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9화.
바탄은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왜 바닥이 보이지?
심지어 그냥 보이는 것도 아니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한없이 가까이 보인다.
지면에 돌아다니는 작은 벌레가 이토록 크게 보일 수가 있었던가.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에 멍해진 것도 잠시.
‘땅에…… 처박혔다? 이 내가?’
곧 상황을 파악한 바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앞을 보니, 여유롭게 턱을 까딱이고 있는 도현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니 그가 비죽 웃으며 비아냥거린다.
“이야, 1초식 담아서 찍은 건데 생각보다 단단하네? 그새 쉴드라도 펼쳤나 봐?”
[…….]
사실이었다.
정수리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지자마자 다급히 쉴드를 펼쳐냈으니까.
그럼에도 정수리가 얼얼하다 못해 골이 흔들린다.
만약 쉴드를 펼치지 못했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를 일.
최소한 상태 이상 ‘기절’에 걸렸을 확률이 높았다.
딱히 강한 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도 이런 위력이라니?
‘정보가 잘못되었나?’
분명 지금에 한참 못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벌레 같은 놈들이 도움도 안 되어놓고 정보마저 잘못 전달했나?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근원을 베는 낫이 막혔다.
‘말도 안 되는.’
피하는 것도 아니고, 막다니?
근원 그 자체를 베는 낫을 대체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인가?
이는 그 대영웅 르시아조차 불가능했던 일이다.
비록 방심하다 한 방 먹었긴 하나, 단지 그뿐. 저놈이 그녀보다 강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면,
‘대체 어떻…….’
“어떻게 막았냐. 뭐 그런 표정인데.”
[……!]
“하여튼 이 새끼들은 꼭 지들 필살기는 천하무적 가불기인 줄 알지. 그랬으면 네가 여기 짱 먹었겠지, 치사하게 기습이나 하고 있겠냐.”
[……방금 것은 근원을 베는 낫이다. 르시아 그 여자조차 이 낫을 휘두를 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 했지. 방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않는 기술이란 소리다.]
단연 바탄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광경을 직관한 아스트와 광전사 그리고 유저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반쯤 넋이 나가 있었으니까.
신도들과 광전사의 경운 역시 위대한 카신이라며 기도를 올리고 있고.
아스트의 경우 머리 위로 ‘아니, 저걸 어떻게 막았지?’라는 말풍선이 떠 있는 얼굴이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런 그들과 바탄을 번갈아 보던 도현이 툭 내뱉었다.
“그런데 막았죠?”
비죽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화가 치솟지만,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막은 게 사실이니까.
이미 막아낸 놈한테 이건 방어가 불가능한 기술이다 설명해봐야 퍽이나 신빙성이 있겠는가.
그저 바탄만 억울할 따름이었다.
하나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곤 있지만, 사실 도현도 내심 놀란 상태였다.
[패링이 불가한 기술입니다.]
[악연을 맺은 대상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침입자들과 카이저 님은 악연 관계입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악연의 장’이 펼쳐집니다.]
[거역의 서(書)가 적합한 힘을 탐색하기 위해 시전자와 대상에 얽힌 서사를 읽고 있습니다.]
[반항의 연(緣)이 발동됩니다.]
[운명에 강하게 저항하여 상대에게 죽을 수도 있을 운명 중 하나를 거스를 힘이 주어집니다.]
[‘원령비호(源靈庇護)’를 시전합니다.]
[생명체의 근원이 되는 혼을 보호하는 결계를 형성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2회 보호합니다.]
[‘원령비호(源靈庇護)’가 ‘근원을 베는 낫’을 방어했습니다.]
‘이게 진짜로 막아지네.’
시그니처 특성, 거역의 서(書).
대륙 퀘스트를 일으킨 장본인인 바탄은 놈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자 르시아와 관련된 퀘스트를 진행하는 도현에게 있어 더없는 악연 그 자체였고.
그 결과 훌륭하게 놈을 카운터 칠 능력을 안겨주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가뿐하게 막아내다니.
‘한 번 악연 관계가 맺어지기만 하면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네.’
일전에 싸웠던 아시온에게도 거역의 서가 발동되었다면, 그리 까다롭지 않았을 터.
어쩌면 손쉽게 찍어눌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능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도현이 생각해온 것보다도 더욱 컸다.
하지만 거역의 서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2번. 아니, 이번에 막았으니 한 번.’
앞으로 한 번 더 막고 나면, 그 뒤로는 저걸 막을 방법이 없다.
근원을 베는 낫이라는 이름처럼, 저건 방어 자체가 불가능한 기술.
패링조차 불가한 기술이었으니까.
‘검성 녀석이 왜 당했나 했더니…… 이런 개사기 스킬을 기습으로 꽂아 넣으면 당할 수밖에 없지.’
오히려 그 와중에도 팔 하나를 가져간 게 대단할 따름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것일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놈을 보며 도현이 우득 몸을 풀었다. 보아하니 놈도 저 기술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
어느 정도 쿨타임이 있을 테니, 그 안에 끝내면 그만이었다.
이전이었다면 쫓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과거의 자신과의 싸움에서 얻은 게 너무도 많았으니까.
[역천기(逆天期), 제1초식 시(始)를 시전합니다.]
씨익 웃은 도현이 성큼 놈에게 다가갔다.
저벅.
지면에 닿은 발에서부터 태산의 기운이 전해져온다.
묵직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다가오는 도현을 보며 바탄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저벅. 저벅.
한 발짝, 그리고 두 발짝.
놈이 다가올수록, 바탄은 멀어지는 것을 반복하길 몇 차례.
턱.
-……바탄 님?
-저희들의 수장이시여…….
등 뒤로 무언가 닿아 막힌 바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바라보고 있는 2인자와 수하들이 보인다.
어느새 중앙에서부터 수십 미터나 밀려난 상태였던 것이다.
고작 놈이 다가온다는 이유 하나로.
‘……이 내가. 지레 겁을 먹었다고? 겨우 저깟 사도 하나한테?’
빠득.
싸워서 밀린 것도 아니고, 호랑이를 만난 개X끼마냥 뒷걸음질 쳤다는 사실에 바탄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자존심이 상해도 너무 상했다. 더불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왜?’
놈이 근원을 베는 낫을 막은 것에 거리를 벌리려던 것은 맞다.
유일한 근접기이자, 필살기에 가까운 공격이 통하지 않는 이상 마법사인 자신은 거리를 벌려야 하는 게 정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이런 모양 빠지는 모습을 보일 이유는 되지 않았다.
자신이 공격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뒷걸음질 친 이유.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저놈. 처음부터 저런 기운을 품고 있었던가?’
기세.
놈에게서 느껴지는 저 알 수 없는 기세에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그의 안에 축적된 본능이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이질적이면서도 흉포한…….
과연 저게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종류가 맞는지 의심되는 이질적인 기운.
그러면서도 묘하게도 익숙한 이 느낌은 마치…….
‘……권왕?’
권왕(拳王), 드란 그라디트.
자신이 만난 최강의 인간이자, 자신에게 무력감을 안겨준 유일한 인간.
인간상성인 것을 떠나 무력 자체로도 절망감을 안겨준 남자.
과거 엘라니스를 침범한 것도, 그가 없는 틈을 노려서 습격했을 만큼 주의하고 있는 인물.
‘말도 안 된다. 어째서 저놈에게서 그 남자가 떠오르는 것이냐!’
부정해보지만, 그를 누구보다 두려워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놈에게서 그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을.
본능에 새겨진 기억이 그를 벼랑 끝까지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나 그것도 잠시.
‘……아니, 다르다. 비슷하지만 달라.’
애써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자 보였다.
분명 비슷한 기운이지만, 그 남자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기운이라는 것이.
놈은 이제 막 개화한 어린 나비와도 같았다.
하나 그건 반대로 말하면 겨우 잠재력만으로 이런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
그렇기에 더없이 위험했다.
‘……권왕 이상의 잠재력이라는 건가.’
바탄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차갑게 내려앉은 눈동자에 더 이상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없었다.
그저 어떠한 결의만이 느껴질 뿐.
‘저놈은 위험하다.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지금 죽여야만 해.’
하물며 상황도 좋지 못하다.
서걱- 푹!
빠악!
“아오, 좀 비켜라. 아니다, 됐다. 그냥 너를 묶어두는 게 맞겠다. 저놈이 또 어디서 뭘 배워왔는진 모르지만, 저 개사기 스킬을 막는 거 보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저는 처음부터 나의 신께서 해내리라 믿고 있었나이다.”
“뭐래, 너 발 동동 구르던 거 다 봤는데.”
“……목격자가 없다면 완벽 범…….”
“어어, 얌마. 대검 내 쪽으로 틀려는 거 다 봤다. 카이저한테 다 말한다?”
“……쯧.”
아스트와 광전사가 티격거리면서 가장 큰 전력 중 하나인 여제를 막아내고 있었으며,
그어어어-
커허억!
“죽여라!!!”
“밀어붙여!!”
“우오오오!!!”
종이 된 사도들과 심연의 마수들.
그 외에 자신의 수하들은 일만이 넘는 대군에 밀려 쓰러지고 있다.
자신이 놈을 뚫지 못하면 패배한다.
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가릴 상황이 아닌 것이다.
우뚝 멈춰 선 바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해방해라.]
-그것이라면…… 설마. 안 됩니다. 그것을 해방하면 이곳의 모두가 죽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바탄 님께서도 영향에서 무사하진 못하실…….
[닥치고 해방하란 말이다!]
-…….
바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망설이던 2인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길.
그리곤 냅다 상의를 풀어헤치는 그녀.
가뜩이나 반쯤 헐벗은 상태였던지라 하얀 속살이 여실히 드러났다.
가릴 곳만 가리고 나머진 노출된 수준. 하지만 이 순간, 그녀를 보며 이상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 도현마저도.
[적대 세력의 2인자, ‘???’가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광란의 밤’을 발동합니다.]
[일대에 있는 모든 대상을 뒤덮을 광범위의 연기를 터트려, 노출된 대상을 ‘광란’ 상태로 만듭니다.]
[광란 상태가 된 대상은 이지를 상실한 채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상태가 됩니다.]
[연기는 적아를 가리지 않으며 상태 이상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안에 숨겨진 핵을 파괴하기 전까진 결코 광란을 멈출 수 없습니다.]
[10초 이내에 전장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충격적인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메시지는 이곳의 모든 유저들에게 떠올랐고,
“미친!”
“뭐, 뭐야 갑자기.”
“광란? 범위가 맵 전체라고?”
“아니, 여기서 저런 게 터지면…….”
“주옥 됐다.”
곧이어 경악에 찬 유저들의 육두문자들이 터져 나왔다.
기껏 승리에 가까워진다 싶었더니, 졸지에 다 죽게 생긴 판에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아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X!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신이시여. 저희를 굽어살펴주소서.”
“너희 신, 저기서 지켜보고 있는데 뭘 여기서 기도를 하고 있어? 아오! 꾸꾸 이 년은 이 와중에도 덤벼들고 있네.”
철퇴로 애써 여제의 공격을 막은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답답한 심정을 토해냈다.
[크흐흐…… 크하하! 모든 게 끝이다. 다크 엘프도, 엘프도. 네놈과 동료들도. 서로를 죽이다 끝이 나는 것이다.]
“허, 기껏 한다는 게 자폭이냐? 폼이란 폼은 다 잡더니, 필살기 하나 막혔다고 자폭이나 하고 있네.”
눈살을 찌푸린 도현이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아니꼬웠던 걸까.
웃음을 뚝 그친 바탄이 비죽거리며 말했다.
[마음껏 놀려라. 나는 일개 자존심보다 확실한 승리가 더욱 중요하니. 너희는 결국 패배할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의 염원을 이루게 될…….]
“……왼쪽이다.”
[……뭐라?]
이 상황에 대뜸 말을 자르며 튀어나온 도현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바탄이 멈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현은 같은 말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왼쪽이라고. 심장에서 3cm 위 대각선 옆.”
[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알겠다.”
[……!?]
단호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바탄이 눈을 치켜뜨더니,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현에게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뒤.
무수한 인파를 뚫고 생생히 귀에 박히는 낮은 목소리에, 바탄이 본능적인 싸함을 느끼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푸욱!
[……?]
광란의 밤을 시전하는 그녀에게 손이 닿기 전, 들려온 섬뜩한 소리에 바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였다.
-아……?
[……아게리나?]
어디선가 날아온 검이 그녀의 등에서부터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것을.
붉은 선혈이 튀며 그의 얼굴을 적셨다.
[무슨…….]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건 꼭 마치 검 자체가 순간이동 한 듯한…….
-바탄…… 님…….
믿기지 않는다는 듯 커다래진 눈으로 천천히 떨리는 손을 뻗던 그녀가, 이내 앞으로 쓰러졌다.
[진리의 눈이 발동 중입니다.]
[심장의 핵을 부수었습니다.]
[가디언이 영구적으로 사망합니다.]
[적대 세력의 2인자 ‘???’을 처치하였습니다.]
허망하게 쓰러진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도현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 내가 말해주긴 했지만, 저 거리에서 이걸 한 방에 성공하네.”
[네놈…… 죽여버리겠다.]
“눈빛 봐라. 아끼던 부하였나 봐? 가디언이라 그런가?”
말을 주고받을 생각은 없다는 듯, 바탄이 성큼 다가오려던 찰나였다.
휘릭- 쇄애액!
2인자를 꿰뚫었던 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소리 없이 날아와 스스로 바탄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카앙!
[무슨……!]
“나도 시험해보고 싶은 능력이 있어서 기왕이면 혼자 싸우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놈이 빨리 도착한 것 같다.”
[그놈이라니 대체…….]
뒤늦게 방어막을 펼쳐 막아낸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 도현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멸살. 그놈과 오는 길에 마주쳐서 말이야.”
[……멸살?]
대답은 도현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도현의 뒤편 멀리서 들려오던 조금 전과는 달리, 바탄의 바로 뒤쪽에서.
절그럭-
허리춤에 찬 여러 개의 검이 서로 부딪히며 난 소음과 그 뒤를 잇는 고조 없는 차가운 목소리.
“아무래도. 적절한 때에 도착한 것 같군.”
집행 길드의 마스터이자 현 갓오세 명실상부 최강의 플레이어.
멸살, 그가 나타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