔직히 외적으로 더 눈에 띌 뿐.
간혹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보았을 때, 그 정도로 대단한 종족인가 싶은 게 사실인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죽여라!”
“흐하하! 오랜만에 날뛰니 좋구만! 이게 바깥세상의 맛인가. 어, 자네 오랜만이군. 아직도 정정한데 그래.”
“그러는 자네 칼솜씨도 여전하구만.”
하지만 지금.
엘프 마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유저들은 역사가 맞았음을 인정했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와씨…….”
“미쳤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왜 이렇게 세냐?”
“불도저가 따로 없네.”
방금까지 그토록 애를 먹게 하던 심연의 마수들과 침입자들이, 종이 쪼가리처럼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으니까.
괜히 근접전의 대가라는 명칭이 붙은 게 아닌 듯.
다크 엘프의 검술은 제국 기사들의 그것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이 나는 건 선두에서 다크 엘프 군단을 이끌고 있는 남자, 아스트라였다.
그어어어-
타앗!
가히 백에 달하는 마수와 침입자들이 달려들었음에도, 아스트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도약하며 검을 휘둘렀다.
[다크 엘프의 찬란한 영웅, ‘아스트라 라벤시아’가 광휘의 검을 발현합니다.]
[광휘의 빛을 담은 오러를 발합니다.]
[영웅이 걸어온 길과 세월에 따라 빛의 강도와 위력이 변화합니다.]
[찬란한 영웅의 길을 걸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
그러자 눈부신 빛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뒤덮더니, 세상을 갈라낼 듯한 검기가 반월을 그리며 날아갔다.
서거—억!!
그어어!! 커헉!
일격.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앞을 가로막던 무수히 많은 적군이 쓸려나갔다. 하지만 아스트라는 멈추지 않고 그들의 중심에 착지하며 검을 내리찍었다.
[광휘의 파장을 시전합니다.]
[광휘의 검으로 처치한 적의 수에 비례하는 위력과 크기의 충격파를 터트립니다.]
콰아아앙!!
5M가 넘어가는 거대한 마수들이 가을낙엽처럼 휘날린다.
순식간에 길이 트이자, 아스트라가 찬란한 빛을 담은 은빛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길을 뚫었다, 모두 나를 따라 적을 학살하라.”
“예스 마이 로드!”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아스트라 님이 길을 만드셨다! 모두 죽여라!!”
그러자 그 뒤를 이어 밀고 들어온 다크 엘프 군단이, 마수들과 침입자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며 밀고 나갔다.
유저들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감당하기 버겁던 적들이, 그들 앞에선 그리 나약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엘프 장로,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특성 ‘대마법사’를 발동합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신목(神木)의 덩굴’을 시전합니다.]
[대마법사 특성으로 인해 시전 속도가 크게 줄어들고, 범위와 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다크 엘프들이 밀고 들어가기 무섭게, 거대한 나무 덩굴이 앞으로 전진하며 적들을 옭아매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 뿜어진 초록빛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으며 기묘한 힘을 선사해주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신목(神木)의 가호’을 시전합니다.]
[자연친화력이 존재하는 자들에게 능력치와 체력 재생력을 증폭시키는 가호를 내립니다.]
[대마법사 특성으로 인해 버프의 효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이건…… 장로님의 마법?”
“알테리온 님이다!”
“우리도 질 수 없지. 온 힘을 다해 저들을 지원한다!”
“와아아아!”
그걸 시작으로 미친 듯이 화살을 쏟아붓는 엘프들.
다른 걸 신경 쓸 필요 없이, 시즈탱크처럼 고정한 채 화살을 쏘아내는 그들의 화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커허억!”
“끄어어어-!”
“크헉!”
접근하면 칼에 목이 베이고, 물러나면 화살에 심장이 꿰뚫린다.
작정하고 도망치려 해도 나무 덩굴이 퇴로를 막거나 몸을 옭아매 버리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하물며 엘프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키기긱!
-우어우어! 우어!
이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숲의 이종족들.
언덕에서부터 우르르 내려와 전장에 뛰어든 그들이, 사방에서 적군을 처치하며 중앙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 하나하나는 마수보다 약했지만, 그 수가 일만이 넘어가니 적군들로서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심지어 다크 엘프와 엘프들을 상대하면서 막아내기란 더더욱.
-와아아아아!!
그런 그들의 화려한 등장에 유저들은 언제 포기했냐는 듯 함성을 내질렀다.
“와…….”
“다크 엘프라고? 그런 게 진짜 있었어?”
“미쳤다…… 이걸 직관하다니.”
“진짜 무슨 판타지 속 전쟁 참여하는 기분인데? 스케일 무엇.”
“크으, 믿고 있었다구. 카이저.”
“몬가가…… 몬가가 일어나려 하고 있어.”
난생처음 겪는 진정한 이종족들의 전쟁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묘한 뽕이 차오른 것이다.
하물며 절망 그 자체였던 상황에 구원처럼 등장한 지금.
달아오른 분위기를 한껏 누리지 않을 이는 없었다.
“아아…… 이런 순간을 맞이하다니.”
“모두 자네들이 잘 버텨준 덕분일세. 사도들이여.”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네.”
“크으, 물론이죠. 저희 이길 수 있습니다.”
“끝나면 맥주나 한잔 사주시죠.”
“물론일세. 그러려면 꼭 전쟁이 승리한 순간까지 살아있어야겠구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이종족이고, 유저고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마음을 품은 전우이자 동지였다.
종족의 틀이나 편견 없이 진심으로 얼싸안으며 함성을 내지르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방송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까지 인상 깊게 전달되었고, 채팅도 한 바탕 난리가 났다.
-ㅁㅊㄷㅁㅊㄷㅁㅊㄷ
-와씨, 지렸다. 실화냐?
-ㄹㅇ 가슴이 웅장해진다.
-오이오이, 다크 엘프 뭐냐고! 세계관 커지는 것보소.
-와, 카이저가 이걸?
-다크 엘프가 진짜 있었네. 전에 허름한 상점 주인 호감작하다가 얼핏 들었었는데 이걸 진짜 보게 될 줄이야 ㄷㄷ
-이종족들 뭐임? 엘라니스에 사는 종족이 저렇게 많았음?
-다들 숲 깊숙한 곳에 숨어 지내잖아. 사도들한테 모습 안 보이려 한다는데 그래서 못 본 듯?
-외형이 다 가지각색이네. 아예 짐승형 종족도 있는데? 순록인가? 놀이랑 트롤같이 생긴 애들도 있네.
-ㄹㅇ상상도 못한 정체네 ㅋㅋㅋㅋㅋ
-바탄인지 뭔지 수장 새끼 표정 썩은 것보소 ㅋㅋㅋㅋㅋ 그동안 온갖 여유 다 부리더니만 쌤통이다.
-이 정도면 진짜 해볼 만한데?
-ㅈㄹ 해볼 만한 게 아님. Xㄴ 할만한 거지
-ㅇㅈ합니다.
한편 그들의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반면.
들끓는 기름처럼 빠꾸 없던 침입자들의 사기는 소화기라도 뿌린 듯 확 가라앉아있었다.
탱크처럼 밀어붙이던 마수들은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끼고 으르렁거리기 바빴으며, 침입자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크아아아!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포위하고 있었는데, 역으로 사방을 둘러싼 일만 대군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심지어 바로 앞에는 다크 엘프들과 엘프 군단, 그리고 사도들이 있다.
‘이런…….’
‘…….’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워야만 한다.
-……바탄 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닥쳐라. 알고 있으니.]
-……네. 죄송합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바탄이었다.
뒤에는 숲의 종족들이 밀고 들어오고 있고, 앞에는 엘프들이 자신들을 밀어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앞뒤로 포위당해 짓밟힐 것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건 아스트라였다.
수하들 중 저놈 하나를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알테리온을 막아낸 것처럼 놈을 막아내자니, 저 둘이 서로를 봐주느라 그조차 쉽지 않았다.
빠득.
‘……이런 빌어먹을 리치가! 처리하라 했더니 영웅을 저런 상태로 살려두고 있었던 건가? 이 쓰레기가! 쓰레기면 쓰레기답게 명령이나 따를 것이지, 감히 몰래 욕심을 부려?’
당장이라도 그 해골바가지를 죽이고 싶었지만, 이미 놈이 죽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하다 못해 한스러웠다.
그게 여실 없이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까.
눈이 마주친 도현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야, 얼굴이 썩었네, 아주. 누구 하나 죽이겠다?”
[……이 씹어먹을 놈이. 감히 이 바탄을 놀리려 들어?]
“놀리려 드는 게 아니라, 놀리는 중인데?”
……빠득.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며 비죽거리는 도현의 모습에 빠드득, 이를 갈던 바탄이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곤 말을 이었다.
[……그래, 인정하마. 좋은 수를 두었어. 어쩌면 이 전쟁에서 너희가 승리할 수 있을 유일한 수를.]
“그래, 칭찬 고맙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음?”
그런 바탄의 눈빛이 일순 살의로 번뜩였다.
[확실하게 나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는 길. 그게 내 앞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지켜보던 아스트가 다급히 소리쳤다.
“피해!”
하나 목소리가 채 입 밖으로 꺼내졌을 땐, 이미 바탄의 신형이 사라진 후였다.
마치 그림자에 녹아 들어가듯 희미해진 형체에 멈칫한 순간, 그의 손이 거대한 낫이 되어 도현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적대 세력의 수장, ‘바탄’이 ‘근원을 베는 낫’을 발동합니다.]
[표적이 되었습니다.]
“아아, 신이시여!”
“막아라!”
기습적인 공격임에도 척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에, 카신교 신도들이 다급히 무기를 쥐고 달려들었다.
마침 그들의 위치가 둘의 가운데 옆쪽에 위치하니 중간에 끼어들어 막아낼 심산이었다.
그 순간 아스트와 광신도가 동시에 소리쳤다.
“안 돼! 막을 게 아니라 밀쳐! 저 기술은 절대 못 막는다고!”
“아니, 밀쳐내기엔 늦었습니다, 위대한 카신 님을 대신하여 죽으세요!”
“……?”
상반된 명령에 신도들은 잠시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왜 저런 반응인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휙-
그런 와중에도 광신도의 명령을 따라 절로 몸을 가져다 대는 것이, 아주 미친 신앙심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바탄이 이런 허술한 끼어들기에 당할 리가 없었다.
휘릭- 쇄애애액!!
“어어?”
번개처럼 궤도를 틀며 크게 회전하여 새로운 각을 만든 것이다.
이번엔 아예 사각에서 휘두르고 있기에, 도현의 입장에선 낫이 어디서 휘둘러지는지조차 보이지 않을 터.
“아아, 이런……!”
“젠장!”
그에 광신도와 아스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이토록이나 놀란 이유.
그건 바탄이 저 낫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근원을 베는 낫.
그 이름처럼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어둠의 낫.
바탄의 최강의 기술이자, 마법사임에도 그가 근접전에서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만들어준 기술.
더불어 수많은 유저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기술이었다.
“막으려 하면 당한다, 피해!”
[크흐흐…… 늦었다. 이놈은 이미 낫의 영역에 들어왔다. 이곳에선 어떠한 도주기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의 동료도 그리 죽었지.]
“…….”
……검성마저도.
습관적으로 막아내려다 급히 검로를 틀긴 했으나, 결국 목이 달아난 것이다.
[부하들이 당하기 전에, 네놈을 뚫고 중앙을 차지한다.]
부하들은 하염없이 밀려나고 있지만, 자신은 중앙까진 앞으로 겨우 몇 발짝 남았다.
부하들이 모두 당하기 전에 이놈을 죽이고, 마을을 차지한다.
그리하면 저들은 모두 마을의 소유권을 잃고, 동시에 라그 베헤모스가 강림하게 되고 자신들은 승리할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오만했던 것이 네놈의 패착이다. 죽어라!]
쇄애애액-!!
날카롭게 공간을 베며 떨어지는 낫의 파쇄음을 듣는 바탄의 얼굴이 희열로 가득 차올랐다.
이 공격으로 놈이 죽을 것임을 확신한 것이다.
‘끝이…….’
까앙!
‘……?’
……까앙?
‘왜 이런 소리가?’
순간 저도 모르게 되물었지만, 낫을 휘둘렀는데 까앙 소리가 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에 다급히 고개를 들자 보였다.
“하, 이 새끼 낫 휘두르는 와중에 계속 한눈팔고 있네?”
얼음꽃이 피어난 새하얀 검을 옆으로 가볍게 드는 것만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도현의 모습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순간 꿈을 꾸는가 싶었다.
[이게 무슨……?]
벙찐 바탄이 저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로 내뱉자, 도현이 쯧 혀를 찼다.
“하여튼 가리온이나 이놈이나 대가리 좀 찬 보스 놈들은 왜 꼭 지 필살기는 무조건 다 통할 거라 생각하지?”
우드득, 주먹을 가볍게 푼 도현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막힌 주제 한눈팔았으면 맞아야지. 괘씸하니까 좀 세게 맞자. 안 그래도 얼마나 세졌는지 궁금했는데 잘됐네.”
[……뭐라?]
냅다 멍청한 표정이 되어있는 바탄을 향해 천변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정수리가 찍힌 바탄이 땅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