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9화.
-어? 단장! 역시 무사했군요.
-거봐, 내가 단장이라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일단 집중하라 했지?
-단장도 돌아왔겠다, 얼른 본체 풀자. 난 이 모습 너무 못생겨서 싫어.
-동감이야.
칠강(七强) 중에서도 최강을 꼽을 때 늘 손꼽히는 NPC의 패배.
실로 충격적인 결과였으나, 더 놀라운 건 패배한 게 검황(劍皇)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아, 단장. 왔어? 없어졌길래 혹시나~ 해서 빠르게 정리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즐길 걸 그랬다.
“……쿨럭, 컥.”
-미안미안, 많이 아파 보이네. 괜찮아? 모처럼 맘에 든 장난감인데…… 죽는 건 아니지, 영감? 아, 뭐야…… 그 태양인가 뭔가 하는 재미있던 기운이 다 없어졌잖아?
“태양극(太陽極)이다, 늙어서 오래 못 버틴다지 않았나.”
-이래서 환골탈태도 못한 인간이란…… 아쉽네.
태양극(太陽極)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진작 끝났으나, 계속해서 버텼던 권왕이지만…….
이제는 정말 한계가 온 것이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몸은 더 이상 싸우지 못하니까.
‘내 몸은 내가 안다. 모든 힘줄이 끊겼어. 회복한다 해도…… 이제 무도의 길을 걷진 못하겠구나.’
씁쓸한 현실이었으나, 그런 알량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겨우 그런 걸 슬퍼하고 있기엔 주변에 펼쳐진 광경들이,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했으니까.
카앙! 서걱-!
푸욱, 푹! 푹!
“끄, 끄아악! 살려줘.”
“젠장, 이 정도로 차이 나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종족들도 밀리기 시작했어.”
“우리에 비해 집행자들이 너무 많이 살아남았어.”
“아니, 저 거지 같은 지원군들은 대체 뭔데! 처음 등장하는 드워프가 왜 하필 쟤네 편에 서 있는 거야!?”
다시 기존의 모습으로 돌아온 키센 우라쿠의 뒤로, 울며 겨자 먹기로 불리한 싸움을 이어가는 아군들이 보였다.
[새로운 이종족, ‘드워프’들이 집행자의 편에 합류하였습니다.]
[드워프들이 만든 전쟁 무기를 조심하십시오.]
-위대한 카디움 님을 위하여!
-저 재수 없는 귀쟁이들을 모조리 말살하라!
-우리 드워프들의 힘을 보여주자고!
-능력도 없으면서 키만 큰 놈들은 다 죽어야 돼!
콰아앙-! 콰앙!
“저, 저건 사실상 대포잖아! 대포를 쏘는 건 아니지!”
“남들 화살 쏘고 마법 쏠 때, 누군 그냥 대포 쏴 재끼네.”
월령단을 태양처럼 따르는 숨겨진 세력.
그중 하나인 드워프가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드워프만 참전한 건 아니었다.
크아아! 크룩크룩!
크라라랄!
온갖 처음 보는 해괴망측한 이종족들이 판을 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게 드워프였던 것뿐이었다.
그들이 만든 ‘발리스타’는 현대의 대포에 비견될 만큼 강력한 파괴력과 투척력을 보였으니까.
[엘프 장로, ‘알테리온 엘란드리엘’ 이 특성 ‘대마법사’를 발동합니다.]
[대마법사 특성으로 인해 시전 속도가 크게 줄어들고, 범위와 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블리자드’를 시전합니다.]
……
[광역 마법의 시전 속도가 크게 줄어들며 범위와 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신목(神木)의 분노’를 시전합니다.]
“크윽…….”
“나에게 맡겨라, 저 더러운 것들을 죽이고 오지.”
“아니! 이곳에 있어라. 아스트라. 사도들을 도와야 해. 그들이 모두 패배하면, 그게 곧 우리의 패배야. 세계수께서 내린 계시를 잊었나.”
“……빌어먹을.”
그것을 막기 위해 알테리온과 아스트라의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그 둘이 전쟁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했기에, 이는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그뿐이랴.
[초월 고유 능력, '세레니아의 성스러운 광명'을 시전합니다.]
[여신의 성스러운 빛이 모든 것을 불태웁니다.]
[성스러운 빛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신성력에 비례하여 강력한 광역 피해를 입힙니다.]
[악행을 저지른 대상은 피해량이 2배로 적용됩니다.]
서걱-!
화르르륵!
“크아아아아악!!!”
“아니, 고유 능력은 그렇다 쳐도, 왜 스킬들까지 반역 효과가 터지는 거야!?”
“오거족들은 혹시 몰라도, 엘프나 님프는 악(惡)이 아니잖아!”
“어리석은 질문이군. 신에게 대적하는데, 그게 악인이 아니면 무엇이지?”
성검(聖劍)의 주인, 아더.
그 어떤 집행자 진영의 유저들보다 강한 깽판 치고 다니는 그의 영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화륵- 서걱!
화르르-
본디 조건부였던 능력들이 모두 상시발동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젠 그의 검에 베이면 신체가 절단되고, 신성력이 담긴 성검의 소드 오러에 베이면 회복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게서 도망치면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냐?
[성역(聖域)으로 지정된 영역입니다.]
“벙커링 개꿀인데?”
“진심, 누워서 떡 먹기네.”
“크으, 역시 집행자 편에 서길 잘 했다니까. 이게 사람이 줄을 잘 서야 해요, 줄을.”
“탱커, 힐러, 원딜로 구성하고 뭉쳐있으니까 뭐 뚫질 못하네.”
성역 강림이 펼쳐진 곳은 광활한 평원의 중심, 사방을 굽어보는 완만한 구릉이었다.
높다고 부를 만큼 가파르진 않았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성역 안의 아군은 축복을 받고, 성역 밖에서 기어오르는 적은 디버프에 짓눌렸다.
그 순간 그 언덕은 더 이상 지형이 아니라,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어어- 그어-!
쿠우웅!
“흐히, 흐히히. 다 죽여라! 이래도 나오지 않을 것이냐, 멸살!!”
“씨X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저 미X년 진짜…….”
그렇다고 외곽으로 빠지자니, 사방에 포진되어 있는 사왕의 죽음의 군단들이 문제였다.
크고 작은 수많은 언데드들이 방해하는데, 발이 묶이면 불리한 건 대항자 유저들이기 때문이었다.
[초월 특성 ‘죽음의 지배자’를 발동합니다.]
[총군단장의 격이 압도적입니다. 총군단장 소속의 병사들이 죽음을 극복하고 현세에 거슬러 올라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해골 병사의 형태로 재구축됩니다.]
그어어어-
덜그럭- 덜걱.
죽으면 끝인 그들과 달리, 저 빌어먹을 것들은 다시 살아나니까.
무엇보다 정면돌파를 할 자신도 없다.
심연의 마수들과 유저들만으로도 벅찬데, 사왕의 군단장들은 하나같이 거대하고 강력했으니까.
콰아아앙앙!
“저 X같은 본 드래곤은 또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길드전 때나 이렇게 할 것이지, 왜 애꿎은 우리한테 화풀…….”
“……너, 방금 뭐라 했어? 죽, 여…… 저, 저 못생긴 놈부터 죽이라고!!”
“히이익!”
언데드 군단과 더불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발리스타를 피하면, 이젠 본 드래곤이 운석마냥 떨어진다.
그 와중에도 기어코 도망을 치면?
히이잉- 후우웅!
“게임 X같이 하네.”
“에라이, 걍 죽여라. 더러워서 진짜.”
“배 째 그냥!”
말을 탄 데스 나이트들이, 빠른 기동성으로 쫓아와 검을 휘둘러대니 미칠 노릇이었다.
[시그니처 특성, ‘이단 척결’을 시전합니다.]
“이단자들을 죽여라! 죽더라도 카신께서 가는 길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는 거다!”
“카메엔!!”
“죽어라!!”
광신도, 아나스타샤가 이끄는 카신교가 끝까지 적들을 몰아내고 있지만, 딱 그들이 있는 곳에서뿐이었다.
이 넓은 전장에서 그들이 커버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던 것이다.
“허억, 헉…….”
해링턴은 쫓기면서도 쉼 없이 화살을 쏘아냈지만, 어느새 따라잡히기 직전이었고.
광신도를 비롯한 간부들은 잔뜩 지친 채.
대항자와 마수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땅에 꽂은 대검을 지팡이 삼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르시아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비켜.”
“하지만, 한계이십니다…… 혼자서 너무 많은 마수들을 상대하고 있어요.”
“르시아 님…….”
“……그리 보지 마십시오, 여왕. 내가 아니면 누가 심연화를 저지할 수 있죠? 여왕께선 보이시지 않습니까, 한계에 도달한 땅이. 이미 집어 삼켜졌단 말입니다.”
“…….”
“제가 더 막지 못하면…… 못하면…….”
“르시아 님!!!”
님프들의 가장 위대한 대전사, 르시아조차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종족들도 한계고, 세력은 밀리며, 전쟁에 참여한 칠강 셋이 전투 불능이다.
유저들마저 압도적으로 밀리는데, 상대는 월령단을 따르는 세력들의 개입으로 점점 더 강대해지고 있으니…….
“……끝이야.”
“다 끝났다고, 씨X.”
“애초에 하면 안 되는 싸움이었어. 질 게 뻔했다고.”
“하지만 아직 안 온 사람들이…….”
“카이저? 멸살? 이제 와서 달라질까? 그놈들은 도망친 거야. 질 걸 알고 내뺀 거라고.”
유저들의 사기는 이미 가라앉을 때로 가라앉은 게 지금 대항자 진영의 상황이었다.
캉! 카캉! 캉!
파바박, 휘릭-
-……인정하마. 바르간들이여. 전력을 발휘하고도 아직 승부를 내지 못할 줄이야.
“하, 하아…… 힘들어 뒤지겠네. 말할 힘도 없으니까 입 닫고 들어와, 새꺄.”
“……나도 이제 슬슬 한계다. 큰 걸 노리거나, 잠시 빠지거나 고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네가 후자를 고를 리는 없겠지.”
“잘 아네.”
“후우. 그럴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 들어가지.”
그나마 검성과 여제.
두 사람이 완전체가 되어 검은 괴물 그 자체가 되어버린 볼카른 블랙을 상대로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결코, 메말라버린 사기를 채워줄 단비 한 방울이 되지 못했다.
꽈악-
아스트가 죽기 직전이었음에도, 이 모든 것을 눈에 담을 수 있던 이유.
-어떤가, 바깥은. 그대의 생각과 같은가? 그대의 발악은, 희생은…… 유의미했나?
이 빌어먹을 놈의 배려 덕분이었다.
아니, 배려가 아닌 조롱이 목적이었겠지.
네가 한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벌레의 몸부림에 불과했다는 걸 보여주려고 말이다.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었으나,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들을 끝내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씨X.”
그가 생각해도, 이 빌어먹을 상황을 해결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잔인했다.
“르시아 님!!”
“아아, 안 돼. 르시아 님이 쓰러지시면…… 더는 심연화를 막을 수가…….”
“르시아 님을 대피시켜야 한다! 엄호해 어서!”
어디선가 새된 비명이 들려오더니, 갑자기 공기가 변했다.
그 이질적인 감각에 아스트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이들이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낄 때.
[전장의 심연화가 일정 수치 이상 진행되어, 심연의 강자들이 위치를 감지합니다.]
[끔찍한 기운이 이곳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합니다.]
[위험!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심연의 눈이 뜨입니다.]
“아.”
적막을 깨고 울린, 알림음을 본 유저들이 탄식을 흘렸고.
쿠구구구구–!
전장이 뒤흔들리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발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저들의 발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이종족들, 유저들 할 것 없이 하나둘씩 집어 삼켜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에 피아식별은 없었다.
그어어-!
-떠, 떨어져라! 나, 나는 심연 따위 될 생각 없단 말이…… 으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카디움 님.
-아, 안돼…… 이대론…… 끄아악!
“씨X 이게 뭐야! 다들 갑자기 왜 저래!?”
“튀, 튀어!”
드워프를 비롯한 카디움을 따르는 세력들.
“아아…… 안 됩니다. 이렇게 심연에게 지배당해서는…… 그, 그으윽.”
“발트린! 견디게! 자네는 자랑스러운 빌란드 기사단일세! 세계수를 모시는 몸으로써 더러운 심연이 되어서는…… 발트린!? 젠장!”
“최소한……, 우리의 손으로 끝을 맞이하게 해주도록 하게.”
그리고 엘프나 레타족 같은 대항자의 이종족들까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심연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경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광활한 전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길한 어둠으로 물들었으며.
사아-
아비규환 그 자체였던 전장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살아가며 무조건 들을 수밖에 없는 백색 소음마저 사라지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감 중 하나가 사라진 듯한 기묘한 감각에 소름이 돋은 순간.
주변이 격변했다.
꿀꺽.
“바, 바닥이 꺼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왔군.”
지면을 잠식한 어둠이 거칠게 일렁이며 끔찍한 기운을 풍기더니.
이내 반으로 쪼개지며 거대한 눈이 뜨인 것이다.
[심연의 눈이 뜨였습니다.]
[심연의 통로가 열렸습니다.]
[심연의 강자, 불멸의 주인이 이곳을 바라봅니다.]
[심연의 강자, 분노의 주인이 이곳을 바라봅니다.]
[심연의 강자, 파멸의 주인이 이곳을 바라봅니다.]
[심연의 암흑기사가 이곳을 바라봅니다.]
[심연의 파수꾼이 이곳을 바라봅니다.]
본래는 여기서 멈추어야 했을 문구.
하나…….
쩌적- 터벅.
거대한 심연의 눈을 강제로 찢고 나타난 그들은, 주변을 내려다보며 섬뜩한 광소를 터트렸다.
[크흐, 크흐흐…… 크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때가 왔구나!]
[아아, 상쾌하구나. 이 죽음의 기운들…… 아주 좋은 공기야.]
“아, 아아…….”
“……X됐다.”
심연의 강자들과 그들의 군단이 비로소 아브타르텔에 강림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