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0화.
“……멸살이라고?”
“멸살? 진짜?”
“어디에? 어디에 있는…… 헐, 저기 봐! 진짜잖아!?”
“와씨, 미친…… 이거 실화냐?”
명실상부 최강의 플레이어, 멸살.
현존하는 갓오세 유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유일하게 세 번째 신대륙 공략을 진행 중인 남자.
그의 등장은 유저들은 물론, 전쟁을 치르던 무수한 이종족들의 관심마저 끌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스트라의 관심마저도.
“……저 남자. 강하군. 저런 사도가 있었단 말인가?”
“자네는 모르겠지만, 과거 엘라니스를 거쳐 간 적이 있다. 그때도 적수가 없던 사도였는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과연…….”
“저자가 핵을 부순 건가? 광란의 밤이 멈추었어.”
등장과 동시에 가장 까다롭던 적인 2인자를 죽여서일까.
전쟁을 치르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적군이든 아군이든 할 것 없이 충격을 받은 듯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저들의 충격이 가장 컸다.
“아니, 멸살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세 번째 신대륙에 있던 거 아니었어?”
“따지고 보면 멸살 근황을 아무도 모르긴 했지……?”
“그럼 엘라니스에 있었던 건가?”
“라크시아도 아니고, 여기엔 왜? 아니, 그리고 있었으면 처음부터 왔어야 맞지 않나. 왜 이제 온 거지?”
“듣고 보니 그러네?”
언제나 세 번째 신대륙 공략에만 집중하느라, 이런 콘텐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멸살이다.
이번에도 대륙 퀘스트로 난리가 난 와중에도 모습 한 번 비추지 않았고.
그렇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건만…….
그런 그가 설마 이렇게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그게 중요하냐 지금? 카이저랑 멸살이 만났는데!”
“잠깐만. 저 두 사람 뎀로크에서 1위 2위였다지 않았어? 그럼 지금 옛 1위랑 현 1위가 만난 거야?”
“와씨, 미쳤다…….”
“저 둘 만나는 거 처음이잖아. 뭔 일 터지는 거 아냐?”
심지어 멸살과 카이저의 사이엔 유저들조차 아는 서사가 있지 않은가!
일만 대군이 모인 이종족들과 침입자들의 전쟁 중 두 사람이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벌써 유저들은 가슴 속 무언가가 자극되는 걸 느꼈다.
그들이 그럴진대 당사자들이라고 덤덤할 수는 없었다.
스윽.
[아게리나…… 크으, 윽…….]
2인자인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 한 수였던 자폭이 허망하게 막혔다는 게 충격인 것일까.
그녀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본 멸살이,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가면과 도복을 입은 남자, 카이저가 있었다.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던 멸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카이저.”
“글쎄. 오랜만이라기엔 우리가 접전이 많이 없지 않았나?”
“그도 그렇군. 뎀로크에서도 몇 번 스쳐봤던 게 다였으니.”
“그랬지.”
“……핵의 위치를 파악한 건 네 기술인가?”
“뭐 그렇지.”
“그렇군.”
어색하기 그지없는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딱딱한 침묵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돈다.
유저들의 바람(?)과 달리, 서로를 견제하거나 경계하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더럽게 할 말이 없었을 뿐.
뎀로크 시절에도 서로 이름만 알고 있었지, 이렇게 마주 보고 정식적으로 대화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여기서도 없을 거라 여겼다.
만약 마주하게 된다면 그건 적으로서 만날 거라 생각했건만…….
‘아군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사람 일 모르는 거라더니, 본인이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멸살도 마찬가지였는지, 오묘한 눈으로 도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 싸움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저놈의 기계 같은 포커 페이스 때문에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할 말도 없어서 입을 다문 것뿐인데, 유저들이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와…… 숨 막혀.”
“서로 마주 보기만 하고 있는데 분위기 뭐냐. 공기가 무겁다는 게 이런 건가. 긴장감 넘치네.”
“이종족들까지 다 저 두 사람 보고 있는 거 아냐?”
“근데 왜 서로 말이 없지? 기 싸움하는 건가?”
“서로 수준 파악하는 거 같은데?”
“보기만 해도 그게 파악이 돼?”
“우리 같은 범부가 뭘 알겠냐. 저 정도 급 되면 뭔가 느껴지겠지.”
이쪽을 바라보며 연신 속닥거리기 바빠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 먼저 눈을 돌리기도 뭐해서 가만히 있을 때였다.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한에 사무친 귀신 같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씹어먹을 놈들이…… 감히…….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네 두 놈만은 반드시 갈가리 찢어발겨 주마.]
타이밍 좋게 바탄이 충격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킨 것이다.
내뱉은 말처럼,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 펼친 양손에서 불길한 검은 기운이 거칠게 일렁거렸다.
하지만 그건 그저 전조일 뿐이었다.
콰아아아아–!!!
“뭐, 뭐야 갑자기!”
“으억! 깜짝이야.”
“또 뭐야!?”
거칠게 일렁이던 기운이, 폭사하듯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친 것이다.
한 줄기 어둠의 기둥이 뻗은 듯한 광경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알테리온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아직도 힘을 숨기고 있던 건가. 지독한 놈이로군.”
“최후의 발악인가……. 저 검은 마나가 놈의 생명을 불태우며 커지고 있군. 아마 마지막 싸움이 될 것 같다.”
아스트라의 말에 알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대로였다.
바탄이 발동한 마법은 금단으로 여겨지는 흑마법.
생명을 불태우는 흑마법 중에서도 가히 최악이라 불리는 기술.
[적대 세력의 수장, ‘바탄’이 생명을 불태워 금단의 마법을 시전합니다.]
[최후의 마법, ‘멸신귀도(滅身歸道)’가 발동됩니다.]
[몸을 멸하고 진정한 어둠인 ‘심연’의 길에 한 발짝 발을 들입니다.]
[마지막 페이즈가 발동됩니다.]
[바탄의 심연화가 시작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심연에 가까워집니다.]
멸신귀도(滅身歸道).
스스로 필멸자의 그릇을 부수어, 심연을 받아들이는 이 흑마법은 단순히 심연과 계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필멸자의 몸으로 심연에게 힘을 일부 이어받는 것과 달리, 이 기술은 말 그대로 심연 그 자체가 되는 것.
하물며 바탄은 일개 마법사가 아닌, 최소 9서클의 경지에 이른 흑마법사.
[주의!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어둠의 흑마법사가 멸신귀도를 시도하였습니다.]
[심연에 높은 이해도와 뛰어난 적응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가 온전한 심연이 될 시 ‘심연의 강자’가 될지도 모를 잠재력을 얻게 되며, 먼 미래 재앙이 닥칠 수 있습니다.]
[돌발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심연이 되려 하는 바탄을 막아내십시오. 실패할 시 차후 멸망급 대륙 퀘스트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멸망급?”
“미친, 대륙 퀘스트가 마지막 단계 아니었어?”
“지금 깨는 게 대륙 퀘스트잖아. 그럼 저거 못 잡으면 그 이상의 난이도가 되어서 돌아오는 거야?”
“맙소사.”
모두의 위로 경고음처럼 울려 퍼지는 알림에 유저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낀 이종족 군단들도 모두 바탄을 주시하며 멈칫거렸고.
그어어-
심연의 마수들은 새로운 주인이 될지도 모를 이에게 예를 표하듯, 일제히 바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본능밖에 없는 심연의 행동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모습.
[크, 크하하! 무한한 힘이 느껴진다. 아아, 이것이 심연……. 그들은 이런 힘을 가지고 살아가던 건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란 말인가!]
놈의 목소리가 귀신 들린 듯 기이해져 가고 있다.
형체 또한 인간형을 유지하고만 있을 뿐.
일렁이는 어둠 너머로 언뜻 보이는 얼굴이 심연의 마수에 가깝다.
“아무래도 인사하기 좋은 무대는 아닌 것 같군. 놈부터 처리하지.”
“동감이야.”
이 상황에조차 덤덤한 멸살의 말에 도현도 툭 내뱉듯 답하며 천변을 쥐었다.
그리곤 앞으로 내딛으려는 순간.
누군가 도현의 앞을 막아섰다.
멸살이었다.
“내가 먼저 나서지.”
툭 내뱉은 그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네 자루의 검 중 세 번째 검집을 집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아, 이 힘이야말로 내가 바라마지 않던 것……. 그래, 이것이야말로 나의 염원이다. 크하하하! 종말의 순간인 것이다!! 모두 압도적인 힘 앞에 처참히 무릎 꿇어라!]
사아아아-!!
반쯤 심연이 된 바탄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광범위로 짙은 검은 기운을 흩뿌렸다.
기운에 잠긴 부분이 한치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식되어간다.
이대로 두면 세상 전체가 어둠이 될 기세에 유저들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주춤 뒤로 물러나던 그때.
번쩍!
멸살이 검을 뽑자, 한 줄기 섬광이 뿜어졌고.
서걱-!
뿌옇게 물든 시야 너머로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멸살.
갓오세 최강의 플레이어. 10대 길드의 상징. 정점.
그의 이름을 잇따르는 명칭은 무수히 많다.
어쩌면 세는 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을 만큼, 최강이라는 뜻이 붙은 것은 모두 멸살을 향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 이명이 하나 있었다.
-검의 주인.
촤아악-!
[고유 능력 ‘ 초월 고유 능력 ‘검의 주인’이 발동됩니다.]
[모든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을 얻으며 검의 성능과 위력이 주인의 수준에 비례하여 성장합니다.]
[마법검 ‘열계(裂界) – 도’가 ‘검의 주인’의 효과를 받습니다.]
시그니처 특성이 아님에도 오직 멸살만이 가진 최초이자 최후의 고유 능력.
그렇기에 검의 주인은 오직 멸살을 뜻하는 명칭이 되는 것이다.
본디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다섯 자루의 마법검을 사용하며, 그야말로 검의 주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만능에 가까운 전투를 했기에 그리 불렸지만…….
‘……만능? 그래. 만능이긴 하네.’
그의 발도술을 눈앞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도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다섯 자루의 검?
약점 없는 만능에 가까운 전투?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직접 보게 된 멸살을 상징할 수 있는 건 그딴 게 아니었으니까.
[전설(유일) 무기 ‘열계(裂界) – 도’의 특수 옵션 ‘멸법참(滅法斬)’을 시전합니다.]
[단 한 차례 시전 범위의 모든 마법을 멸합니다.]
[바탄의 ‘멸망의 어둠’이 멸하였습니다.]
사아아-
[이게 무슨……?]
“아…… 어둠이 베였다?”
“이게 뭔…….”
“미친…….”
무려 최소 9서클의 흑마법사가 행하는 마법에조차 통하는 광범위의 안티 마법 기술을 지닌 것?
그것도 사기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시그니처 특성 ‘검의 영혼’을 발동합니다.]
[보유한 성장이 가능한 검에 영혼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전설(유일) 무기 ‘열계(裂界) – 도’에 영혼을 부여하였습니다.]
[전설(유일) 무기 ‘용살의 마법검 크산테’에 영혼을 부여하였습니다.]
……
[도합 여섯 자루의 마법검이 ‘에고’를 지니며 ‘이기어검’ 상태가 됩니다.]
[이기어검의 영역에는 특수 옵션 또한 적용됩니다.]
‘허. 애당초 다섯 자루도 아니네 저거.’
무려 여섯 자루의 사기적인 성능의 마법검으로 행하는 이기어검술.
그것이야말로 멸살을 정점으로 만들어준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