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9
0. <암습(8)>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당서희의 오른손이 이미 장삼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겉으론 안 보이지만 그 안에서 저들을 단박에 죽일 수 있는 독과 암기를 조합하고 있겠지.
제갈천기는 이미 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이렇게 보니 든든하네. 같이 들어오길 잘했어.‘기특한 것들.’나는 당서희와 제갈천기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감정을 꾸욱 누르고 대신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진정하세요, 당 선배. 진정하거라, 천기야.”
이곳에 들어온 건 싸우기 위함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지.
설사 담악이 무림맹에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그 개새끼들한테 풀어야지 내가 대신 욕바지가 될 이유가 무에 있나?
“대가는 그놈들한테 직접 받으시지요. 제가 무림맹을 대표하는 입장도 아닌데.”
담악을 달래 보았지만 검은 내려갈 줄 몰랐다.
“…….”
뭐지, 진짜 한판 할 셈인가?
그럼 안 되는데.
“총군사가 무림맹에 억하심정을 가진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는…….”
격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담악이 마른 미소를 짓는다.
“재미없군요.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습니까.”
담악이 손을 내리자 사절단으로 참석한 사흑련도들이 일제히 무기를 거두어들였다.
어안이 벙벙한 현 사태에 눈알만 끔뻑거리고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장난이었습니다. 장난.”
“장난?”
시발, 이 위중한 사태에 이런 진지한 분위기로 장난을 친다고?
어처구니없는 그의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담악은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다.
“역시 백도 무사는 재미가 없군요. 이런 때일수록 요런 장난이 더욱 재미있는 법인데.”
아니, 자기가 언제부터 흑도인이었다고.
전생의 이맘때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던 사람이!
“그래도 생각보다 늦었습니다. 편지를 받는 즉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숫자만 달랑 써 있는 편지를 보고 어떻게 들어옵니까?”
“흠…… 무량불괴멸혼진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흑무고혼진 정도는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거야 기억력으로 무식하게 머릿속에 경로를 때려 박은 덕분이…….
“생각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진 건 아니었군요.”
이 인간 왜 자꾸 살살 긁지.
안 해도 될 말까지 해가면서.
“흐음, 백수신녀의 도움을 받은 건 아닌 것 같고…… 그 뒤에 친구의 도움을 받은 겁니까?”
담악의 시선이 제갈천기에게로 향한다.
천기 녀석이 나를 바라보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태을문’의 제갈천기라 합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의 예의만을 취하는 제갈천기.
담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성만 ‘제갈’인 겁니까?”
“그 제갈세가의 출신은 맞습니다.”
천기의 답변에 담악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재밌군요. 제갈세가의 사람이 자신을 태을문의 사람이라 표현을 하다니…….”
그러곤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참으로 이상한 재주가 많은 사람입니다. 진 공자는.”
나는 달리 답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나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호위들을 지나쳐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진식을 해진하지 못한 겁니까?”
“내가 해진할 수 없는 진식을 어찌 펼치겠습니까.”
“그럼 왜 나오지 않은 겁니까?”
담악이 한 박자 호흡을 고른 뒤 천천히 입술을 열였다.
“아직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역시나 담악은 전날의 습격에 아직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분명 전후 사정도 모를 터.
“무림맹 총군사 또한 습격을 받았습니다. 흉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요.”
“음…… 그날 시끄러웠던 것이 총군사의 일 때문이었습니까?”
“맹 내부에서 잠정적으로 흉수를 ‘그들’로 지목했습니다.”
사흑련에서도 담악의 앞에 ‘군유현’으로 나타났던 그놈들.
“참으로 통탄할 일이군요.”
담악이 작게 탄식했다.
“그러니 이제 나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담 군사께서 이리 농성하시고 계신 탓에 전 강호가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전 나갈 수 없습니다.”
바로 돌아오는 단호한 대답.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려 온다.
“어째서죠?”
뭔 소리를 하는 거지.
그간의 배고품과 굶주림 때문에 정신이 나간 건 아닐 테고, 또 이런 장난을 쳤던 걸 보면 내가 한 말을 못 알아먹은 것도 아닐 텐데…….
“혹시…… 아직도 농담하시는 중입니까?”
도저히 이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담악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우리가 그 정도의 친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갑자기 거리감을 벌리고 그러신데, 서운하게.
“그럼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문자 그대로입니다. 저를 향한 화살은 아직 활시위에 걸려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러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릴 공격한 건…….”
저벅
-불현듯 담악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무림맹을 공격한 건 ‘그들’이었겠지요. 하지만 우릴 공격한 건.”
그리고 나를 꿰뚫듯 빤히 응시하며 덧붙였다.
“‘무림맹’이었습니다.”
마치 삼라만상의 진리를 이야기하듯 확신하는 그의 태도.
아무리 그래도 우리 편이 그렇게까지 막장은 아닌데…….
그렇지 않나?
고개를 돌려보니 왠지 당서희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사절단과 무사들을 대동한 담악은 별채의 뒤편으로 우릴 안내했다.
“그때 그분은 안 보이는군요.”
“누구 말입니까?”
그 왜 있지 않은가.
졸업식에서 ‘저희 총군사께서 말씀하시길……’ 하며 계속 전음을 보내던 뻐꾸기.
누굴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담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분이라면 뒤편에 계십니다.”
그 사람은 어찌 되었든 담악의 수신호위가 아니었던가?
수신호위가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흑무고혼진에 대한 신뢰와 그 안정성이 대단한 건가 생각할 때쯤.
뒤편 마당에 도착했다.
하지만 수신호위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입니까? 인사를 하고 싶은데. 뭐, 나름대로 인연도 있고.”
그저 말을 전달해 줬다 해도 말을 섞은 건 섞은 거였으니까.
떠오르는 지난 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던 찰나.
“그분이라면 저기 있지 않습니까.”
담악이 담담한 손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손님들이 가볍게 몸을 풀 수 있도록 대리석이 깔린 작은 마당 위.
그곳엔.
“이분이십니다.”
짚풀로 덮인 한 구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촌음의 시간도 떨어져선 안 되는 수신호위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나.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보다도 더 사흑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담악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안엔 명백하게 차갑고 시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 않은 듯 표현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더욱 소름 돋게 느껴졌다.‘위험하다.’담악이 품은 분노는 범상치 않은 것이다.
그가 무림맹이 아닌 사흑련의 총군사가 되었음에도 안도했던 이유는.
그만큼 뛰어난 인재와 함께 마교에 맞서 싸울 수 있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홀로 마교에 대항했던 전생에서는 그 결말이 멸망이었으나, 이번 생에선 사흑련이라는 친구가 함께함으로써 다른 결과를 맞이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뛰어난 친구가 우릴 향해 적대적인 감정을 쏘고 있었다.
얼른 오해를 풀어야 했다.
“무림맹 또한 이번 일에 대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실제 제갈소명의 수신호위들 세 분도 돌아가셨으니까요.”
수신호위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담악이 물끄러미 나를 본다.
“……
무림맹도 당했기 때문에 무림맹은 적이 아니라는 논리입니까?”
“단지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
“이쪽으로 잠시 가실까요?”
담악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별채 옆으로 향했다.
그곳엔 담악의 수신호위와 마찬가지로 짚풀로 덮인 세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이자들이 우릴 습격한 자들입니다.”
동시에 당서희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나를 올려다봤다.
시체를 확인해 보겠다는 뜻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곧장 가까이 다가가 짚풀을 열어젖혔다.
확 풍겨오는 시취.
죽은 지 오래되어 핏기가 가신 회백색의 시체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마교는 강박적이라 느껴질 만큼 시체를 남기지 않는데, 고심을 하지 않던가요?”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제금학을 상대해 본 담악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상대가 마인인지 백도인인지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 시체들이 아니더라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시발.’이들의 얼굴을 안다.
이번 생에 만난 적이 없었지만 전생에 전장터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이들이다.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부들대는 주먹을 감춰 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정도회……!’각각 구파일방 속가 무문에 적을 둔 이들.
따로 차출되어 정도회를 위해 일을 하던 특작대원들이다.
제갈소명이 죽은 뒤에 정식으로 맹도가 되는 이들이 벌써부터 무림맹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담악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적에 금을 낸다.
“이걸 보고도 무림맹이 한 짓이라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답할 수 없다.
무림맹이 정도회는 아니지만,정도회가 무림맹이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으니까.
더구나 정도회는 무림맹에 영향을 주는 가장 강력한 세력.
이들을 무림맹이 아니라 이야기 하는 건 담악을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당서희가 판결을 내리듯 말을 덧붙였다.
“이자들에게선 사기의 흔적이 없는 것이야. 백도인이 맞는 것이야.”#나는 이 엿 같고 병신 같은 사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담악 일행과 잠시 떨어졌다.
정도회의 의도는 명확하다.
– 사흑련과 무림맹 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 제갈소명이 무림맹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만큼 담악은 사흑련을 결속시킨 대단한 인물이다.
– 무림맹에 제갈소명이 없으면 큰일이 나듯 사흑련에 담악이 없으면 큰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무림맹에 왔을 때 죽이자!‘병신 같은…….’참으로 단순 명쾌하다 못해 진심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솔한 행동들이다.
문제는 똥은 정도회가 쌌는데 이를 치우는 건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 이 상황에 머리가 멍해져있는 사이.
당서희가 말했다.
“이상했던 것이야.”
“뭐가 말입니까.”
“봉안전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야.”
“폭발음에 달려왔다기엔 또 지나치게 빨랐던 것이야.”
기억력을 되집어 보면 그곳에 있던 인물들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정도회에 연관된 자들이다.
왜 이걸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게다가 시기가 몹시 절묘하다.
내전에서 그 난리가 난 와중에 일을 결국 도모했다니.
오히려 그 상황을 호재라고 생각했을까?
이 정도면 아집은 독기로, 멍청함은 개성으로 인정해 줘야 하나 싶다.
나는 가만히 내 옆에 앉아 있던 천기 녀석을 바라보았다.
“천기야.”
“네.”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냐?”
나는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총군사 손자인 네가 생각을 좀 해봐라.
그리고 제갈천기는 금방 대답을 내놓았다.
“이곳의 상황을 총군사께 알리고 범인을 색출하는 방안이 최선일 듯합니다.”
그다운 모범적인 답변.
아마도 이게 가장 정답에, 아니 정석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아니겠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서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 선배는요?”
“저자의 의도를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이야.”
“응?”‘당과를 주면 되는 것이야.’ 정도의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내가 만약 어떤 가문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는데, 그 가문 암습을을 당했다면…… 난 그 즉시 그 가문을 멸족시켜 버릴 것이야.”
의외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도 본능적이고 당연한 답변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답이 당서희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할 말을 잃은 사이, 당서희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혼자 고민할 때가 아닌 것이야. 직접 물어보는 게 최선인 것이야.”
직접 물어보는 게 최선이라…….
지푸라기에게 당과를 먹인 보람이 있네.
나는 고민 끝에 담악에게로 향했다.
당서희의 말대로 어차피 홀로 생각한다고 답변을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일단 이곳의 상황을 총군사님과 맹주님께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범인을 찾아…….”
“거부하겠습니다.”
“네?”
담악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차분한 표정으로 눈을 바로 떴다.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면 이미 진작 범인이 잡혔을 겁니다. 그리고 진식 안으로 음식 대신 범인의 수급을 넣어 주었겠지요.”
“이곳의 상황을 알리는 것도 반대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흉수들이 아는 순간, 실수를 깨닫고 다시금 나를 없애려 할 테니까요.”
담악은 여전히 확신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그들의 얕은 술수 따위에 놀아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범인을 잡아 온다면.”
“그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대가 범인을 잡기 위해 맹을 휘젓고 다닌다는 건, 내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행동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당서희가 내 팔을 툭툭 잡아당겼고.
그녀의 멍한 눈빛을 잠시 내려다보다, 담악을 향해 툭 뱉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담악이 지그시 두 눈을 감는다.
“나는 이곳에서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내가 직접 이곳에 온 것은 위험을 부담하고 그대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행위였으니까요. 일이 잘못되어 목이 잘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요.”
사흑련과 무림맹의 동맹.
그 위험한 도박을 위해 담악은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았다.
“내 목숨 하나로 사흑련을 결속할 수 있다면 좋은 거래라 생각했으니까요.”
감았던 눈을 조용히 뜬 그의 시선이 수신호위의 시체로 향한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담담한 그 시선이 내게로 옮겨진다.
흠칫
– 몸을 떨 수조차 없을 만큼 담담한 시선.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의 목숨 따윈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그 시선 속에는 언제나 고요를 유지했던 그에게선 보지 못했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를 탈출시켜 주십시오. 무림맹의 손아귀로부터.”
모든 것을 불태울 각오가 된 자의 눈빛이었다.